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망가진(3)
눈 시린 하늘에서 봄볕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크림색 사두마차가 금빛을 반사하며 정원에 들어섰다.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대리석 저택 3층 창문이 벌컥 열렸다.
“누나!”
단델리온이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손을 흔들었다. 만개한 꽃송이처럼 환한 웃음.
윤기 나는 은발이 햇빛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우유 단지처럼 뽀얀 피부에 붓기도 멍 자국도 없었다.
탈린이 마차에서 내리는 릴리에를 에스코트했다.
“탈린 경. 사용인들이 저택을 비우도록 해 주셨으면 해요. 둘이서만 이야기 나눌게요.”
“송구합니다만 각하께서….”
“저택 밖에서 기다리세요.”
단호히 잘라낸 후 릴리에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3층에 올라 살롱에 문지방을 밟자마자 단델리온이 훌쩍 다가왔다.
“나 봐, 누나. 완전히 다 나았어! 누나 남편… 영주님께서 보내 주신 쌀쌀맞은 고위 사제님이 고쳐줬어. 이거 봐봐.”
가까이서 본 동생은 얼굴에 잡티 하나 없었다. 닫힌 문을 등지고 선 릴리에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블라드가… 사제님을 보냈었니? 언제?”
“누나가 나 병문안 왔던 그다음 날에? 그러니까 누나가 카디스 감옥….”
단델리온이 신나게 주절대려던 입을 꾹 닫았다. 그가 초조한 듯 커다란 녹안을 이리저리 굴렸다.
“누나, 이리 앉아. 누나 온다고 해서 내가 급하게 준비했어. 누나 디저트 같은 거 좋아하잖아. 그치?”
티 테이블에 자리 잡은 단델리온이 3단 트레이에 가득 찬 애프터눈 티세트를 곁눈질했다. 릴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단델리온은 이 무거운 공기가 낯설었다. 조금만 기특한 짓을 해도 아낌없이 칭찬해 주는 누나였는데.
불길함에 입 안이 텁텁해졌다.
“누나, 나 걱정해서 온 거지? 좀만 더 늦게 왔으면 나 까먹은 줄 알고 서운하려고 그랬는데. 완전, 삐질 뻔했잖아. 응?”
이쯤 해도 답이 없자 단델리온은 끙끙대는 소리가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외면해 보려고 애써도 제 발 저릴 일이 한둘이 아닌 그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있지. 누나도 피부 좋아졌다. 영주님이 누나 예뻐한다고 소문났더라. 이번 결혼은 좀 잘한 것 같아. 사람들도 누나 좋아하고.”
“…….”
단델리온이 결국 격한 숨을 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턱 기댔다. 고운 미간에 신경질적인 홈이 파였다.
“아, 누나.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왜 앉아만 있는 거야!”
“로키 말인데. 단델리온.”
“어, 어?”
엉겁결에 대답한 단델리온이 한 박자 늦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아는 누나는 예민한 화제를 이렇게 직설적으로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며 살살 타이를 줄 알았는데. 전에 없던 일이었다.
티 테이블 어귀만 한없이 쳐다보던 릴리에가 무거운 머리를 일으키듯 천천히 동생을 마주 보았다.
“누나… 표, 표정이 왜 그래….”
단델리온은 순간 갈비뼈가 쫙 조여들었다. 소름이 등줄기를 거꾸로 훑었다.
누나의 눈빛이, 불치병을 선고하는 의사처럼 음울했다. 아무리 단델리온이라도 그 안에 서린 절망적인 체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누나가 무언가를, 포기했다.
슬픔이 그녀의 입을 가르고 툭 빠져나왔다.
“로키는… 살 수 없을 거야.”
단델리온 또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팔락였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화제와 너무 달랐다.
“형한테 무, 무슨 일이라도 있었….”
핏기가 사라진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로키와 함께 저지른 짓이 눈앞에 생생히 스쳐 지나갔다.
