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파종된 것(1)
“보름을 앓았습니다.”
“…네?”
그가 침대맡 의자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댄 채 손을 모아 턱을 받혔다. 기도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열증은 열흘. 그 후로도 닷새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마치….”
말을 뱉으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라도 할 듯. 참담함에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감싸 쥔 강인한 손이 맥없이 떨렸다. 회색 눈은 동공이 확장된 채 초점이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보름이 그의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그녀만 모르는, 지독한 보름이었다.
오래전, 겨울. 아이반이 주절댔던 내용이 작살처럼 심장에 박혀 떨어지지를 않았다.
[열병으로 사람이 죽는 일은 흔하지만, 어디의 대머리들과는 다르게 저는 유능한 사제니까요.]
그녀가 신음하고, 더운 숨을 토하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의 영혼이 부서졌다. 그를 둘러싼 우주가 조각나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 그의 삶에 실재하는 유일한 공포였다.
생명을 뭉텅 떼어 그녀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멸의 육신을 타고났다 한들, 그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남자였다.
“……드, 블라드.”
시커먼 늪에 꾸역꾸역 가라앉던 그를, 그녀의 목소리가 잡아 올렸다.
몸을 떨던 그가 멈칫하며 초점을 되찾았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보였다.
깨어 있고, 살아 있는 그녀였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결 좋은 은발이 가녀린 어깨 위로 사르르 흘러내렸다.
앓기 전보다 몇 배는 야윈 실루엣에 속이 아렸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이는 그를 향해, 그녀가 손을 뻗었다.
“가까이 와요.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그가 홀린 듯 몸을 일으켜 침대로 올라갔다.
안아달라는 듯 뻗어 온 여린 팔이 아플세라 속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품 안에 욱여넣자 체향에 섞인 약초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알을 방금 부수고 나온 작은 새를 껴안기라도 하는 듯.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릴 무언가를 다루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한참 참았다가 내뱉는 숨이 진했다. 으스러질 듯 껴안고 싶은 욕구와 치열히 싸우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릴리에는 그의 너른 등을 껴안으며 가슴팍에 뺨을 기대었다. 그의 심장이 머릿속이 둥 둥 울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두터운 흉부가 그의 심장으로 꽉 찬 것 같았다.
“저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안도와 격정, 긴장과 불안이 한데 엉켜 엉망인 그런 심박이었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터운 흉곽이 부풀었다가 내쉬는 날숨에 서서히 본래 부피감을 되찾았다.
그에게 기대어 있던 릴리에의 머리가 가슴팍을 따라 뒤로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블라드.”
한참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들 보기에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그가 곧 눈물이라도 흘릴 듯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버석한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렸다.
결국, 실없는 소리가 핏기없는 입술 사이를 헤집고 나왔다.
“배고파요.”
“…당장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앉지 말고 누워 있으십시오.”
그가 그녀를 침대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릴리에는 침대를 벗어나는 그를 보며 모로 돌아누웠다.
“치료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일단 몸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오래 앓아 기력이 쇠할 테니 한동안 푹 쉬는 일에만 집중하십시오.”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침대 시트가 뺨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릴리에는 치료사들이 그녀가 완전히 나았음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버터컵이 은쟁반에 수프를 가지고 온 후에야 다시 앉을 수 있었다.
릴리에가 채 몇 번 먹지 못하고 스푼을 달칵 내려놓았다. 그녀가 블라드를 향해 힐끗 눈동자를 굴렸다.
“다 먹었어요.”
그가 찰랑거리는 수프를 보며 심란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반 정도까지만 비워 보십시오.”
“하지만 배가 부른걸요.”
“세 스푼만.”
“…….”
릴리에가 마지못해 다시 스푼을 들었다. 정확히 세 번. 그리고 은쟁반에 다시 내려놓았다.
블라드가 아쉬운 듯 초조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자 릴리에가 재빨리 말했다.
“이제 힘들어요. 오랜만에 먹었더니….”
“…알겠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고집을 부렸으면 모를까. 하필 힘들다고 하니 그도 더는 채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손수 은쟁반을 치웠다. 티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돌아와 침대 가에 앉자 릴리에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당신도 식사를 좀 하면 어때요? 눈도 붙이고요. 저는 이제 다 나았고, 당신도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그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늘상 단정하던 그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셔츠도 팔을 걷어붙이고 단추를 두어 칸 풀어제낀 채였다.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는 행색이었다.
그가 어디 바닥에서 잠드는 사람이던가. 아니, 남들에게 잠드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긴 하던가.
“나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식량이 거의 동난 채로 몇 달을 버티기도 합니다. 몇 주 동안 바닥에 머리 대지 않는 일도 흔하지요.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전쟁은 끝났잖아요.”
