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사실 이 결혼은(2)
진짜 딱 한 대만. 때려보면 안 되나?
개를 허락 없이 주워 온 양 풀이 죽어 눈치를 보는 단델리온을 향한 탈린의 감상평이었다.
곱상한 속눈썹을 팔락이는 꼴이 밉살맞기 그지없었다.
탈린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릴리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인. 시종장께서 허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친우분에 대해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그자는 아직 죄인입니다. 이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단델리온이 억울함에 울컥했다.
“거짓말 아니거든요? 진짜로 허락했단 말이에요!”
“탈린 경.”
동생이 저지른 돌발행동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릴리에는 금방 차분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겠어요? 10분, 아니 5분 정도만이요.”
“절대 안 됩니다.”
탈린은 낯설 정도로 단호했다.
두 번이나 그럴 수는 없었다. 트리스탄을 동생으로 착각하고 자리를 비웠던 그 날은 인생에 손에 꼽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치욕으로 남았다.
“성 한복판에서 귀부인을 윽박지르고, 몸에 손을 대는 막무가내의 남자입니다. 심지어 그의 죄목은…. 흠. 어쨌든 저는 절대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철 방패 같은 반응이었다.
탈린은 다짐했다. 강건하게 고집부리셔도, 우아하게 달래셔도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절대 굽히지 않으리라.
“탈린 경. 제가 쓰러졌던 그 날. 트리스탄의 사형장에 계셨었나요?”
쇠말뚝 같았던 탈린의 자세가 순간 흐트러졌다. 허를 찔린 갈색 눈동자가 목표를 잃고 릴리에의 얼굴 위를 헤매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형이 무산되었던 날. 자리에 있던 병사들 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영주의 어마어마한 엄포가 있었는지, 조금도 떠벌리는 이가 없었다.
귀부인께서 사형을 중지하던 과정에서 쓰러지셨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탈린이 아는 내용도 거기까지였다.
릴리에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너무 내밀한 이야기라서요. 다른 사람 앞에서 나눌 자신이 없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사죄는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다만….”
탈린이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을 꾸지람하듯 노려보았다.
“동생분만큼은 방에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여러모로 도움 되는 구석이 없는 자였지만.
귀부인을 외간 남자와 침실에 단둘이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머릿속이 병적으로 청순할 뿐. 고의로 누이를 해치고자 하는 건 아닌 듯했다.
릴리에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제 치부를 드러낼지도 모르는 대화를 동생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다.
그건 릴리에의 마지막 동아줄 같은 자존심이기도 했다.
탈린이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떨궜다.
“…문밖에 바로 서 있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탈린 경.”
탈린은 두개골이 냄비 뚜껑처럼 달그락거리는 기분을 꾹 참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제비 새끼 같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트리스탄의 복장은 릴리에를 기다릴 때와 같았다.
어깨는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크림색 코트까지 걸친 모양새가 제법 번듯했다.
헝클어진 흑발까지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탈린이 한층 더 적의에 휩싸이며 흉흉해졌다.
트리스탄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배려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사님.”
“문에 등을 붙이고 서 있어라. 한 뼘이라도 떨어졌다가는 등 가죽을 벗겨버리겠다.”
탈린을 뒤따라 나가며 단델리온이 트리스탄을 향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응원할게!’
트리스탄이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자 드디어, 릴리에가 보였다.
자기 죽음을 애도하듯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베일이 바람에 날려 드러났던 창백한 얼굴이 선연했다.
공황에 짓눌려 오열하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모래처럼 무너져 내릴 듯했다.
살아서 보는 마지막 광경이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릴리에라니. 그것도 꽤 낭만적이었는데.
오늘의 그녀는 그때와는 꽤 달랐다.
“릴리에. 많이 아팠다면서…?”
목부터 발끝까지 꽁꽁 가린 와인색 로브는 남편의 것인 듯했다.
릴리에 또한 꽤 훤칠한 편이었음에도 로브의 천 대부분이 바닥에 한참 남아돌았다.
자신과 눈을 맞추지 않는 그녀를 보며 트리스탄이 보란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몸은 괜찮아? 꽤 오래 기다렸는데 오질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온종일 꿇고 있던 무릎 관절이 말 그대로 박살 날 뻔했었다.
그런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내심 아쉬웠다.
릴리에는 할 말을 고르는지 영 대답이 없었다.
트리스탄은 그녀의 단아한 옆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순결한 백합의 꽃잎에 보석 가루를 뿌린 듯 청순하게 빛나는 은발이 오늘도 눈부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를 보고, 상대했지만 그녀 같은 여자는 없었다. 예쁜데 정숙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여자.
보석으로 치면 특상품이었다. 돈이 있어도 손에 넣을 수 없기에 더 탐하게 되는 그런 종류였다.
“네 남편을 막아 줘서 고마워.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계속 네 생각을 했어. 네가 했던 말들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아파서 뭐라도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나는 기억이 잘 안 나.”
릴리에가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트리스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반응을 보인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였다.
심지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진심이라면 그건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소리였다.
“네 본심을 말했어. 네가 오래도록 참았던 것. 성실한 너는 내 앞에서는 남편을 감쌌지만, 그가 널 자위기구 취급하는 게 고통스러웠던 거였어.”
릴리에가 흠칫했다. 그녀가 그제야 트리스탄을 돌아보았다.
모욕을 당한 듯 수치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내 오해였어. 그는 나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그만둬.”
