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6)

* * *

새로 이사한 지석의 아파트는 초고층이었다. 로운은 자신이 명함에서 흘낏 본, 그의 아파트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를 그리워 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 늘 그리워했으니까.

현관 앞에 한참동안이나 서 있던 로운은, 마침내 결심하고 비번을 눌렀다. 그냥 짐을 주러 온 것 뿐이야.

그가 자고 있지 않다면, 아마 이문을 열자마자 마주치게 될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하지만, 삐하는 소리에 이어 철컥 문이 열렸어도, 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몹시 어두웠다. 혹시 그가 없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짐만 두고 가면 리언이 다녀갔다고 생각하겠지.

벽에 걸린 간접 조명만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실내를 입구에서 둘러보며, 로운은 들고 온 짐을 거실 끝에 내려 놓았다.

그대로 돌아가려다 다시 멈춰섰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에 홀린 듯, 알 수 없는 충동이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어둠속이라 그런지 그의 집은 예전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정갈했고, 깔끔했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온기가 없었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코 끝을 찌르는 듯한 알싸한 냄새가 배어 있다는 것 뿐이다. 향수는 쓰지 않는 걸로 아는데...

그것이 독한 위스키 향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 발 더 안으로 움직이던 그녀는 마치 얼어 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거실 중앙의 커다란 쇼파에 길고 검은 형체가 보였다. 순간적인 공포심이 사라진 후, 로운은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양복을 입은 그대로, 길다랗게 쇼파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지석이었다. 머리를 그녀 쪽으로 두고 있어, 깨어있는지, 자고 있는지 알수 없었다.

자고 있을 것이다. 만일 깨어 있었다면 그녀가 들어올 때 일어났을 테니까.

지석이 자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로운은 용기가 생겼다. 조금씩 움직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따스하고 어두운 노란 빛의 조명 아래서 그는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수척한 모습이었다. 검푸르게 그늘진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창백해 보였다.

단정하고 매끈하던 그의 턱에 거뭇 거뭇한 수염이 엉망진창으로 자라 있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로운은 자신도 모르게, 쇼파 옆에 주저앉았다. 무슨 꿈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반사적으로 주름진 피부를 스치고, 그의 눈썹을 어루만졌다.

안경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두 눈은 얇은 눈까풀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아래로 길고 섬세한 속눈썹이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말라서 더욱 높아보이는 콧날과 핏기가 사라진 듯한 입술에는 허연 각질이 말라붙은 채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깨닫기도 전에,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입술의 온도에 그녀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이 사람은 아프다. 입술 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희미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픈데 어째서 병원에 있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걸까?

로운은 자신의 눈물이 그의 뺨을 적시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지석이 깨버렸다.

그녀가 얼굴을 드는 것과, 지석이 그녀의 손을 잡아 챈 것은 거의 동시였다. 로운은 주저앉은 채,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꽉 잡히고, 콱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지석은 어금니를 꽉 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거지?”

로운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비틀었다. 지석은 그녀의 손목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말했을텐데! 날 흔들지 말라고, 왜 여기 왔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는 로운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세게 잡고 흔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빠르게 떨어졌고, 목이 메여왔다.

어떻게 그에게 말해야 할까? 그는 자신을 더 이상 흔들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자신은 뭘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또 날 가지고 무슨 장난을 하고 싶어?”

그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건, 딱 한가지였다. 이곳에서 나가야 해. 로운은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손목을 확 빼냈다.

“이로운!”

그의 화난 목소리가 곧장 그녀를 쫓아왔다. 어둠속에서 현관으로 뛰어나가려던 로운은 자신이 내려놓은 짐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 사이, 긴 다리로 성큼 성큼 그를 쫓아온 지석이 뒤에서부터 그녀를 확 잡아 끌어당겼다.

“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고, 다음 순간, 그녀는 단단하고 강한 팔 안에 갇혀버렸다. 뜨겁고 강렬한 입술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석은 벽으로 그녀를 밀어붙이고는 격렬하게 입술을 물어 삼켰다. 반항 따위는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 전체를 반복적으로 세차게 빨아댔다.

뭉클한 혀가 안으로 들어와 온통 그의 맛을 입안에 흩뿌려 놓았다. 지석의 입술은 곧 그녀의 턱과 귀로 이어졌고, 다시 목 아래쪽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정신이 혼미한 사이 코트가 벌어지고 셔츠의 단추가 핑 하니 튕겨나갔다. 까칠한 턱이 부드러운 피부를 스치며 내려갔다.