“…….”
“여기는 집이에요. 블라드.”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낮추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그녀를 제대로 마주 보았다.
지난 시간을 홀로 까맣게 잊은 그녀는, 전전긍긍하는 남편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저, 몸이 회복되면 운동 같은 거라도 할까요?”
그녀가 그의 서글픈 낯을 향해 제법 해사하게 웃었다.
“체력을 키워야겠어요. 그러면 당신도 제가 조금 더 믿음직스러울 텐데. 탈린 경만큼 힘이 강해지면, 당신을 따라 아타카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분명 농담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되레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었다. 그가 한층 버석해진 눈빛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믿음직스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부, 내 탓입니다.”
릴리에가 샤일록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비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그 순간,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침투했다.
“영주님! 누나 일어났다고 들었는데요, 누나 괜찮아요? 하녀들이 수프 가져다줬다고 하던데 잘 먹었어요?”
“…….”
“저 들어가면 안 돼요? 네?”
달가운 듯 달갑잖은 목소리에 블라드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소문이 바람이었다. 릴리에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성 전체에 퍼지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침실 앞 복도가 북새통이었다. 반은 영주를 찾아온 가신들, 나머지는 귀부인의 상태가 궁금해 기웃거리러 온 사용인들이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릴리에가 문가를 향해 목을 죽 내밀었다. 그녀가 굳게 닫힌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나 정말 보름이나 누워 있었니?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들어도 믿을 수가 없네.”
“응. 누나 엄청 아팠어. 몸이 막 끓고, 헛소리하고… 계속 하혈했어. 누나가… 죽는 줄 알았어.”
릴리에가 그제야 동생을 다시 바라보았다. 단델리온도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했는지 피부가 눈에 띄게 푸석했다.
릴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늘어졌다.
“하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무리 상대가 친동생이라고는 한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누이가 죽을 고비를 넘긴 줄 아는 동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나 그, 달거리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아니야. 치료사들이 그랬는걸. 달거리 때문에 더 약해져서 그렇댔어.”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고였다. 누이의 병증에 익숙한 그조차 겁이 날 정도였다.
“누나가 죽었으면 나 진짜, 무지 슬펐을 거야. 내가 누나한테 그렇게 잘못 했는데 나를 아, 아버지한테서 그렇게 감싸주기까지 하고… 그러고 죽으면….”
단델리온은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에게 불편한 단어였다. 한 차례 일단락되었다고는 해도, 평생 각인된 감각이 쉬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 살아 있잖니.”
단델리온이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묘한 침묵이 남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가 할 말을 정리하기 어려운지 입을 다물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 그를 향해 릴리에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가 무서워하는 거 다 끝났어. 이제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그래, 드디어. 아버지를 거역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그녀였는데.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내려다보는 내내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저는… 아버지의 염원과 다르게, 행복할 거예요. 반드시.]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철망을 부수고 뛰쳐나온 듯 온 세상이 맑았다.
발목을 묶었던 족쇄가 실은 낡아 빠진 노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그건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나 진짜… 고마워.”
단델리온이 기다란 속눈썹을 추어올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도 누나처럼 되고 싶어. 아니다. 누나 반만 되면 좋겠다!”
그의 표정은 밝았다. 어느 때보다 사람 같은 혈색이 돌았다. 릴리에가 피식 웃었다.
“너는 지금도 멋있어. 누나를 위해 탈린 경을 데리고 들어와 주었잖니.”
“아냐. 누나가 멋있어. 영주님도…. 영주님은 진짜 엄청나더라. 막, 혼자서 아버지를 다 휘어잡으시던데! 영주님이 누나 말대로 안톤도 여기로 불렀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릴리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델리온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누나 진짜 잘 됐다. 영주님은 잘생기고 멋있고 돈도 많고 강하고, 누나를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마음 안 변하고, 평생 누나한테 그렇게 잘해 주셨으면 좋겠다. 아니다. 이 정도면 뭘 더 바라겠어, 지금도 엄청 감사하기만 한데!”
“저기, 단델리온.”
잠시 머뭇거리던 릴리에가 단델리온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블라드가 보름 내내 여기 있었니?”
“응. 뭐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여기서 내리 누나만 보시던걸. 로웰 할아버지랑 카디스 성주님도 막 쳐들어왔다가 말도 못 걸고 그냥 갔어.”
릴리에가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면 욱씬거리는 통증이 가시기라도 할 것처럼.
“나 왔을 때는 기도 같은 것도 하고 계신 것 같았어. 신을 미워하시는 걸로 아는데, 그건 또 아닌가 봐, 누나.”
기도.
마물의 피가 섞인 남자가 기도를 올렸다. 그녀를 위해서.
가슴이 아린 듯, 지끈 아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