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나의 남자(2)
질식할 것 같은 아득한 순백. 고독한 설산이었다. 동굴이 산 중턱에 뚫려 있었기에 앞은 곧장 깎아지른 비탈이었다. 얼마나 높이 와 있는 건지 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춥다 못해 피부가 아팠다. 몇 분만 더 있어도 사지 일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손발이 마비되는 고통보다 이 깨끗한 지옥에 그 없이 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해일 같았다.
“블라드!”
광활한 산등성이에 공허한 메아리가 울렸다. 눈이 깊어 몇 걸음조차 한참이었다. 어미를 찾는 병아리처럼 쉬지도 않고 외치다가 불현듯, 오싹한 기운이 일었다.
비탈 아래 먼 곳에 무언가 있었다.
분명 생명이었으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형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신경이 먼저 반응했다. 공포에 위가 저렸다. 포식자를 맞닥트린 먹잇감의 본능이었다. 아타카에서 솟구치는 수천 마리를 보았을 때보다 압도적인 절망이 뇌간을 물어뜯었다.
눈을 밟고 우뚝 선 그것은 언뜻 전신에 흰 털이 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키는 나를 세로로 이어붙인 것보다 컸다. 검정 손이 튀어나온 팔은 눈바닥에 질질 끌렸다. 검은 원숭이 얼굴에 박힌 시뻘건 눈이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읍… 흑….”
턱이 달달 떨렸다. 틀어막은 숨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작은 소리라도 내는 순간 분명 끝이라는 걸, 그냥 알 수 있었다.
불행히도 저것은 수컷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살 기둥이 어느새 다리 사이에서 흉물스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저 짐승이, 나를 보고 그것을 세운 것이었다. 끔찍한 무언가가 목을 콱 졸랐다.
도망쳐야 해. 그런데, 어디로…?
그것이 산사태만큼 거대한 으르릉 소리를 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것이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내 머리 위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무생물처럼 정지했다.
그 상태로 몇 초가 흘렀는지, 아니면 몇 시간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내 뒤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것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저것을 마주한 나처럼, 저것 또한 자신보다 먹이사슬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반응이었다.
이내 저것이 몸을 돌리더니 줄행랑치듯 눈 비탈을 네 발로 뛰어 내려갔다. 뛸 때마다 바위가 추락하는 듯 쿵 쿵 소리를 내며 산이 진동했고, 앞발로 헤치는 눈발이 사방으로 튀었다.
메아리가 가시고 지독한 고요가 찾아오고 나서야 다리에 긴장이 풀렸다. 휘청이며 주저앉을 뻔했으나 허벅지를 붙잡아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하아! 아….”
몸이 벌벌 떨렸다. 여운처럼 남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나 다름없는 격양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보고 도망쳤는지, 그냥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나를 지켰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신경에 불티가 이는 듯 시야가 팍 트였다.
“블라드!”
그의 이름이 목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동굴 밖으로 한순간에 달려 나가 경사진 눈을 향해 발을 성큼 뻗었다. 눈이 깊어 발목이 푹 빠졌다.
곧장 뒤를 돌았다. 동굴 입구 위쪽, 분명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흔적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언가 그곳에 앉아 있기라도 했던 듯 눈이 파여 있었다.
“블라드! 어, 어디 있어요!”
머리가 저리며 눈앞이 핑 돌았다. 도대체, 왜? 분명 여기 있으면서 그새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그가 없는 벌판이 눈물 나게 미웠다.
지금 놓치면 그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서슬 퍼런 상상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가 있던 곳으로 올라서기 위해 눈 비탈을 올랐다.
맨손이 눈에 파묻히자 손이 시리다 못해 떨어질 것처럼 꽝꽝 아팠다. 어쩌면 이대로 손발이 다 괴사하는 게 나을지도. 그런 끔찍한 일이 닥치면 그가 나타나 줄지도 모르니까.
나약한 몸뚱이로 눈 비탈을 오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다시 원점으로 내려가기를 수차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 범벅에 손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한심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보여 줘요! 나, 당신을 보고 싶어요. 제발, 제발 당신을 보게 해 줘요…!”
호소인지 울부짖음인지. 광활한 설산 사이로 메아리쳐 돌아오는 나의 목소리는 온통 그랬다.
눈에 처박히는 중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이렇게 굴러 내리고, 다시 기어오르고. 전부 아픈데. 아직까지 흔적 하나 없다니.
설마 정말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이게 그와 함께한 마지막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나 때문에 죽음을 맞아서, 이제 내가 미워진 것은 아닐까. 비관이 산사태처럼 우르르 쏟아져 내장을 짓뭉갰다.
아니.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까 제발 한 번만,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여줘요, 제발….”
나를 미워하는 그를 상상하기만 해도 속이 문드러졌다. 나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오열하며 눈 비탈을 기었다. 어떻게 해야, 도대체 뭘 해야 그가 내게 돌아올까.
“시, 싫어! 혼자 있기 싫어요. 가지 말아요!”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양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같은 말을 외치고, 또 외치며 눈밭을 기었다.
“나 지금 너무, 무서워요. 아파, 블라드… 아!”
결국 한심한 육신이 한계를 맞았다. 기우뚱 기울어진 몸이 이전보다 거세게 눈밭에 처박혔고, 비탈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아흑, 윽…!”
