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7화 (7/206)

< -- 7 회: #1 -- >

하아.

공작성으로 오기 전 내 뺨을 때리려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촌스럽고 크기만 무지 큰 반지 따윌 낄 리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양손이다. 양손에 알이 굵은 무식한 반지를 끼고 왔다. 저 반지로 뺨을 맞았다간 보나마나 볼 살이 너덜너덜해 질 것 이다. 점점 때리는 기술도 늘어가는 건지 마구잡이로 때렸던 처음에 비해 요즘은 꽤 날카롭게 때려 가끔은 입 속살까지 찢어지기도 한다.

"당장 꺼져! 내가 말 안 들려?"

나도 정말 꺼지고 싶다. 나도 정말로 공작성에 오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건 공작이고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약혼녀도 아닌 일개 약혼녀 후보일 뿐인 후작영애다. 지나가는 어린애한테 물어봐라. 누구 명령이 더 높은지. 아, 다시 한 번 빌어먹을 신분제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를 이곳에 오라 명하신 분은 공작님이십니다."

"허!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너보다 명령이 훨씬 높다는 소리지. 제발 알아들어라. 아니면 알아듣고도 모른 척 하는 걸까?

"제겐 공작님 명령이 우선-."

짝!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에서 불이 났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볼의 따가움. 정말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나보다. 나는 일부로 몸을 소파 위로 쓰러트렸다. 자주 맞다보니 생긴 요령 중 하나로 이렇게 쓰러지면 연속 뺨치기는 일단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쓰러진 채로 있다 보면 운 좋게 한 대 맞는 걸로 끝낼 수도 있다. 물론 아를랜디 영애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을 시엔 저 무시무시한 발로 걷어차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걷어차인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다. 무거운 치마의 프릴 때문에 포즈가 우스꽝스러워지자 그 뒤로는 걷어차는 등의 포즈를 많이 손상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분명 말했지? 다음에 또 여기서 만난다면 그 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쩐지 의기양양한 목소리.

아, 피 맛 난다.

속살이 또 찢어졌나보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어떻게 볼을 때렸는데 입 속살까지 이리 찢어질 수 있담.

"한낱 노리개 주제에 어디서 기고만장이야? 다시 한 번 더 이 성에서 네 년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 땐 진짜 가만두지 않겠어!"

마지막까지 앙칼진 악다구니를 질러대며 아를랜디 영애가 방에서 뛰쳐나갔다.

"……."

그녀가 나가자 갑자기 썰렁해져 버린 이곳에서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오늘은 한 대 밖에 맞질 않았으니까. 그렇게 소파에 기대 가만히 따끔따끔한 볼을 만지고 있는 내 앞에 흰색 고운 손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들어보니 귀여운 얼굴의 엔디 영애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라? 언제 왔대? 아를랜디 영애랑 같이 왔었던가?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엔디 영애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 인사에 엔디 영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게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별로 받고 싶지는 않지만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없어 나는 고맙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받아 뜨거워진 볼에 가져대 댔다.

"괜찮아요?"

조심스런 그 음색에 나는 억지로 양 입술을 치켜 올렸다.

"괜찮습니다."

나는 고맙다는 빛을 눈에 과장되게 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속내야 어쨌든 상대방의 겉치레엔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방금 전 태풍을 몰아치듯 몰고 온 철없는 아를랜디 영애보다 마냥 착해 보이고 악의 없어 보이는 눈앞의 엔디 겐두라 백작 영애가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보이는 것만큼 결코 여리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성정을 가지고 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녀는 그저 철저히 귀족적인 성향을 지녔을 뿐이고 또 그 성향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머리를 가졌을 뿐이니까. 즉, 맘에 없는 소리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상냥하게 웃으며 할 수 있는 사람이 엔디 영애다.

간단한 거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처세술을 아를랜디 영애는 가지지 못했지. 좋게 말하면 아를랜디 영애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속내를 고스란히 들키는 바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이 아픈가요?"

보고도 모르겠니?

