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46)

외 전 - 소소한 이야기

* * *

어느 날, 로운이 물었다.

“내가 아기를 가졌다는데 당신은 왜 놀라지 않았어?”

로운은 내내 그게 궁금했다. 지석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자신은 아이를 가졌다. 그럼 당연히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텐데, 지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착한 사람은 선물을 받지.”

지석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재차 묻자, 지석은 일년 전, 로운이 미국으로 떠난 뒤, 바로 그녀를 따라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 병원에 있었던 것이다. 로운은 그렇게 오래 전에, 지석이 수술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확률이 아주 낮을 거라고 했는데...”

로운이 감격해서 말하자 지석이 이번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를 수술한 의사는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했다. 이렇게 빨리 그 가능성을 증명하게 될 거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 정자들은 그동안 존재가치와 효용성을 증명하지 못해서 좀 급했거든.”

음. 이 남자는 가끔, 매우 뻔뻔하다.

또 어느 날, 로운은 그를 위해 저녁을 차렸다.

“자, 이거 먹어봐요.”

그녀는 식탁 한 가운데 조심스럽게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한방 갈비찜이 들어있었다. 맛있는 냄새와 조금 탄 듯한 냄새가 어우러져 있었다.

“당신은 생선보다 고기를 좋아하잖아. 내가 처음 만든 거야.”

물론, 처음이겠지.

로운은 요 며칠, 요리하는데 흠뻑 빠졌다. 매일 매일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그에게 맛을 보게끔 했다. 지석은 망설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것은 김치 찌개였는데, 그가 먹어본 것중 가장 맛이 없는 것이었다. 지석은 그녀를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무척 맛있다는 표정으로 먹었던 걸, 두고 두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속으로 가져간 순간, 그는 멈칫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쓴 맛과 누린내, 질긴 육질이 그의 섬세한 미각을 고문하는 듯 했다.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 이처럼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로운의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어때요? 맛있어?”

로운은 장화를 신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무척이나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지석은 미간에 파직, 혈관을 돋우었다. 하지만 로운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별 수 없이 꾸역 꾸역 갈비찜을 먹었다.

“당신은 안 먹나?”

그는 문득, 로운이 그 갈비찜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을 살펴보니, 어제도 그녀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로운은 매우 뿌듯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내 입맛에는 안 맞는 거 같아. 하지만, 당신 입맛은 특이하니 다행이다, 앞으로는 매일 내가 요리를 해줄게. 기대해요.”

지석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로운, 내 입맛도 무척 평범해.”

그가 이렇게 말하면, 그동안 그가 그녀를 위해 맛없는 음식을 참고 먹어준 걸 알고, 감동 받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운은 눈을 반짝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나, 그럼 내 입맛이 특이한 건가... 난 엄청 맛없었거든. 당신이 맛있다니 다른 사람들도 한 번 초대해 볼까?”

어쨌든, 그녀는 지석이 그 음식을 맛있어 한다는걸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운은 곧 입덧을 시작해서 지석의 평범한 입맛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애석해했고, 지석은 매우 만족했다.

로운의 입덧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지석은 그녀가 다시 요리를 할까봐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도 로운은 다른 관심이 생겼다.

그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번번히 리언을 만나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탐문을 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리언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다. 리언이 요리 솜씨를 부려 배불리 먹고 난 뒤, 남자들은 거실에 그녀들은 주방에서 수다를 떨었다.

“아라 아빠랑 오빠가 이젠 정말 사이가 좋아보여요.”

리언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로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 딸을 무릎에 앉힌 지훈은 조금 짓궂은 미소를 띠고 있고, 지석은 살짝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저게 어딜 봐서 사이가 좋아 보인단 거야?

돌연, 지석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로운과 시선이 마주치자, 쌀쌀하던 지석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 속에 감춰진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로운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리언도 그걸 보고는 정말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난 오빠가 누구를 저렇게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이란 걸, 생각도 못했어요. 오빠는 늘 커다란 산 같아서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거든요. 누구를 좋아한적도 싫어한 적도 없어요. 별로 말도 없고.”

