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회: #1 -- >
"식사를 내올까요?"
"아니, 괜찮아요."
공작 성의 시녀들은 부담스러울 만치 공손하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점심을 걸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다.
내가 머무는 별장과 공작 가(家)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마차로 대략 1시간 정도. 그게 뭐가 가까운 거리냐 누가 반문한다면 이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를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2시간이라고 일러주겠다. 그것도 마차로 둘러보았을 경우에. 크기도 크기지만 화려함에서도 그 어느 왕국의 성과 비교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 이 공작 성은, 루벤스 제국 초창기 정복 사업 때 정복했던 한 왕궁의 실제 궁이었다고 한다. 정복 사업 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알브레히트에게 루벤스 제국 초대 황제가 공작 위(位)를 내리며 이 공작성도 함께 하사하였다고.
그 역사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 이 공작 성에 왔을 때 눈이 휘둥그레져 마냥 놀라고만 있었던 내게 새론이 해준 이야기다.
새론은 이 공작성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새론은 내게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성의 윤곽이 사실은 성의 전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그녀가 해준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내가 한층 더 놀라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내심 내가 긴장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리고 그 긴장을 풀어주려 했던 것이 도리어 더 긴장하게 만들어 버린 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나는 새론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더랬다.
공작 성은 뒤에 산을 끼고 산의 이점을 최대로 이용해서 지어진 일종의 요새와도 같았다.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별궁들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과 함께 직접 와서 세세히 하나하나 보지 않은 한 공작성의 구조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며 의기양양해하던 새론의 얼굴은 꽤 귀여운 것이었다.
지금도 이 웅장한 성의 규모에 익숙해졌노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익숙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익숙해질 거라는 기대도 없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굳이 익숙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에 있다는 거지만.
"그럼 편히 쉬세요, 아가씨."
문이 닫히고 방에 혼자 남겨지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진다. 시녀들이 내게 예의를 갖춰주는 건 참 감사한 일이지만 왠지 받아선 안 될 것을 받는 기분에 늘 좌불안석이라고나 할까. 일부 몇몇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작위를 가진 남작 가(家)의 여식들이라는데 나는 평민이지 않은가. 어쨌든 공작 성의 시녀들은 내게 불편한 존재들이 틀림없다. 그 중 새론만이 내가 편히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새론에게 내 시중 따위를 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시녀장의 자리를 차지한 아주 유능한 공작 성의 인재이니 말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 오늘 내에 다시 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따져보았다. 웃긴 일이지만 이 공작 성엔 내 방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방이 아니라 내가 공작 성에 올 때마다 머무는 방이라 해야 옳겠다. 아니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방이라 해야 하나?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내가 머무는 장소란 건 틀리지 않으니까. 중요한 건 이 방이 내 방으로 거의 확정되다시피 한 순간부터 내가 공작 성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당일치기에서 1박 2일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풀었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인데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다고 레니가 말해서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그 남자는 지금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겠지? 그럴 테지. 아마 밤이 되어서야 찾아올 거다. 늘 그랬듯이. 나를 공작성으로 데려온 젠 경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그게 서운하다거나 하진 않다. 사실 젠 경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심부름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실은 날 데리러 오는 사람이 젠 경이라는 것이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이게 뭐람. 차라리 밤에 오라 했으면 좋았을걸.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러 마냥 시간을 죽이게 하는지 모르겠다. 불만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이렇게 날씨도 좋은 날, 이 좋은 시간에 날 데리고 와서 왜 방구석에 처박혀 있게 만드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다른 할 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를 이곳에 데려오라 명한 남자의 이기심에 절로 입술이 삐죽거려댄다.
"하아."
하긴, 생각해 보면 이 시간이 내게 황금 시간이건 뭐건 그 남자가 신경 써야 할 필요는 전혀 없겠지 싶다. 자기 정부를 자기 맘대로 부르는데 고려할 것이 뭐란 말인가? 심지어 그는 다른 나라에 외교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갔을 당시에도 나를 그곳으로 불러오게 했던 사람이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단하신지!
허! 내 첫 해외여행에서 기억하는 것이라곤 화려했던 방 안에서 그 남자와의 정사가 전부다. 천장이 참 화려하고 예뻤지, 라는 감상과 함께. 애초에 함께 갔던 것도 아니다. 뒤늦게 젠 경에 의해 거의 끌러갔다시피 한 사건이기에 내 존재는 꼭꼭 숨겨져야 했다. 덕분에 내게는 바깥출입이 허락되지 않았고, 바깥출입은커녕 나는 창문 테라스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 남자의 신분이 신분이었던 지라 방 크기가 제법 상당해 많이 답답하진 않았다는 것 정도?