로운은 숨 쉬는 걸 잊은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그의 입술이 봉긋한 가슴의 위쪽을 헤집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그녀가 몸을 비틀며 작게 신음했다.

“아파...”

지석은 흠칫 했지만,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미칠 것 같이 그리운 냄새였다.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입술에 닿는 매끄러운 피부를 힘껏 빨아들었다.

셔츠의 앞섶이 반이나 벌어지며 로운의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걸 보는 순간, 지석의 이성은 격한 감정의 파도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어둡고 탁한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거의 일년 간, 수도 없이 꿈을 꿨던 장면이었다. 그녀를 이 두 손안에 다시 안게 되는 날을 바라고 또 바랬었다.

죽는 날까지 두 번 다시는 가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손 안에 있었다. 그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 그걸 눈 앞에 두고 지석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갖겠어. 그녀가 싫다고 해도, 가져야겠어.

비틀린 욕망만이 그의 의식을 가득 채워갔다. 커다란 손으로 봉긋한 가슴을 쥐고 마음껏 주물렀다.

억눌린 듯,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덩이의 촉감이 취할 것처럼 그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엄지 손가락을 매끈한 피부와 브래지어의 와이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둥근 곡선을 옆으로 쓰다듬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

작은 신음소리에 지석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운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냉철한 이성을 털어냈다. 뜨거운 입술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의 손이 브래지어를 위로 밀어 올렸다.

엄지 손가락의 끝부분이 구슬 같은 정점을 건드리자, 로운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손이 머뭇거리다 그의 얼굴을 향했다.

지석은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꼿꼿해진 젖꼭지는 거친 손가락 사이에서 비틀렸다. 로운이 발작적으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휘었다.

“아... 지석씨...”

목덜미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깨물고, 아래로 내려왔다. 로운은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몽롱하고, 몸은 그를 원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다리 사이가 서서히 젖어 드는게 느껴졌다. 마침내 드러난 젖꼭지가 뜨거운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로운의 몸은 크게 뒤쪽으로 휘었다.

“하아악,”

참지 못한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예민한 돌기에 휘감기는 뜨겁고 축축한 혀의 움직임에 로운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입술로 세차게 가슴이 빨아들여지는 순간, 로운은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잊고 있었던 예리한 감각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짜르르, 위쪽을 향해 타고 올라왔다.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위로 모여들었다. 불덩이가 비벼대는 듯한 감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대고 문질렀다.

통증처럼 예리한 전율의 예감에 로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리를 꼬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높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아, 아아, 안 돼! 제발, 안 돼!”

그녀가 울부짖으며 안 된다고 외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지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건전지가 다한 인형처럼 온 몸의 긴장을 풀었다.

“걱정 마... 억지는 안 써...”

지석은 로운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만을 몰아쉬었다. 심장에 직접 쏟아 부어지는 듯한 그 뜨거운 숨결에 로운은 머리마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강철 같은 팔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으스러뜨릴 듯 단단히 조였다가 다시 서서히 힘을 풀었다. 그의 호흡이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욕망에 휩쓸려 내몰았던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로운의 옷과 흐트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지석의 머리는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지금 뭘 하려고 했는지 떠올렸다.

강간?

그는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메마른 기침소리와 함께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부글 부글 끓어오르게 했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몸을 바로 세우고, 단추를 채워줬다.

떨어져 나간 단추 자국을 보던 그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뭔가를 참듯 각진 턱이 불끈 거리고, 다시 기침 소리가 터졌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셔츠 부분에 닿자 로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지석은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군.”

사과하는 지석의 목소리는 탁하고 심하게 갈라졌다. 그는 한쪽 입술에 비릿한 웃음을 물고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현관 문을 한 뼘쯤 열어주었다.

“이제 알았겠지? 다시는 호랑이 굴로 찾아오지 마.”

그는 그녀가 나가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현관 앞에 혼자 남겨진 로운은 양손으로 코트 깃을 잡고 목까지 여미었다. 이대로 이곳을 나가 버리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철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쪽을 등지고 창가를 향해 서 있던 지석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려나갔다.

또 다시, 그녀가 가버렸다.

