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안개(1)
“공개 처형하는 의미가 없겠네요. 안개가 이렇게 심해서야.”
직사각형 탁자 끄트머리에 앉은 한즈가 중회의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갈색 머리는 까치집이었고, 안색은 두개골에 썩은 가죽 한 장 씌운 양 탁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이 온통 성긴 회색이었다. 성 전체가 구름에 갇힌 듯 스산했다.
들이쉬는 공기가 습기에 묵직했지만, 회의장 분위기는 꽤 이완되어 있었다. 군주가 도착할 시간이 되지 않아 상석이 빈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한즈가 마주 앉은 발크스를 향해 물었다.
“이번 달은 유난히 처형할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카디스 치안대가 고생을 좀 하겠네요.”
늘어진 가신들 사이에서 저 홀로 꼿꼿한 발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땅한 명을 따르는데 고생이랄 것 없소이다.”
발크스 옆에서 의자에 늘어진 갤러헤드가 제복 상의에 손을 넣어 배를 벅벅 긁었다.
“이보시오, 수석 행정관. 대단한 걸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 좀 잘 되어 가시오? 안색을 보니 어마어마한 게 나올 것 같은데.”
수석 행정관이 지난 몇 주 동안 머리를 가로 뉜 적 없다는 소문이 들렸다. 철야에 익숙한 그가 걷다가도 깜빡 졸았을 강행군이라고 했다.
“부인께서 쓰실 걸 생각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기사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갤러헤드가 은근슬쩍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리고… 각하께서 부인 친정은 왜 때려 부수는 거요? 안팎으로 학살극이 난리이더구먼. 코딱지만 한 준남작 가문은 왜 산산조각 내셨으며…. 아무튼 보아하니 부인은 모르시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오?”
가신들의 눈이 동시에 한즈에게 모여들었다.
블라드와 가장 가까운 권속인 그들조차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충실히 명령을 수행 중이었다.
명령을 내리면 그저 수행할 뿐. 군주의 뜻을 되묻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 온 이들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의문과 호기심이 충성을 훌쩍 앞지르고 만 것이었다.
한즈는 대답 대신 퀭한 눈을 가린 동그란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그리고는 슬쩍 눈을 피해 버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들 알지 않소. 각하께서는 품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대신, 한 번들이면 끝까지 놓지 않으시지. 그런데 직접 들인 안사람이신 부인 친정을 야금야금 해체하고 계시지 않소. 그것만이오? 사형수 중에….”
“갤러헤드. 적당히 하게.”
발크스가 식은땀을 쩔쩔 흘리는 한즈에게 구명줄을 불쑥 내밀었다. 노기사의 두꺼운 회색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아타카에서 마물에게 고환이라도 물렸나. 정신이 나갔군, 자네. 따라야 할 명이 있다면 그저 따르게. 선 넘는 의문 가지지 말고.”
“거참. 막상 각하 앞에서는 제일 꼬장꼬장한 분이…. 아, 알겠소. 성주님. 눈에서 불 나오겄소.”
가볍게 툴툴대는 말을 끝으로 회의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동안 헛기침이나 옷깃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이어지던 중, 갤러헤드가 다시 엉덩이를 들썩였다.
간만에 복귀하니 영지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져 있는 터라. 그도 그 나름대로 궁금한 게 적잖았다.
“아, 그런데 사제님은 왜 또 가출하셨소? 듣자 하니 각하께서 사제님을 잡으면 꿀통에 한 번 넣었다가 뺀 다음 개미굴 앞에 묶으라고 하셨다던데. 대체 무슨 짓을….”
“영주님께서 드십니다!”
위병의 우렁찬 외침이 곤란한 질문을 끊었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시종장을 거느린 그들의 군주가 들어섰다.
그의 군화가 문지방을 넘는 순간, 늪처럼 무거운 공기가 그의 발치를 따라 서서히 밀려들어 왔다.
* * *
서재 창가에 선 릴리에가 책장에 어깨를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옆통수에 책장 선반이 툭 닿았다.
답답한 숨을 들이쉬니 묵직한 책 내음이 호흡에 섞여들었다.
“비가 그쳤으니 날이 개나 했는데. 안개라니.”
릴리에가 손끝으로 유리창을 뽀득 문질렀다.
성을 포개듯 감싼 산등성이도 창문 너머 보이는 정원도 전부 가려져 뿌옜다.
무난한 며칠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극진하고 다정했다.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바빠졌고, 집중해 오던 일을 잃은 릴리에 역시 무료해졌다.
“나도 차라리 바쁘고 싶은데….”
릴리에는 그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바쁜지 잘 몰랐다. 오늘 가벼운 회의가 있다는 말도 탈린에게 들은 것이었다.
홀로 가로등과 도로 공사 현장이라도 살펴보려 했으나 블라드가 단호히 반대했다. 비를 맞고 돌아다녔다가는 분명히 열병이 날 거라나.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 함께 가기로 약속했지만, 날씨마저 말썽이었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어떤 선을 느꼈다. 마치 훌쩍 넘을 수 있을 듯 바닥에나 그려진 선처럼 생겼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투명한 벽이 솟아 있는 그런 선.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허락한 만큼만 들어갈 수 있는 경계를 언뜻 발견해 버린 것 같았다.
릴리에가 창문에 이마를 쿵 기대었다.
“…시간이 많아서 이래.”
