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나쁜 유혹(1)
“허억!”
릴리에가 크게 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기사단이 원정 훈련을 떠난 지 일주일째. 릴리에는 단 하루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주로 첫 번째 남편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뿔 나팔이 블라드의 사망을 알리는 소리로 뒤바뀌는 꿈이었다.
아직 악몽에서 채 깨어나지 못했는지, 릴리에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실은 오늘도 넓고 고요했다. 침대맡에 내려온 설렁줄을 당기자 문밖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탈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릴리에의 호위 명목으로 원정 훈련에서 제외된 그녀였다.
“일어나셨습니까. 부인…?”
인사를 마친 탈린이 흠칫했다.
“괜찮으십니까?”
잔머리가 젖어 눌린 채 촉촉해진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릴리에의 모습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릴리에가 불안하게 손을 만지작거리며 탈린을 바라보았다.
“탈린 경. 영주님은… 블라드는 돌아왔나요?”
“아직입니다. 원래 원정 기간은 영주님 마음대로라서…. 그래도 이번엔 일찍 돌아오실 겁니다. 북쪽 예배당의 용건을 처리하는 김에 가신 거니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죠? 낙마한다거나, 뼈가 부러진다거나….”
“영주님께서 낙마라….”
탈린은 그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 본다는 듯 떨떠름했다.
“아마 드래곤 등에서도 안 떨어지실 겁니다. 기사단 전체가 동시에 덤벼도 콧방귀 하나 안 뀔 강한 분이시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침착한 설명에 릴리에의 몸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불안이 가라앉고 나니 무안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성의 안주인인 그녀는 영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의 공식적인 결정권자였다.
아침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역시 평민 출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며 순식간에 평판을 잃을 게 분명했다.
릴리에는 깊게 심호흡을 한 후 탈린을 마주 보았다.
입술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언제 악몽에 시달렸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계속 심려를 끼쳐 드리네요. 탈린 경.”
한층 품위를 되찾은 모습에도 탈린은 수심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인 그들의 안주인이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동생분들을 당장 성안으로 모시라고 지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주님이 안 계시니 가족분들이라도 옆에 계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릴리에의 입이 한 박자 늦게 딱 벌어졌다.
“제 동생들이요? 온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오늘 아침에 카디스 입구에 도착하셨습니다.”
벙쪄있던 릴리에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녀가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이라니….”
골치가 아팠다. 자신의 가문이 권세 있는 귀족이어도 예의에 어긋난다는 소리를 들을 행동이었다.
게다가 릴리에는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
영지에 대한 것은 물론, 제일 중요한 남편에 대해서도 파악한 게 없다시피 했다.
지금 가족들을 만나는 건 여러모로 달갑지가 않았다.
릴리에가 손을 내렸다.
“블라드는 평소에 어떻게 하죠? 갑작스러운 방문이 있으면 말이에요.”
탈린이 떨떠름하게 릴리에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는… 방문객 자체를 아주 싫어하십니다만….”
“그렇다면 돌아가라고 해야겠네요. 미리 서신을 보내고, 허락을 받은 후 다시 오라고 해야겠어요.”
의외의 단호한 태도에 탈린은 살짝 놀란 듯했다.
릴리에 또한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의 전부였다.
애초에 그녀의 삶은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들이 밉보이게 만들 수 없었다.
“제가 직접 가서 이야기할게요. 그게 나을 거예요.”
탈린이 말릴 새도 없이 릴리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릴리에는 오늘만큼은 치장에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밖에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첫 방문이었다.
그녀가 충분히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기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지난 두 번의 결혼보다 훨씬 나은 신세인 건 사실이었다.
“맡겨만 주세요! 아주 번쩍번쩍 눈부시게 만들어 드릴게요!”
하녀들의 눈이 동시에 불타올랐다.
하녀들 사이에서 릴리에의 평판은 조용히 수직상승 중이었다.