“불쌍한 릴리에.”
트리스탄이 가슴이 미어진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육욕에 빠져 너를 그렇게 대우한 그를 믿고 있다니, 너를 어쩌면 좋을까…. 나 정말, 정말 가슴이 아파. 릴리에. 나는 너의 유일한 친구잖아.”
“…….”
날 섰던 릴리에의 표정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그리고는 제 반응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이내 트리스탄을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그 틈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책임감이 강하지만, 너무 순진해서 실수도 곧잘 하니까. 네가 나를 도와준 것처럼, 너보다 세상을 잘 아는 나도 너를….”
“네 말이 맞아. 트리스탄. 나는 너만큼 세상 물정을 잘 알지는 못해. 머리가 좋지도 않고….”
말꼬리를 흐리던 릴리에가 이내 트리스탄을 다시 마주 보았다.
“그런데 이제 너랑은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만해. 너는….”
트리스탄이 흠칫했다. 기운 없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담담했다.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야.”
윽박지르거나, 단호히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릴리에는 수면 아래에서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터트린 기분이었다.
트리스탄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벙찐 그에게 릴리에의 침착한 목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단델리온을 데리고 하녀 숙소에 들어갔던 이유 말이야…. 네 사업 때문인 거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릴리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영주가 직접 목을 칠 정도의 특수한 중범죄.
아르카디아에서 그 죄는 매춘 알선이었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포주였다.
직업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단델리온도 같이 심판을 받았을 테니까.
그리고 단델리온이 했던 말까지 종합해 보았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했다.
“솔직히 말해 줘. 트리스탄. 내 하녀들을 매춘부로 만들려고 한 거잖아.”
트리스탄의 눈가가 경련했다.
릴리에가 그걸 눈치챌 리가 없는데.
아. 단델리온. 그 자식이 나불거렸구나.
트리스탄은 머릿속으로만 욕지거리를 곱씹었다.
그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릴리에를 마주 보았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고통스러운 듯 푸른 눈을 일그러트리며 트리스탄의 머리가 톱니바퀴처럼 재빨리 돌아갔다.
“내 직업이 항상 네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구나. 나는 늘 네 생각뿐인데. 릴리에 너는.”
“하녀들이 말해 줬어. 네가 그 애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릴리에는 슬쩍 그의 눈을 피했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에는 애초에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심지어 트리스탄을 속이려고 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어설픈 걸 알면서도 이런 강수를 둔 까닭은, 내심 그가 부정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평생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던 사람의 이면을 알게 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자기 자신에게 또한 실망하게 되는 법이었기에.
“내가 한 일 중에 나를 위한 건 하나도 없었어. 릴리에.”
트리스탄의 대답이 날카로운 창처럼 날아와 릴리에의 명치에 콱 꽂혔다.
그는 어느새 문에서 몸을 뗀 채 그녀를 절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평생 희생했어. 릴리에 너처럼. 내가 하는 일, 상단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나를 이해해 줘야지, 릴리에. 너까지 나를 비난하면 나는 도저히….”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트리스탄.”
“!”
상상치도 못한 반격이었다. 트리스탄은 석고상처럼 질린 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릴리에가 외면했던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 친구가 아니라, 드 윈터 공작부인으로써 중죄인을 대가 없이 사면해 줄 수는 없어. 나는, 상단에 정식으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거야. 네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릴리에!”
숨이 멎은 채 서 있던 트리스탄의 얼굴에 순식간에 노기가 일었다.
점점 격양되어 가는 감정이 멀찍이 떨어진 릴리에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배신감이 트리스탄의 온몸을 휘감았다.
“어떻게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럴 수가…. 내가 평생 네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왔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릴리에는 자신을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트리스탄은 눈앞의 여자가 릴리에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여자인 것 같았다.
“너,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고 있어? 상단에 대가를 요구한다니 그건….”
그가 분노에 온몸을 떨며 릴리에를 가리켰다.
“네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부 말하겠다는 뜻이잖아. 나와 단델리온이 공작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걸!”
트리스탄이 버럭 소리침과 동시에 누군가 문을 거칠게 쾅 박찼다.
두꺼운 문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트리스탄이 고통스러워하며 앞쪽으로 크게 휘청였다.
넘어지기 직전 간신히 중심을 잡은 그의 뒤에 단델리온의 고함이 날아들었다.
“누, 누나. 그건 절대 안 돼!”
“이리 나오십시오!”
탈린이 단델리온의 뒷덜미를 잡았다. 단델리온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바둥거렸다.
“아버지라니, 안 돼. 살려 줘 놓고 그러면 어떡해! 아버지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나도 죽어. 싫어!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제발 다시 생각해 줘. 누나. 어? 누나 제발!”
그는 저주하는 말이라도 들은 듯 겁에 질려 있었다.
공황에 빠지기 직전인지 눈은 커졌으나 동공은 잔뜩 수축한 채였다.
“누나가 아버지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내 생각 좀 해 줘, 누나. 누나 진짜 이기적이야. 누나만 아니었으면 엄마도 안 죽었을 텐데 왜 자꾸 똑같은 실수를 하려고 해. 나는,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돼!”
“그러게. 나도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군.”
섬뜩한 중저음 목소리에 모두의 등골에 동시에 소름이 쫙 끼쳤다.
탈린과 단델리온, 트리스탄이 돌처럼 굳어진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서 있는 거대한 남자.
이 성의 주인.
블라디미르 드 윈터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