아직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내 뺨이 어떻게 됐을지는 훤하다. 손수건을 가져다 댄 부분이 미치도록 따끔거린다. 차라리 손수건을 대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슬그머니 떼보니 피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아마 반지에 찢긴 볼에서 난 피겠지. 넌 이걸 보고도 얼마나 아픈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니?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아프다는 말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뻔히 아파보이는 것을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저 가만히 웃어 보였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를랜디 영애의 행동이 너무 과했네요."

"아닙니다. 영애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사과를 하세요."

"그래도-."

"역시 영애는 맘이 참 고우시네요."

네가 듣길 원하는 말 해줄 테니 제발 얼른 가줘라. 응? 난 정말 쉬고 싶다.

역시나 내 말에 엔디 영애의 얼굴에 귀여운 미소가 번진다. 눈앞의 이 숙녀는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머리를 가진 것까진 좋은데 안타깝게도 그 외의 것엔 젬병이다. 이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먹고 있긴 하나 그것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눈에 훤히 보이는지는 조금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가식적이고 나 또한 그렇다. 나도 내 속마음을 고스란히 이야기 하는 법이 없으니까.

"영애께선 어쩜 이리도 상냥하세요?"

이런 거짓말도 잘하고.

"이런 상냥함을 공작님께서도 아셔야 할 텐데요."

이런 아부도 잘 떤다.

"공……작님께서도요?"

놀란 척 하긴. 당신이 원했던 말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 뜨는 그녀의 얼굴은 퍽이나 귀여운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살포시 웃어보였다. 그래, 그마나 네 행동은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나는 이왕이면 아를랜디 보단 너를 응원해주마. 네 속내가 어쨌든 적어도 넌 날 때리진 않지 않니.

"저녁에 영애의 상냥함을 공작님께 전해드려요 될까요?"

저녁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그 남자에게 전해준다는 말 때문인지 모르겠다. 엔디 영애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내 거짓부렁만으로도 그녀는 내 앞에서 애써 연기한 보람이 있을 터였다.

"제가 한 것이 뭐 있다고요."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치시고 아랫사람인 저에게 이리도 다정하게 대해주시니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해줘야 네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온화한 연기를 내 앞에서 보일 것 아니니. 안 그러니? 네가 아를랜디 영애와 같은 행동 노선으로 나간다면 나는 참으로 괴로울 것 같아 그런단다.

내 말에 발갛게 달아오른 엔디 영애의 두 눈이 부담스러울 만치 반짝거린다. 뭐, 그녀의 행동에서 이미 알겠지만 그녀는 이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 공작의 약혼녀 후보 중 한명이다.

"전 정말 당신이 걱정되었을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었답니다."

"어찌되었든 정말 감사해요. 영애의 따뜻한 행동에 늘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위안은 무슨. 맘에도 없는 소리지만 잘도 입 밖으로 튀어나간다. 이보세요, 영애. 영애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모두 다 했답니다. 이제 그만 좀 나가주시면 안될까요?

"아를랜디 영애는 이미 응접실에 가 계십니다."

그 때였다. 새론이 잽싸게 끼어든 것은.

"아, 그래?"

새론의 말에 엔디 영애가 다음에 또 보자는 식의 인사를 남기로 재빨리 방을 나선다. 아무래도 아를랜디 영애 혼자 그 남자를 독차지 하고 있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그녀까지 나가고 나자 그제야 나는 살 것 같았다. 정신없고 어지러워. 볼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내가 왜 저런 철딱서니 없는 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나보다 어리냐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나이가 많으면 많지. 그저 부족함 없이 오냐오냐 자라다보니 저린 된 것이겠지.

나는 손에 쥐었던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부드럽기만 한 손수건 따위가 아니다. 차가운 물수건과 연고가 필요하다고!

"그냥 쫓아내시지 그러셨어요?"

곁에 앉은 새론이 내 볼에 포션을 발라주며 입을 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청량함이 뜨거운 볼을 감싸며 가라앉는다. 매번 맞고 난 뒤에 바르는 거지만 포션은 정말 엄청난 물건이다.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 있지?