릴리에는 누군가의 불편한 몸에 대해 유난 떨며 집중하지 않았다.
모든 하녀에게 똑같이 친절할 뿐이었다.
보통의 귀족 부인, 아니 평민에게서도 흔치 않은 태도였다.
하녀들이 의욕을 활활 태우며 서로 빠르게 수어와 음성어를 주고받았다.
- 머리는 전체적으로 땋아 올리고 자연스럽게 잔머리를 내면 어때?
“좋아. 드레스는 영주님이 특별히 준비해 두셨던 그 푸른 드레스로 하자.
- 장신구는 부인 눈동자 색에 맞출래. 내가 생각해 둔 게 있어.
치장의 마무리는 보드랍고 새하얀 털이 북실거리는 어깨 숄과 새틴 원단 안감에 방한 마감을 한 긴 장갑이었다.
하녀들이 영혼을 갈아 넣어 완성한 릴리에를 본 탈린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듯 황홀해했다.
“제 눈이 이미 멀어 버린 것 같습니다. 부인. 제가 영주님이라면 성에 가둬 두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칭찬이… 특이하시네요.”
“저는 반대예요! 제가 영주님이라면 이분이 제 아내라고 온 세상에 자랑할 거라고요!”
릴리에는 설전을 벌이는 탈린과 버터컵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 * *
마차를 타고 성문을 빠져나간 후에야 릴리에는 창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낮의 산길은 첫날 보았던 스산한 한밤중의 풍경과 상당히 달랐다.
푹신하게 쌓인 눈밭 위에 껍질이 새하얀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이 산등성이의 모든 색을 빼앗아 간 것 같았다.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저 멀리서 우뚝 솟은 카디스의 성벽이 보였다.
선두에서 말을 탄 탈린과 마차 문양을 알아본 기사들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능숙하게 성문을 열었다.
마차가 카디스 안으로 진입하자 릴리에는 창에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아르카디아를 한 국가에 비유하자면 영주의 성이 있는 도시인 카디스는 수도나 다름없었다.
결혼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릴리에가 앞으로 가장 열심히 꾸려 나가야 할 도시가 바로 이곳이었다.
마차가 중앙 대로를 가로질러 남쪽 성문에서 멈췄다. 탈린이 말에 탄 채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귀부인께서 가족분들을 뵙기 위해 직접 오셨다. 당장 문을 열어라.”
병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마차에 쏟아졌다.
탈린이 눈을 부릅뜨자 병사들이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도개교를 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의 호령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동작 그만!”
야성적인 턱수염을 자랑하는 건장한 체구의 노기사가 갑옷을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탈린이 말에서 내려 그에게 경례했다.
“발크스 백작님.”
블라드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 카디스의 성주인 고드윈 발크스 백작이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윈터 기사단의 검은 갑옷을 입은 그는 바위로 만든 듯 우람하고 건장했다.
그가 탈린에게 고함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탈린 경. 영주님의 명이 없으면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는 걸 경께서 가장 잘 알지 않소!”
“아일즈 상단이라면 부인의 가족분들이십니다. 백작님이야말로 잘 알고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탈린의 말이 발크스의 심기를 상당히 자극한 모양이었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마차에 타고 계신 귀부인은 벌써 온 영지에 유명했다.
온 세상에 증오하는 것 천지인 영주가 아내를 얻었다는 것부터 이미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평범한 여자여도 궁금해서 눈이 빠질 정도인데.
신분은 평민에, 대륙에서 손꼽히는 악독한 벼락부자의 딸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두 번 사별하고 세 번째 재혼한 여자였다. 발크스는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믿고 천문학적인 뇌물을 써가며 귀족과 결혼을 해댄 여자였다.
물론 외모도 충분히 뒷받침되어서 가능한 일이라고들 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돈과 미모를 믿고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며 떵떵거리는 방탕한 여자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를 악물며 탈린을 노려보았다.