목줄기가 간질거리고,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지석은 반사적으로 양복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을 꺼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술과 담배가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줄줄은 몰랐다. 입술 사이로 담배를 끼우고 불을 붙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니코틴의 효력이 혈관을 타고 흘러드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피잉 돌았다. 눈 앞이 아찔하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발 밑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퇴원할 때, 의사로부터 주의사항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당분간 술도 담배도 절대 금지라면서, 또 다시 응급실에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무거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몽롱한 상태가 견디기 더 쉬웠다. 그래서 술과 담배를 시작했던 게 아닌가.

그 때였다. 갑자기 뒤 쪽에서 가느다란 팔이 뻗어 나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등줄기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뭉클한 촉감에 지석은 손을 멈췄다. 몇 초 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는 허리에 손을 잡고 풀어내려 했다.

로운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꼭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왔다. 그녀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알수 없었다.

“무슨 뜻이지?”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가 내뿜어졌다. 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늘게 떨리는 몸과 그의 어깨를 적시는 눈물만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가.”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그래도 로운이 움직이지 않자, 무겁고 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난 당신을 보내지 않을거야.”

어깨에 대고 있던 그녀의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보내지... 않아도 돼요.”

지석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이러는 건가?

하지만, 희미한 불씨가 그의 마음속에 타올랐다. 그녀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또 다시 버려지더라도 움켜잡고 싶다는 유혹이 그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를 손에 쥐고 흔드는 장난감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석은 담배를 손으로 비벼 끄고는, 강한 힘으로 그녀의 팔을 풀어낸 뒤, 뒤로 돌아섰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복잡한 심경으로 로운을 쳐다보았다. 달빛 속에서 눈물에 젖어 하얗게 반짝거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콱 잠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로운은 자신에게도 묻고 있었다. 그가 말한대로, 떠난 건 그녀였다. 그가 잡아주지 않는다고 억지를 썼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가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을 때, 그녀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일분 일초가 길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마치, 판사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이었다. 그에게 단 하나뿐인 치명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열망이 벽에 부딪히자 그녀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악연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는 틀렸다. 그는 더 이상 날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녀를 보면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

그럼, 그땐 무엇으로 그를 잡아둔단 말인가.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단숨에 설명할 수 있겠는가?

침묵은 영원처럼 길었다. 로운은 자신을 태울 듯이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부모님 얘기부터 해야겠지.

“난... 당신이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화가 난 것 뿐이에요.”

아!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로운은 당황했다.

그는 날 속 좁고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아니...”

그녀가 안절부절하며 꺼내려던 다음 말은 그의 입술에 가로 막혀 버렸다. 거칠고 난폭한 키스였지만,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혀에 자신의 혀를 갖다 댔다. 독한 담배냄새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석은 그녀의 혀를 뿌리째 뽑아버릴 듯이 깊숙하게 빨아 들였다.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누구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지석은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밤의 융단처럼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한 줌 집어 올려 키스했다.

뜨거운 손이 코트를 벗겨냈다. 셔츠 단추를 조용히 풀었다. 밤의 찬 공기가 달아오른 어깨에 닿자 로운은 흠칫, 몸을 떨면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잊고 있던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지석이 새까만 눈으로 그녀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했을텐데? 돌아가기엔 늦었어.”

노기에 찬 눈빛을 보면서 로운은 움찔했다.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니... 당신 오늘 퇴원했잖아요.”

로운은 그의 손을 놓고, 걱정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이 뜨거운 이마에 닿았다.

“음...”

어질거리던 머리에 시원한 감촉이 닿자 지석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소름이 오싹 돋을만큼 기분이 좋아서였다.

“거기다 이렇게 열까지 나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지석은 이마를 짚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입술까지 내렸다. 손가락 끝에 키스한 뒤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눌렀다. 혀로 오목한 곳을 간질이자 로운이 손을 빼내려 했다.

“읏, 간지러워요.”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한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자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낙인을 찍듯, 손목으로 올라온 입술이 팔과 어깨를 지나 그녀의 입술로 되돌아갔다. 로운은 그의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가 걱정스러웠지만, 곧 불같은 열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홀린 듯이 그녀를 보고 있는 뜨거운 눈빛과 마주치자, 그저 침을 꿀꺽 삼켰을 뿐이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체중을 실어왔다.

긴 손가락이 단단하게 뭉친 가슴을 쓰다듬었고, 구슬처럼 솟아오른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그녀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석을 보면서 무심코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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