“그랬어요? 처음에 나한테는 얼마나 쌀쌀맞았는데요.”

로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녀가 처음 병원에 가서 그를 봤을때는 싫어하는 티가 역력했었다.

“지금은 완전 잔소리쟁이에요. 난 맨날 혼만 난다구요.”

로운이 가볍게 한숨을 쉬자, 리언이 미소지었다.

“오빠가 행복한 것 같아서 난 정말 기뻐요. 언니한테 고마워요.”

리언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로운은 리언이 정말 지석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녀와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게임에 대해서 얘기해주자, 리언은 무척 신기해하며 자신도 꼭 해보고 싶다고 눈을 빛냈다.

지석과 집에 돌아 온 후, 로운은 리언이 건네준 상자를 살펴보았다. 그가 공부하던 책 몇권, 엄청난 상장과 성적표들, 앨범 등이 들어 있었다.

“이 사진은 진짜 성격 나빠 보인다.”

그녀의 손에 작은 증명사진이 놓여 있었다.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석이 고개를 빼들었다. 그게 뭔지 알아보고, 귓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 녀석은 뭐 그런 걸, 아직까지 갖고 있냐.”

그는 조금 투덜거렸다. 그 증명사진은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찍은 것이다.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석의 물건은 지금까지 리언이 보관하고 있어서, 지석은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당신은 정말 사진이 별로 없다. 어렸을 때 모습 궁금했는데.”

앨범에 몇 장 되지 않는 사진들을 들춰 보며 로운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사진 찍기 싫어했으니까.”

지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그가 카메라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은 어쩐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부분이 졸업사진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배경은 달랐지만, 안에 서 있는 사람은 늘 그 표정, 그 자세였다.

“풉, 중학교때나 대학교때나 얼굴이 똑같다니, 진짜 놀랍다.”

앳된 모습은 남아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이렇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니, 과연 강지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별명이 강박이었어.”

로운이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박사님?”

지석은 몇 초 뒤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강박증이라고...”

아, 로운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무 잘 어울려.”

그와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뭐 봐요?”

로운은 그가 계속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자, 상자를 밀어내고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휴직은 절대 안 된다는 고회장 때문에 요즘 그는 집에서도 종종 일을 했다.

“음... 일.”

지석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로운이 너무 가까이 오는 바람에 집중력이 흐려졌다. 반쯤 마른 머리카락과 달콤한 체향이 어김없이 코끝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사실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 지훈으로부터 남자의 '자제심과 배려'에 대한 매우 지루한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늘 최지훈 보다 인내심이 많다는 걸, 과시했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언을 위해 지훈이 일년이나 금욕했었다는 것이다. 지훈은 그런게 '진정한 사랑' 아니겠냐며, 엄청나게 잘난 척을 했다.

지석을 쳐다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격 결혼 발표와 임신 초기라는 이유로 지석은 거의 한 달 넘게 로운을 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였다. 여자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적당한 섹스는 별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4개월이 지났으니, 해도 되지 않을까?

적당한 틈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지훈의 말을 들은 후, 로운이 엄청나게 감동받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마치, 당신도 그래 줄 거죠?

라고 확신한 듯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지석은 침대 위에서 보들 보들, 야들 야들한 몸을 쳐다만 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턱 밑으로 들어오는 로운의 작은 얼굴을 보며 지석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최지훈이 하는데 그가 못할 리 없다. 지석은 쓸데 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더욱 일에 집중했다.

“참, 당신 재테크에 관심 있다고 했지?”

지석의 말에 로운은 찔끔했다.

“그, 그래요.”