다시 생각해도 참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싶다. 그런 곳까지 왜 나를 데려오라 했담. 그냥 그곳 여자 중 괜찮은 여자 한 명을 골라 안을 것이지. 그렇다고 내게 특별한 밤 기술이 있느냐 묻는다면 특별히 그런 것도 없다. 정말로 없다. 겸손 따위가 아니다. 그와의 관계 때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정자세로 누워 그저 받아내는 것뿐, 나는 대부분의 것은 죄다 그 남자에게 맡겨버리는 편이다. 사실 다르게 어떻게 해야 하는 줄도 모르겠고. 나긋나긋하기보다는 오히려 뻣뻣함에 가까운 내 몸 어디가 맘에 들어 자꾸 날 찾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잠자리에서 뻣뻣하게 구는 여자를 더 선호하는 건가?
"……."
정말 그런 건가? 세상의 모든 남자가 다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하리란 법은 없잖아, 안 그래?
어차피 힘없고 빽없는 나는 그에게 반항할 수 없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
"하아."
내가 쉬어놓고 내 한숨 소리에 기운이 쫙 빠져버린다. 이래서 한숨은 쉬지 말라는 거야, 유니시이나. 기분이 자꾸 쳐지잖아. 안 그래? 즐거운 생각을 하자, 즐거운 생각을.
애써 기분을 가다듬고 있는데 문 밖에 소린이 일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란은 조금씩 그 음색이 짙어짐에 따라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날카로운 목소리, 남을 배려하는 조금의 따스함도 없는 그 신경질적인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애써 달래놓은 한숨이 다시금 기지개를 켠다. 그것도 연속으로.
이래서 내가 여기 오기 싫었다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아직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와 그런 소녀를 만류하듯 막아서는 차분하지만 냉랭한 목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아, 저건 새론의 목소리다. 저번에 왔을 땐 어디가고 없다더니 돌아온 건가? 그래도 내심 다행이다 싶다. 새론이 있다면 적어도 구타는 당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 저 소란의 주인공이 내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아직 닥쳐오지 않은 일이지만, 참 이상하지. 상상이 되어버리니.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하아. 다시 한 번 말해봐야지. 앞으로는 될 수 있으면 별장으로 직접 오라고. 아님 하루라도 빨리 나를 떼어버리던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 소란을 듣고 있자니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온다. 이번 한숨은 오늘 내쉬었던 것 중 가장 길고 또 서글프다.
쾅!
소리도 웅장하지. 아니, 저 정도면 무식한 건가? 나는 암만 힘껏 문을 열고 닫아도 저런 소리는 안 나던데. 멋지네. 그 위대한 힘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그러면 한 대 맞을 거 두 대로 늘어날까봐 그저 속으로 구시렁거려야했다. 힘세서 좋으시겠어요, 영애.
"너!"
다짜고짜 삿대질이다.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
아를랜디 눌리아.
눌리아 후작 가의 하나뿐인 이 여식은 나의 정부인 그 남자의 약혼녀 후보다. 분명히 강조하지만, 그녀는 약혼녀가 아닌 약혼녀 후보다. 후보라니! 이 얼마나 웃기는 단어란 말인가. 하지만 더 재밌는 건 그 남자 약혼녀 후보 명단에는 아를랜디 눌리아 말고 다른 영애들도 수두룩하다는 것. 그 후보 명단이 누구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그 남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 따윈 관심 없지만 자기 약혼녀 후보에 누구누구의 이름이 올라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 남자의 행동을 보았을 때, 그 명단 작성 시에 그의 의사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아를랜디 눌리아는 그 남자의 약혼녀 후보이고, 게다가 그냥 후보도 아닌 후보 1순위다. 때문인지 약혼녀 후보 1순위인 이 영애는 나를 매우, 아니 많이, 그냥 많이도 아니고 굉장히 많이 싫어한다. 그 남자 곁에 나란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는 거겠지.
하지만 나라고 아를랜디 눌리아가 좋은 건 아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보다 몇 백 배 더 그녀를 싫어한다. 그녀가 그 남자의 약혼녀 후보기 때문에? 천만에. 누가 그 남자 약혼녀 후보건, 그냥 약혼녀건, 그게 아니고 심지어 아내라 할지라도 그런 건 나와 상관없다. 애초에 나는 정부일 뿐이니까. 난 단 한 번도 내 위치를 망각해 본 적 없노라 확언할 수 있다. 게다가 정부도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약혼자 후보님들께선 제발 날 좀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미워하는 건 상관없는데 괴롭히지 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 제겐 아무 힘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폭력은 그만둬 주세요.