물론 처음 새론이 포션을 가져와 내 뺨에 발라주려 했을 땐 기겁했다. 생명이 위급할 때 쓴다는 포션을 고작 이런 상처에 써도 되는지 황송해서. 하지만 그 덕분에 내 볼은 언제 맞았냐는 듯 매번 뽀송뽀송해 지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귀족영애를 쫓아내요? 그것도 후작영애를요."

"거짓말 마세요. 얼마든지 쫓아내실 수도 있었어요."

새론의 단호한 말에도 그저 난 미묘하게 웃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엔디 영애가 상냥하다고 생각하세요?"

설마 그럴 리 없다는 뉘앙스다. 힐끔 새론을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장난기가 다분히 담긴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다.

"왜 그래요, 새론? 다 알면서. 진짜 상냥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에요. 듣고 싶은 말을 빨리 해줘야 빨리 나가주니까 해주는 거지요."

"그럼 정말로 전해주실 거예요? 공작님께 엔디 영애의 상냥함을 말이에요."

"제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요? 그저 간청할 생각이에요. 다음부턴 사람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고. 또 이런 상황에 겪지 않게 해달라고요. 하고 싶으면 날 여기로 부르지 말고 별장으로 직접 오시라 그렇게 사정했는데 왜 또 저를 이곳으로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내가 이런 꼴을 몇 번이나 더 당해야 나를 좀 배려해 주시려는지 정말."

"호호. 하지만 아가씨께서 공작성에 오셔야 저는 아가씨를 뵐 수 있는 걸요."

"새론, 나도 새론을 좋아하고 자주 보고는 싶지만 그래도 내가 공작성에 오고 싶지는 않네요."

"그런 가요?"

포션 덕분에 통증은 말끔하게 가셨다. 손을 들어 볼을 만져보자 언제 상처가 났었냐는 듯 말랑말랑하다. 테이블 위로 널브러진 손수건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 사실이 신기해 한 참을 볼을 주물럭거리고 있자 그런 내 행동이 웃겼는지 새론이 피식 웃는다.

"그래도 다음엔 그냥 쫓아내세요. 아니면 제게 한 마디만 명하시던지요. 그럼 제가 머리채를 잡든 기절시켜서 끌고 가든 눈앞에서 치워드릴게요."

"킥킥킥. 생각만 해도 재미있네요."

"전 진심이랍니다."

"네네. 고려해 볼게요."

"매번 고려만 하신다 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실행 좀 해보시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새론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좀 쉬세요, 아가씨. 전 할 일이 많아서 이만 나가볼게요."

"매번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나는 새론의 뒷모습 끝에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게 세워진 새론의 등. 든든하게 느껴지는 뒷모습. 그래서일까? 새론은 다른 사람에겐 없는 뭔가가 느껴진다. 그건 바로 자신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하긴, 새론의 나이에 시녀장이 될 정도라면, 그것도 다른 귀족 가(家)도 아닌 이곳 공작성의 시녀장이 될 정도라면 어지간한 실력이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부럽다.

서글픈 웃음이 흘러나온다.

"새론, 새론은 내게 명령하라 했지만 난 절대로 그 남자의 힘으로 큰소리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그에게 몸을 주고 말았지만 마음은 단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는 걸. 그 어떤 평민이 귀족을 내쫓던가요? 목숨을 버리려는 것이 아닌 한 어림도 없지요."

물론 그 남자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그녀들을 내쫓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 따위 나는 알지 못했고, 또 생각해 내지조차 못했기에 그저 순응할 뿐이다.

한심한 유니시이나. 엄마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지 못했다면 아빠의 현명함이라도 물려받았어야지. 어쩜 넌 아무것도 특별한 점이 없는 거니?

정말 불행이도 나는 엄마의 아름다움도 아빠의 현명함도 이어받지 못했다. 그럭저럭 평범하고 평범한 나는, 쉬이 이용되기 딱 좋은 보잘 것 없는 여자아이일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