로운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지석과 헤어졌을때의 일이다. 그녀를 상담해준 자산관리사에게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 뿐인데, 그게 지석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좋은 현상이야. 확실히 당신은 그런 쪽이 약하니까. 앞으로는 내가 매일 저녁마다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도록 하지.”

대체 뭐가 이해하기 쉽다는 말인가?

로운은 각종 그래프와 숫자와 눈이 빙빙 돌아갈 것 같은 경제지표들을 한 시간 정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이걸 꼭 내가 봐야 해요?”

세계의 경제 동향에 대해서 최대한 진지하고 재미없게 설명하던 지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매우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재미 없어?”

어떻게 이걸 재밌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

로운은 입술을 조금 삐죽거리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어요. 난 그냥 당신에게 전부 맡길래요.”

로운은 그의 다리 위에 느릿하게 엎어졌다. 허벅지에 뭉클한 촉감이 느껴지자 지석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는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어째서 지훈과 그런 걸 비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석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전부라면, 어디까지 허용되는건가?”

“글세요.”

“주식? 금융? 동산? 나한테 다 위임할건가?”

로운은 그의 목소리가 낮아 진 것도 모르고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아, 알아서 해 줘요.”

“흠, '전부 다'란 말이군.”

지석은 가볍게 그녀를 안고 누웠다. 반 쯤 몸을 겹친 채, 능수능란한 손길로 부드러운 가슴을 손에 쥐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걸 안 후, 지석은 그녀를 정중하게 안고 잤을 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로운은 한편으로는 그게 아쉬웠고,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 지훈의 말을 듣고는 더욱 더 그가 자신을 아껴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늑대짓이라니.

로운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는 뜻이었다. 지석은 태연스레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방금 전에, '전부' 라고 했잖아.”

“그게 뭐요?”

지석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맡겨진 '전부'에는 당신도 포함되는 거니까, 난 그 권한을 지금부터 행사하려고.”

로운은 어이가 없어서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지석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파자마 위로 고개를 숙여서는 그녀의 가슴을 지그시 깨물었다.

“으읏, 지석씨!”

임신으로 예민해진 젖꼭지가 빨아 당겨지자, 갑자기 몸 안이 확 조여들었다. 로운은 기겁하며 눈살을 찡그렸다.

“하지 마요. 하면 안 좋다잖아...”

그녀는 지석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지만,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누가?”

“아까... 대표님이... 흐읏!”

로운은 빠르게 달아오르는 쾌감에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안 된다는 로운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열렬하게 지석의 손길을 환영하고 있었다.

“흐음, 당신이 최지훈 말을 그렇게 잘 듣는줄 몰랐군.”

심술 맞은 목소리와 함께 또 다시 가슴이 세차게 빨렸다. 로운은 하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벌써부터 몸 안 쪽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로운은 바르르 떨려오는 전율을 무시하려 애썼다.

사실은,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너무 자존심 없이 지석에게 매달린 것 같았다.

뱃속의 아가를 생각해서라도 엄마가 이렇게 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까, 리언의 집에서 지훈이 한 말을 듣고 이번 기회에 확실히 우위를 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 마. 으응...”

문제는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몸이었다. 지석은 입술로 흠뻑 적셔 놓은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틀었다.

구슬처럼 튀어오른 살점을 손가락으로 꼭 집었다, 비틀고, 부드럽게 전체를 어루만졌다. 로운은 점점 체온이 올라가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미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손길은 집요해졌다.

“아니, 지석씨, 이제 그만. 아...”

그녀가 다시 안 된다고 하기도 전에, 말랑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입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입속을 샅샅이 헤집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아, 지석씨... 안 되는데...”

입술이 떨어진 틈에 간신히 말해보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지석은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부드럽고 자상한 손길로 그녀의 파자마를 벗겨냈다.

로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대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석은 빤히 보고 있는 그녀의 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지. 나는 당신이 준 위임권을 충분히 사용할 생각이야. 모처럼 받은건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지석은 참을 생각이 없었다. 로운 역시, 자신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으응, 뭐 상황이 다르니까, 우리 아긴 튼튼할거에요.”