아를랜디 눌리아가 오는 날은 내 뺨이 붉어지는 날이다. 재수 없으면 볼이 터지는 날이 되기도 한다. 저 저 반지 봐라. 아주 작정하고 알 큰 거 끼고 왔구먼.
반짝반짝 빛나는 저 보석 이름이 뭐였더라. 강도가 제법 높은 스피넬이렷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올 법한 그녀의 반지에 나는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애써 가다듬었다.
처음 맞았을 땐 그녀의 손톱에 긁혀 볼에 상처가 났었다. 하지만 손톱으론 성이 차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부턴 손톱이 아닌 반지로 볼을 공격해대는데 정말 죽도록 아프다. 손톱도 무지 아픈데 무려 반지라니! 말이 보석이지 돌멩이 아니냔 말이다. 손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와 세기에 상처도 나날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손찌검 따윈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굴욕적인 언사와 폭력은 싫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런 모욕은 그 누구에게도 받고 싶지 않다.
"영애를 뵙습니다."
이 빌어먹을 신분제.
아를랜디 눌리아의 등장에 놀란 듯 연기를 펼치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파에서 화들짝 일어섰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흥! 여전히 그 천하디 천한 몸뚱이로 또 그분을 홀리려 왔구나. 감히 너 따위가 이 공작성에 발을 들여?"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싸구려 마차 바퀴 긁히는 것과 같은 소릴 내며 내 귓가를 때려댄다. 그 듣기 거북한 소리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리 했다간 한 대로 끝날 것 같아 않아 나는 애써 꾹 참았다.
"공작님께서 조금 예뻐하신다고 기세등등한 꼴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발걸음을 해대는 것이냐? 함부로 들락날락 거리지 말라 일렀던 내 말을 벌써 잊은 게냐? 정말 못 배운 티는 내는구나. 내 분명 네게 그리 일렀는데. 감히 이 공작성이 어디라고 너 따위의 더러운 창녀가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아, 놓기를! 이 고귀한 곳에!"
"……."
아, 머리 아파. 지끈지끈.
새론이 그랬다. 아를랜디 눌리아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대꾸하지 말라고. 그러면 혼자 제풀에 지쳐 떨어질 거라고. 눌리아 후작은 성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딸인 이 여자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게다가 머리도 안 좋은 것 같아.
못 배운 티는 내가 아니라 아를랜디 영애가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사실 따지자면 내게도 할 말은 있다. 아를랜디 영애가 말하는 이 더러운 몸뚱이를 찾고 안으시는 분이 바로 이 공작성의 주인이요, 천한 나를 이곳에 오라 명한 것도 이 고귀한 성의 주인인 공작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그렇지만 혀끝까지 솟은 그 말을 애써 내리 누른다. 암만 옳은 말을 한다 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눈앞의 아를랜디 영애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그 어떤 변명보다 그저 침묵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새론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경험으로 깨우쳐야 했다. 알이 굵은 반지를 낀 무식한 손으로 이 여자에게 뺨을 6대 연속으로 맞았던 바로 그 날에.
"당장 나가거라. 그리고 다신 이곳에 오지 마!"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약혼녀가 아니다. 약혼녀 후보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그 약혼녀 후보라는 것은 상당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명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동은 벌써부터 공작부인처럼 굴고 있는 아를랜디 영애의 작태에 기가 막힌 건 비단 나 하나만이 아니었는지 열린 문 뒤로 안절부절 못한 채 서 있던 시녀들의 표정들이 하나 둘씩 굳어갔다. 그 시녀들 사이로 여유롭게 서 있는 새론만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뚝뚝한 얼굴로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마치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즉각 달려올 것 같은 모양새에 그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새론에게까지 불통이 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가 끼어드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새론이 유능한 시녀장이라 해도 그녀는 고용인이고 아를랜디 영애는 귀족 영애다.
그리고 지금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녀의 폭력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꼬투리가 잡힐 수밖에 없을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해야 가장 좋은가 하는 것.
하아.
머리 굴리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이글거리는 아를랜디 영애의 눈빛은 분명 나를 때릴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맞지 않고 지나가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힘들 모양이다. 오늘도 역시 한 대는 맞아야 하는 건가?
짜증나. 암만 봐도 저 반지는 폭력용 반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