출입금지령을 어기고, 영지민 셋을 죽이고. 심지어 살인은 자신도 공범이었다.
귀부인을 위협한 침입자가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까지는 경비병에게 전해 들었다. 그게 로키 형이라는 건 알았다.
빨간 줄 하나 더 생긴다고 큰일도 아닌 형이었기에, 솔직히 위기의식이 없었다.
트리스탄과 달리 가족이니까. 누나가 알아서 해 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릴리에는 울컥 터져 나오는 숨을 눌러 참았다. 내뱉는 호흡이 가늘게 떨렸다.
“황실을 모독했어. 그것만큼은… 누구도 어쩔 수가 없어.”
가신들 앞에서 영주와 선황제의 혈통을 동시에 모욕했다. 귀족이어도 산채로 사지가 잘릴. 그런 중죄였다.
블라드가 로키가 받을 처벌을 공유한 건 아니었다. 그게 사실 배려라는 걸, 릴리에는 잘 알았다.
“그러니까… 방법이 없어. 단델리온.”
스스로 토해 내는 현실을 감당할 길이 없어 릴리에가 눈을 감았다.
단델리온은 영혼이 죽은 듯 숨을 멈췄다. 그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울음처럼 흘리기 시작했다.
“혀… 형까지…. 엄마 다음으로는… 형이야?”
릴리에는 참담함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악문 잇새로 몇 번을 다짐했다. 무너지지 말자고.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유지해야 했다.
범람하는 물살에 흔들거리는 둑을 맨손으로 막아서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만큼 위태로운 침착. 뼈가 빠그러지는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다.
“누, 누나가 어떻게 해 줘!”
단델리온이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우당탕 넘어졌다. 꼭 말아 쥔 그의 주먹이 떨렸다.
“누, 누나가 형을 감옥에 가두지만 않았어도. 누나가 남편이 상단에 손 못 대개 말리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릴리에는 빈속에서 위액을 토해 낸 듯 숨 닿는 곳마다 쓰리고 화끈거렸다. 내장이 우글우글 엉키는 복통이 일었다.
무력하기만 한 누나의 반응에 절망이 단델리온 얼굴을 꽝 때렸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형은 누나 좋으라고 그랬던 거야. 형이 성격이 조금 그렇지만, 누나도 알잖아. 형은 누나를 정말… 그러니까 어떻게든 해 달라는 말이야!”
“미안해. 단델리온.”
와그작 부서진 마음이 기도를 타고 울컥 튀어나왔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꾸역꾸역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눈물을 와락 터트릴 듯 서 있는 동생이 보였다.
불쌍한 아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만 해도 심장이 싹둑 잘려 나가는 듯 쓰린 아이. 그녀는, 이제 말해야만 했다.
“내가 모자라서. 하필 네 누나라서. 네 삶을 전부 망가뜨려서. 미안해 단델리온….”
단델리온이 숨을 삼키며 쩍 굳었다. 남매가 서로 절대 건드려오지 않았던 금기를 뜯어내고 만 것이었다.
릴리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억지로 잡아 뜯은 동생의 흉터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릴리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얼굴에 닿는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너는 나 때문에 일그러졌고, 너도 내 삶을 망가트렸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단델리온. 더는… 못하겠어. 나는.”
단델리온은 식은땀을 펑펑 흘리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입 안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지 어눌한 소리를 내던 그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누나. 누나가 어떻게 나를….”
“이제, 네가… 너무 미워.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그래서 미안해.”
“내가 미, 미워? 누나가?”
누나가 쏘아 버린 단어가 이명처럼 메아리쳤다. 지금,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래.”
릴리에가 손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엉망진창이었으나 눈물은 없었다. 그저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에 일그러져 만신창이였다.
꼭 닮은 녹안이 서로를 응시했다.
“왜 말하지 않았니?”