그녀는 변명조로 말하며 지석의 목을 끌어안아 당겼다. 목덜미에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석은 로운의 몸 전체에 온통 붉은 꽃을 피운 뒤, 그녀를 자신의 배 위로 들어 올려 앉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고 거칠게 질주하고 싶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맹수처럼 뛰노는 짐승의 목덜미를 눌러놓느라 온 몸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무리를 줄 수는 없었다.

“당신이 해.”

그는 양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손에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손끝으로 짙어진 젖꼭지를 튕기고, 잡아 당겼다.

로운은 웃으며 그의 가슴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석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짙고 새까맣게 어두워진 눈빛이 뭘 원하고 있는지, 그가 아무리 초연한 척 해도 이제는 속지 않았다.

뾰족한 혀가 지석의 탄탄한 가슴 위를 축축하게 적셔갔다. 로운은 그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그의 가슴을 빨고, 이끝으로 깨물고, 혀로 핥아 올렸다. 그의 몸을 살짝 살짝 깨물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감질나게 느린 그녀의 애무에 지석은 더욱 애가 달았다. 로운의 몸을 자신의 아래쪽으로 밀어 내리며, 급기야 신음을 터뜨렸다.

“음... 로운아, 제발, 어서 해줘.”

지석은 초초한 목소리에 로운은 방긋 웃었다.

“나는 아직 당신 몸에 대한 어떤 권리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는걸요.”

그녀가 놀리듯 말하자 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리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당신에게 그 권한을 주었지. 당신이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거야.”

로운은 그를 피해 미국으로 갔던 일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흐려졌다.

“난, 몰랐어요.”

그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다. 부모님의 일을 알면 분명 실망해서 그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줄만 알았다.

“괜찮아, 당신의 경제감각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내가 관리할테니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거야.”

지석은 음산하게 말하며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로운은 이미 팽창해서 우람하게 솟아오른 그의 몸 위로 자신을 내렸다. 성난 몸이 매끄럽고 촉촉한 내부에 감싸이자 그의 목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터졌다.

“음...”

파도를 타듯 움직이던 로운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지석은 그녀를 안아 옆으로 눕히고, 뒤쪽에서 몸을 겹쳐왔다.

달라붙은 몸 사이로 화산 같은 열기가 솟구치자 로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홀한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강렬한 순간이 지나가고, 몸 안에서 지석이 뜨겁고 세차게 터뜨리는 것을 느꼈다.

한참이 흐른 후, 로운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있잖아요. 당신이 내게 준 권리도 똑같은 거에요?”

“응?”

지석의 나른한 목소리가 정수리에서 울려 퍼졌다. 로운은 비교하듯 물었다. 자신의 전부를 그가 가져간다고 했으니, 그녀에게 준것도 전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달콤함이 밀려왔다. 로운은 확인차 다시 물었다.

“당신의 전부를 나한테 위임한 거에요?”

로운의 말에 지석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로운의 모든 것을 보살필 수 있다. 그녀의 모든 스케쥴과 재산과, 건강과 안전을 포함해서 전부를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그를 보살피게 된다면... 조만간 그들의 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다. 지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준 건 날 '관음'할 권리야.”

“에? 그런게 어딨어요?”

로운이 고개를 치켜들려고 했지만, 지석은 그녀의 머리를 꾹 눌러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만 말하고 자자.”

그는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의 몸을 덮었다. 로운이 뭔가 억울하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훔쳐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돌덩이처럼 딱딱한 마음의 껍질 안쪽, 그 자신도 들여다 본 적 없는 가장 여리고 부드러운 곳에 그녀를 들여 놓았다.

잊고 있던 졸업 사진을 발견했을 때처럼 어색할테지만, 그는 즐길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관음 하는 모습을.

<2권 끝. 특별 외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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