< -- 9 회: #1-1 그 남자 -- >
뮤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오히려 화조차 나지 않을 만큼.
감히 배롤린 남작 따위가 어떻게 그를 상대로 이런 짓을 저지를 생각을 다했단 말인가! 그 속에 든 뇌가 어찌 생겨먹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배롤린은 겁을 상실해도 제대로 상실했다.
뮤는 눈앞에 선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 여인도 아닌 여자아이라니.
성인식조차 치렀을지 심히 의심될 만큼 어려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며 뮤는 배롤린 남작의 부은 간덩이를 칭찬해 주었다.
네까짓 것이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해?
배롤린 남작은 큰 실수를 했다. 첫 번째 실수는 자신에게 거짓을 고한 것이요, 두 번째 실수는 자신의 기분을 무척이나 더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는 참수형을 면치 못하리라. 그가 황태자의 이름을 팔아먹었다는 것은 그 두 가지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죄는 아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알브레히트 공작님을 불러오라 제게 명하셨습니다."
그가 그리 말했던가?
황태자의 전언을 전한다는 배롤린 남작의 말 따위, 뮤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그는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고 또한 그 빌어먹을 황태자는 그딴 식으로 자기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들 시각, 갑자기 쳐들어오던 중 담을 뛰어 넘다 마법 망에 걸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발각된 후 실실 웃는 모양새라면 모를까. 배롤린의 쩔쩔매는 그 꼬락서니가 하도 웃겨서 또 황태자의 이름을 팔아먹을 만큼 꾸민 일이 대체 무엇인지 약간의 흥미가 동해서 그는 남작의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주었다. 물론 연회장이 미치도록 따분했던 것도 한몫했고. 그런데 그 거짓말에 속아준 대가가 고작 이따위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뮤는 여기 오는 그 길에 배롤린을 베어도 이미 수천 번 베어 죽였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토록 괘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이가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스스로의 오만 때문이었을까? 뮤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쾌하고 역겨웠다.
주위 넘쳐나는 것이 여자라는 종족인데 뭣 하러 저깟 어린 아이한테까지 자기가 손을 뻗을 거라 여겼나? 응?
배롤린 남작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점점 더 강렬히 치솟아 오른다. 남작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뮤에게 저질렀다. 감히 자기를 우습게 본 그의 행동엔 철저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뮤는 씹어 삼킬 듯 날카로운 조소를 입에 베어 물었다.
기다려라, 남작. 곧 네 놈과 네 놈의 그 하찮은 가문을 흔적도 없이 없애줄 테니.
그 날카로움을 유지한 채 뮤는 웃었다. 그 웃음은 배롤린 남작을 향한 것이었다. 그의 기름기가 가득한 두꺼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싹싹 빌게 만들리라. 벌레처럼 기고 개처럼 사정하게 만들리라. 하지만 용서 따윈 없을 것이다. 잔인하게 베어버리리라. 그깟 베롤린 남작 하나, 설령 이유 없이 죽인다 하더라도 타격을 받을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가 아니다.
"넌 그만 나가보-."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뮤가 짜증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 나가보라고 여자아이에게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더한 짜증을 품고 있는 목소리와 그 내용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쳐다보게 된 그 얼굴에 신경질이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빌어먹을 새끼.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썩을 새끼 같으니라고! 성인식을 제대로 치러준다 했을 때 알아봤지. 그렇다고 성인식 시작하고 채 1시간도 안돼서 나를 팔아먹어?"
"……."
"빌어먹을 돼지 새끼 같으니라고."
흐음.
딱히 다른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눈앞의 이 여자아이가 생각보다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뮤는 나가라 명하려 했던 것을 잠시 버려두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여자아이가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
나를 모르는 건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방에 들어섰나?
방금 전 아이가 중얼거린 말을 유추해 보고 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아이는 이 상황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선 것은 아니리라.
뮤가 입을 열었다.
"뮤아르노와 알브레히트."
정말 오랜만에 뮤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이렇게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만났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뮤에 대해 뮤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는 소개는 소개가 아닌 확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이름을 전하기 위한 소개가 몇 년 만에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일단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그들은 모두 기절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도, 황홀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이는 오히려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뮤아……알브레히트? 설마 내가 아는 알브레히트? 그 유명하고 또 유명한 공작 가(家) 알브레히트? 사람들이 마구 찬양해대는? 미친. 그 빌어먹을 돼지새끼는 대체 무슨 능력으로 저런 거물을 잡은 거야?"
하.
자신을 앞에 두고 막말을 뱉어내는 간이 붓다 못해 터진 행위에 뮤는 어이가 없었다. 그 누구도 그 앞에서 저렇게 굴지 못한다. 하지만,
'재밌는데.'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뮤는 지금 이 상황이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몇 살이지?"
뮤의 질문에 아이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성인식 치렀어요."
"딱 16살?"
"정말 웃기지도 않아. 성인식을 치러준다 했을 때부터 나를 팔아먹으려 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치르자마자 바로 팔아먹어 버릴 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새끼를 너무 얕잡아 봤나 봐요."
"흐음. 양녀인가?"
뮤의 질문에 아이, 아니 막 성인식을 치렀다는 소녀는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다.
"네. 빌어먹을 새끼가 팔아먹기 위해 배롤린 가(家)로 들인 양녀죠."
그는 소녀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빌어먹을 새끼가 바로 배롤린 남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대놓고 성인식 치렀어요. 그러니까 절 안아도 법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실 생각이시면 하시고, 생각이 없으시다면 빨리 내쫓아 주세요. 아, 창문으로 나가도 되죠? 2층이긴 하지만 나무가 있어서 괜찮을 것 같거든요."
"하."
당돌한 소녀의 말에 뮤의 입에서 어이없단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결코 여자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억지로 이곳에 왔을 것이 분명한 사람을 안을 만큼 여자에 굶주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설령 미성년자를 안았다 할지라도 타격 받을 공작 가(家)가 아니다. 권력 앞에 법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더럽지만 그게 현실이지.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뮤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사실 조금 놀라기는 했다. 자기에게 옷 벗고 달려드는 여자는 많았어도 저렇게 대놓고 안을지 말지 결정하라는 여자는 처음이었으니까. 사실은 재미보다 아직은 짜증이 좀 더 우위였지만 이 정도의 재미도 오랜만이었던지라 뮤는 가만히 건방진 소녀를 쳐다보았다.
"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