아버지가 로키를 보냈다는 것. 그리고,
“트리스탄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해 왔는지. 너도 다 알았으면서….”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블라드가 탈린에게 지시하여 빼돌린 매춘부들이 카디스에 자리 잡았다. 이전 혼처의 하녀였던 그녀들….
감옥에서 로키가 토해 냈던 그 말.
[그럴 거면 단델리온도 감옥에 처넣었어야지. 눈알도 뽑고, 혀도 자르고. 어? 아니다. 여기서는 머리를 잘라 걸던가?]
모든 걸 알고 있던 듯한 단델리온의 반응.
[형이랑 다르게 나는 정말 그냥 놀러 간 거야.]
모든 정황이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 억지로 직시하게 했다.
단델리온은 머릿속이 하얘지며 숨이 턱턱 밀려들었다. 내쉬는 법을 잊은 듯 폐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누나가 그걸 어떻게….”
단델리온의 사고가 완전히 굳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현기증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아, 아니야. 누나 첫 번째 결혼 때는, 나 엄청 말렸어. 그런데 아버지도 로키 형도 다 괜찮다고, 상단에 좋은 일이라고 했어. 그래서….”
손이 벗겨지도록 밀어 대던 둑이 릴리에의 안에서 끝내 와르르 무너졌다.
외면에 밀렸던 세월을 한 번에 다 하려는 듯. 원망이 뱃속에서 펑 터지며 절절 끓었다.
“있잖아, 단델리온….”
모든 불행이 자충수였기에 감히 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그 감정. 원망이 걸신들린 듯 혀를 끌어당겼다.
“나, 벌레였어. 그 결혼 생활 두 번 동안…. 썩은 음식을 주워 먹고 바닥에 진액을 뿌리고 다니는 그런 벌레 취급이었어.”
고저 없는 목소리가 더욱 섬뜩했다. 사람이 어디까지 초라해질 수 있는지 온몸으로 처절히 확인해 온 세월이었다.
“평민이니까 그런 건 줄 알았어. 예고 없이 차가워지던 그 태도 말이야….”
이제야 아귀가 맞았다. 은근한 경멸이 왜 한순간에 지독한 고문으로 바뀌었는지.
고작 결혼했을 뿐인데 더러운 여자 소리를 들으며 살았어야 했는지.
“나는, 책임지고 싶었어. 너희를, 그리고 누구보다 너를. 불행하게 만든 게, 나니까. 나는 너를….”
원망과 죄책감이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반쯤 녹아 질척하게 뒤얽힌 관계.
둘 사이를 망쳐온 사람이 둘 중 누구도 아니기에. 더더욱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관계.
릴리에는 그 관계를 이제 끝내야만 했다.
“너를 정말 아끼고 사랑했어. 그게….”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주워 삼켰다. 그것이 가슴으로 들어가 열이 오르다가 이내 곪을 것을 알지만. 차라리 무심히 덮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후회돼.”
릴리에가 단델리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야. 아니야!”
단델리온이 자리를 박찼다. 누나 앞에 무릎 꿇으며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눈앞이 온통 뿌옜다.
“이러면 안 돼. 누나가 나 버리면, 나는, 우리는 아무도 없어! 아버지가, 우리 둘만 미워하잖아. 우리는, 서로 버리면 안 돼. 누나. 나는 그러니까…!”
릴리에가 자신의 팔을 허겁지겁 붙잡는 단델리온의 손을 쳐냈다.
단델리온은 뺨이라도 맞은 듯 굳었다. 처음 보는 누나의 매정함이 영혼을 난도질했다.
“나는 이제 아무도 없지 않아. 너보다 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단델리온. 나한테는… 생겼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기우뚱, 휘청이더니 바닥을 향해 맥없이 쓰러졌다.
“네가 로키와 저지른 일은 사면해 줄게. 이게 누나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석관을 닫고 들어가 버린 듯, 건조하고 무감한 녹안이 넋 나간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안녕. 단델리온.”
릴리에가 작게 내뱉고 돌아섰다.
방문이 탕,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