권태가 싫었다. 시간이 늘어지자 균열이 벌어졌고, 의심과 상실감이 그 헐거운 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에게 거리감을 느낄 때마다 불현듯 동생들이 불쑥 떠올랐다. 매번 발작하듯 내리눌렀지만 영 수월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 좋자고 가족을 버려도 되는 걸까?
정말 그런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가 될 셈이냐는, 지긋지긋한 물음이 새카만 늪 속에서 불쑥불쑥 손톱을 내밀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한숨을 푹 내쉬자 유리창에 뿌연 입김이 서렸다. 체증이 얹힌 듯 속이 답답하게 가라앉기만 하던 그때.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부인. 사색하시는 데 방해를 끼쳐 송구합니다.”
탈린이었다. 돌아본 릴리에의 이마 중앙부에 붉은 동그라미가 서렸다.
릴리에가 멈칫했다. 탈린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양손에 각각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느낀 탈린이 접시를 든 왼손을 살짝 높였다.
“부인께서 아끼시는 버터컵이라는 하녀가 가져왔습니다. 생각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제가 받았습니다만…. 날씨도 우중충하니 드시고 하시는 게 어떠신지 권유 드립니다.”
“아….”
작은 은색 접시에 놓인 벌꿀 케이크가 먹음직스럽게 빛났다.
릴리에의 초록색 눈동자가 탈린의 반대쪽 손으로 향했다. 탈린이 돌돌 말린 양피지를 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건 훌쩍 나타난 행정관님께서 급히 주시고 망령처럼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수석 행정관께서 보내신 모양입니다.”
릴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두 사람이나 오갈 만큼 오래도록 상념에 빠져 있었던 건가?
릴리에가 종종걸음으로 탈린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벌꿀 케이크 특유의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훅 끼쳤다. 입 안에 군침이 고였다.
“고마워요. 탈린 경. 기사분께서 매번 이런 사소한 일까지 도맡게 하다니….”
“아닙니다. 부인의 감사를 받을 수 있다면 이 탈린, 벌집을 통째로 뜯어서 가지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네.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릴리에가 주춤거리며 집무 탁자에 다가가 앉았다.
성큼 따라온 탈린이 접시와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릴리에는 함께 들기를 권유했으나 탈린은 감히 귀부인의 식사에 손댈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릴리에가 디저트용 포크를 눕혀 케이크 끄트머리를 자르니 평소보다 부드럽게 갈라졌다.
입 안에 넣으니 고소하고 바삭한 견과류 비스킷과 크리미한 벌꿀 필링이 입 안에 달콤하게 감돌았다.
평소보다 많이 공들여 만들었는지 풍미가 어마어마했다.
“맛있어….”
릴리에는 자연히 탄성을 내뱉으며 입 안에 감도는 맛을 음미했다.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상기된 릴리에를 보며 탈린이 헤벌쭉 웃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셨습니까?”
릴리에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조심스레 안색을 살피는 탈린에 그제야 깨달았다.
릴리에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탈린을 올려다보았다.
“저 많이 기운 없어 보였나요?”
차분한 며칠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다들 꽤 걱정했습니다. 시종장님부터 사용인들까지 전부 말입니다. 각하께서도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신 티가 났습니다. 기사단 분위기도 장난이 아니….”
탈린이 아차 하며 입을 닫았다. 괜히 몇 번 헛기침하고는 어색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릴리에가 미안해하며 미소 지었다.
“제가 심려를 끼쳤네요. 다들 많이 신경을 썼겠어요. …모두를 번거롭게 만들었네요.”
상전이 저기압일수록 아랫것들은 그저 숨 막히기 마련이었다. 며칠 내내 하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번거롭다니,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인.”
탈린의 확언에 릴리에는 되레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탈린이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성내에 부인을 아끼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다들 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릴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얼어붙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진심이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맑은 태도에 뒤늦게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심장 어귀가 간지러웠다. 침잠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뽀송뽀송한 수면 위로 건져진 것 같았다.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채 릴리에가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고마워요.”
목덜미에서까지 심장이 콩콩 뛰었다. 창밖은 여전히 흐린데 그녀의 마음속에만 쨍한 봄볕이 들었다.
포크를 만지작거리던 릴리에는 한즈가 남기고 간 양피지에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던 탈린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정말… 심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아름다우십니다. 부인. 만약 제가 남자였다면 맹세고 나발이고 각하께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인의 뒤에서 눈부신….”
“감사해요. 이거, 읽을게요. 저, 이제…!”
분홍빛이던 뺨이 새빨개진 채 릴리에가 양피지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탈린은 오늘도 그녀의 귀부인을 양껏 칭송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호위 자세로 몸을 돌렸다.
릴리에는 손부채질을 하며 애써 양피지에 집중했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양피지 내용을 눈으로 훑던 그녀가 멈칫했다. 천천히 내용을 따라가던 그녀의 녹안에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그렇구나. 화약….”
비할 바 없이 밝아진 표정으로 릴리에가 몇 번이고 양피지를 읽어 내렸다.
마치, 유리온실에서 아타카 고원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릴리에가 탈린의 뒷모습을 향해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양피지를 돌돌 말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탈린 경.”
탈린이 재빨리 뒤로 돌았다. 릴리에가 그녀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블라드에게 가야겠어요. 지금 기사단에 있겠지요?”
생기 가득한 릴리에의 얼굴을 바라보며 탈린이 마주 웃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