“예외는 없소. 아일즈 성이 붙은 작자들은 도대체 예의라는 게 없는 거요? 부인께서도 약속보다 세 달이나 일찍 오셔서 다들 얼마나 고생을 하는 중이오. 그것도 이번처럼 무통보로!”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카디스 성주!”
이번에는 탈린이 무시무시하게 인상을 구기며 발크스를 노려보았다. 욱해서 목에 핏대가 올라온 그녀는 릴리에를 대할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차에 부인께서 타고 계십니다. 온 가신이 충성하고 보호해 드려야 할 귀부인께 무슨 무례를 저지르고 계신 겁니까!”
“듣든가 말든가! 제국의 기틀을 넓힌 드 윈터 사령관과 결혼을 했으면 영광스러운 줄을 알아야지! 어떻게 매번 이렇게 규칙을 어기고 제멋대로 군단 말이오!”
탈린이 다시 고함치려는 순간, 마차 문이 달칵 열렸다.
팽팽히 긴장해 있던 모든 병사의 눈이 마차로 향했다.
은은한 은빛 레이스가 반짝이는 짙푸른 드레스 밑단이 먼저 내려왔다.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떼지 못했다. 모두의 신경이 그녀에게 강제로 붙들린 듯했다.
청아한 정오의 겨울 햇빛이 정면으로 그녀에게 쏟아졌다.
새하얀 숄만큼 부드럽고 맑은 흰 피부와 섬세하게 땋아 올린 은색 머리칼은 눈이 탁 트일 정도로 빛이 났다.
온통 차가운 색상뿐인 그녀가 가진 녹색 눈동자는 마치 겨울 막바지에 피어난 녹음 같았다. 또한, 귓가의 에메랄드 귀걸이가 그녀의 눈동자에 더욱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추위를 감수하고 숄을 택한 덕분에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선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유달리 체구가 좋은 드 윈터 기사들 사이에 있기 때문일까. 안 그래도 뼈대가 얇은 그녀가 더욱더 가녀리고 유려해 보였다.
모두가 숨죽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에는 장갑을 낀 손으로 직접 마차 문을 닫았다.
척 보기에도 에스코트 없이 혼자 움직이는 데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넋이 나가 있는 발크스에게 다가온 릴리에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한 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크스 백작님.”
발크스가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리며 새틴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거친 노기사의 손안에 들어온 그녀의 손은 작고 가녀렸다. 조금 전까지 목청껏 소리 질렀다는 사실이 금세 무안해질 정도였다.
발크스가 릴리에의 손등에 살짝 입 맞춰 인사했다.
“아르카디아의 안주인을 뵙겠습니다. 카디스의 성주. 고드윈 발크스 백작입니다.”
릴리에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뻗대는 노기사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등장에 당황하여 기세가 누그러졌으나, 눈빛에 담긴 감정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고 있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눈빛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기민하게 알아채는 종류의 것이었다.
“미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이렇게 갑작스레 뵙게 되었네요. 백작님의 노고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저의 부족한 식견을 용서하세요.”
“본인 식견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셨다면 이제 성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더 이상 병사들의 군기와 이 도시의 치안을 흐트러트리지 말고 말입니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릴리에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유가 없는 미움은 얻어맞으면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릴리에는 미움받기 전문가였다. 이런 종류는 그래도 다룰 만했다.
“백작님께서는 그대의 주군과 카디스의 안전을 진심으로 아끼시는군요.”
발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소리를 빽 지를 줄 알았는데, 그의 예상보다는 품위가 있는 여자인 듯했다.
“저는 기사분들이 세워 주신 기틀을 흔들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제 방문이 불안을 야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면 사과드릴게요.”
릴리에는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럽되, 단호했다.
“그러나… 영주의 병사들 앞에서 귀부인을 무시하는 것은 충성을 증명하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지 않나요?”
발크스가 흠칫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릴리에의 눈동자는 우아하고,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