눈앞에 흰색이 온통 이지러졌다. 그렇게 비탈 아래로 추락하려는 순간, 몸이 들렸다.
밧줄에 허리를 감은 듯 몸이 덜렁 공중에 떠올랐다. 내 몸에서 땅을 향해 눈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숙이자 멀어지는 눈밭과 몸을 감은 무언가가 보였다. 꼬리였다. 아니 몸통일까? 아무튼, 거대한 뱀이 내 몸을 칭칭 둘러 감은 꼴이었다.
나는 설원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뼈대가 비죽이는 날개의 형상이 흰 바닥에 먹물처럼 드리웠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바람이 불어 눈을 날렸다.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마저 거대했다.
허공에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동굴 입구에 내려졌다. 자연히 바닥에 주저앉자마자 허리에 감긴 것을 와락 끌어안았다. 추위에 턱이 딱딱 부딪히는 중에도 악착같이 팔에 힘을 주었다.
이게 그라면 절대 나를 뿌리치지 못할 것이므로. 혹시 아니라면, 이대로 그가 없는 이곳에서 영영 떠나면 그만이므로.
역시 그는, 나를 놓지 못했다.
더 세게 조이지도, 그렇다고 나를 뿌리치며 풀어 버리지도 못하는 이 어색하고 다정한 움직임을 나는 알았다.
빡빡하게 쌓아 올렸던 두려움과 긴장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얼어붙은 뺨이 아프고, 혼란했던 모든 시간이 서러웠다.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건지. 꽤 우스운 말이 얼어붙은 차가운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추, 추워, 추워요….”
얼굴 근육이 전부 얼어 제대로 발음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 장기가 이미 다 굳은 것처럼 사지가 욱씬거렸다. 허리를 감은 것이 아주 조심스레 스르르 풀어지더니, 등 뒤에서 무언가 다가왔다.
그가 양팔로 나를 안아 올렸다.
비로소 그를 보았다. 내가 알던 그였다.
청록색 비늘이 피부를 뒤덮은 것, 등 뒤에 박쥐 같은 날개가 달린 것, 하반신이 뱀인 것 빼고는. 그런 사소한 것을 제외하면 그냥 그였다.
나의 남자였다.
* * *
바실리스크. 뱀의 왕. 누군가는 고르곤이라고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이름이 있었으나 아무튼. 확실한 건 하반신이 뱀인 괴물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선황제의 병적인 성욕을 충족고자 대단한 고위 사제들이 심혈을 기울여 잡아들인 마물이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드 윈터 공작의 생모이기도 했다.
어미와 제법 비슷한 외양을 한 그가 모닥불 사이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영롱한 청록색 비늘이 전신 피부를 덮었으며 눈동자는 붉었다. 다만 어미와 달리 양팔이 있었고, 등에는 거대한 피막 날개가 달려 있었다. 가죽 날개는 선명한 보라색 핏줄이 비쳤고, 날개를 지탱하는 뼈대는 사람 팔뚝만큼 두꺼웠다.
릴리에는 미동 하나 없는 그의 상반신에 매달려 있었다. 목에는 팔을, 허리에는 다리를 감은 채,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블라드.”
그녀가 퉁퉁 부어 엉망이 된 얼굴을 스르르 들어 올렸다. 눈물을 대충 닦아 낸 뒤, 그를 마주 보았다. 얼었다가 녹은 탓에 뺨은 온통 따갑고 손은 저릿했다.
아무리 봐도 별다를 게 없었다. 빛을 잡아먹는 새카만 머리카락, 진한 눈썹. 남자다우면서도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이목구비 모두 그대로였다. 다만, 눈동자는 붉었다.
분명 동굴 입구에서는 그의 몸 또한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지금은 불에 데운 돌처럼 따듯했다. 모닥불의 열을 몸에 담아 두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몸의 온도를 높일 수 있는 걸까. 어쨌든. 따듯하다는 건 즉, 그가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어서, 고마워요.
그녀는 그 문장을 고장 난 오르골처럼 무한히 되뇌었다. 그의 청록빛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마치 사람의 얼굴을 억지로 씌워놓은 듯, 표정을 바꾸지 못하는 생물 같았다. 목소리를 들은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무섭다고 해서 와준 거예요? 아니면, 혼자 있기 싫다고 해서?”
눈꺼풀을 건드리며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지조차 않았다. 그는 석상 같았다. 육신은 살아 있되 혼이 죽어 버린 가사 상태의 환자 같기도 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아타카에서 왜 나를 막았어요? 내가 총을 쏘면 뭐가 더 나빠지거나,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나는 당신을 지… 키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이내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마 동안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만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분명 살아 있는데, 작은 호흡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용, 혹은 뱀의 비늘 같은 이것이 숨 쉴 때마다 달그락거리기라도 하면 불안하지나 않을 텐데. 민들레 씨앗처럼 훅 날아가 사라졌던 두려움이 슬금슬금 밑바닥에서 다시 기어올랐다.
혹시 완전히 살아나지 않은 게 아닐까? 지금 그의 모습을 보건대, 무의식 속에서 육신만 간신히 깨어난 상태가 분명했다.
만약 영원히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다면….
식물인간이 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걸어 주면 언젠가 의식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반응할 만한 말을 계속 꺼내면 더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기울여 그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