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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에 로운이 하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종영되었다. 마지막까지 생방 촬영으로 힘들긴 했어도 시청률이 좋아 다들 웃으며 끝낼 수 있었다.
남녀 주연배우의 완벽한 케미가 시청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기사가 다음날부터 쏟아져 나왔다.
조연이었던 서민재는 가장 핫한 배우로 등극했고, 로운은 각종 루머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멜로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다들, 연초에 드라마가 끝났다는 걸 아쉬워했다. 연말이었다면, 당연히 이로운이 또 한 번 연기대상을 받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때를 기다린 듯,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핑크빛 염문설들도 나왔다. 이로운의 결별 원인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인 황기린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촬영이 끝난 후, 두 사람 사이를 묻는 연예 리포터들 질문에 로운은 그저 아니라는 말과, 가벼운 웃음으로 일관했다.
일상은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녀의 마음 속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로 회오리쳤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이는 모양이다.
-역시 여자는 사랑을 해봐야 멜로의 여왕이 되는 거야. 사랑도 하고 실연도 하고, 그게 연기에 녹아드는 거지.-
윤서조차도 그녀가 연애 한 번 하더니, 만렙이 되었다고 놀릴 정도였다. 모처럼 하는 통화였다.
로운은 잠자코 있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은 그녀에게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석이 왔었고, 그때 헤어졌다고만 말했었다.
“민재씨 또 드라마 한다며?”
그녀는 안전한 주제를 택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피하는게 상책이라는 현실도피적인 성격이 이런 때는 빛을 발했다.
-응 Htv꺼, 작년에 니가 하기로 했다가 깐 윤정희 대본, 서창인이 편성 받았다더라. 여주인 정신과 의사역은 인혜 언니가 할 거래.-
“잘 됐네.”
-그래서 강지석한테 자문 얻으려고 연락 했더니, 병원에 아예 안 나온다든대. 정말이야?-
“...나도 모르지.”
그녀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가슴이 메일 듯 아파왔다. 무릎을 세우고 가슴에 꼭 끌어안아도 통증은 가시지 않는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강지석의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강지석은 무슨 회사 다닌다며? 인혜 언니가 그리로도 전화했대. 그 여자, 그런 건 또 집요하잖아. 근데 아파서 출근 안 했다면서 피하더래.-
“아프다고?”
로운은 무릎에 댔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어디가 아프대?”
-핑계지. 진짜겠냐? 기사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너 때문이라도 이쪽이랑은 연관되기 싫어서 그런 거겠지.-
정말 그런걸까?
-하여간 다음에 다시 통화하자. 너 종방연 간다며. 어서 준비해.-
“으응...”
아프다니, 혹시 며칠 전, 찬 바람 때문에 감기라도 걸렸나?
로운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윤서가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 동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사람 걱정을 하는 거야. 어차피 끝난 사인데...
종방연에 참석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온 로운은 영화 촬영장에서나 봤음직한 거대한 카 트레일러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랫만입니다, 이로운씨.”
“최 대표님?”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폭스 엔터의 대표인 최지훈이었다.
폭스 엔터는 여러 분야에 손을 대고 있었고, 배우를 케어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기에, 로운이 폭스의 대표인 최지훈과 만날 일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 그는 어릴 때부터 헐리웃에서 연기를 한 까마득한 선배기도 했다. 이제는 연예인이라기 보다는 경영에만 손을 대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직감적으로 그녀는 지훈이 이곳에 온게, 일 때문은 아닐 거라고 느꼈다.
지훈은 사실, 아내인 리언의 등쌀에 떠밀려 나온 것이다. 리언은 아직도 그 놈의 게이 오라버니라면 어찌나 벌벌 떠는지, 눈꼴이 시어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척추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뻣뻣하기만 하던, 강지석이 한 여름 뙤약볕, 강가의 늘어진 풀 마냥 비실거리는 건, 그도 못 볼 노릇이었다.
거기다, 같이 반주 몇 번 했기로소니, 강지석이 그러는게 마치 그의 악행인양 몰아가는 리언의 비난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종방연 가는 길일텐데, 모셔다 드리죠.”
“아, 제 차가...”
“로드보고 끌고 오라고 하세요.”
지훈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로운은 하는 수 없이 그의 호화로운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럭셔리 호텔 객실 수준의 내부였지만, 로운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최지훈의 유별난 아내 사랑은 이미 몇 번이나 기사를 통해 접했다.
거기다 통유리로 막힌 운전석은 방음만 될 뿐, 안쪽의 정황이 고스란히 보이는 구조였다.
드라마에 대한 상투적인 치사를 한 후, 지훈이 입을 열었다.
“제 와이프랑 강지석이 의남매였다는 건 알고 있죠?”
로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최지훈의 아내가 강지석이 끔찍하게 아끼는 오리언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에게 그 얘길 하는거지?
지훈은 그녀의 표정이 확 변하자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여어, 로운씨 그 표정 어쩐지 익숙한데요. 꼭 거울 보는 것처럼. 나도 전에 그랬죠. 두 사람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켰어요.”
지훈은 킬킬거렸다. 그는 로운의 표정에서 자신의 아내인 리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질투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사실, 연기보다는 그 쪽이야말로 자신이 대선배가 아닌가.
“그 쪽 집안이 참, 골 때리는 남매에요.”
로운은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듣기만 했다. 지석에 대한 얘기라면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력이 그런 건지, 둘 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돌아갈 줄도 모르고, 그저 모 아니면 도, 이것 밖에 모르죠. 그래도 리언이는 좀 변했죠. 내가 교육을 많이 시켰거든요.”
지훈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강지석 그 인간은, 도무지 변하지를 않아, 사람을 못 만나서 그런가. 어떻게 육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고집불통인지, 나이도 어린놈이 말도 드럽게 안 들어 쳐 먹고...”
겨우 한 살 차이라는 건 쏙 빼고, 지훈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죽기 전에 연애 한 번 하나 했더니, 아예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어서 다들 초긴장이에요.”
초긴장한건 리언이 뿐이었지만, 지훈은 과장되게 말했다.
“사실, 강지석이 연애 같은 걸 할 줄은 난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그 놈이 여자라면 학을 띠고 싫어해서 우린 다들 그가 독거노인으로 늙어 죽을 줄 알았죠. 그래서 당신과 만난다고 했을 땐, 기절할 뻔 했어요. 보통 여자도 아니고.”
지훈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로운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로운이었으니까. 나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여배우 이미지에 스캔들은 치명적이지. 하지만, 그는 당신의 커리어가 오히려 좋아질 거라고 하더군요. 난 그 말을 안 믿었는데... 진짜 이로운씨 이번에 대박쳤네. 허허,”
지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인간은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질 않아. 점쟁이도 아닌데, 암튼 사람 심리든 정치 경제든, 분석하는 능력 하나는 타고 났죠. 누가 보면 타임머신이라고 타고 갔다온줄 알 정도로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 볼 때면 징그러울 정도에요.”
로운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강지석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슴을 누가 발로 짓밟은 것처럼 지끈, 조여들었다.
그녀는 아픈 속내를 감추고, 도도한 이로운의 표정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최대표님, 그 분 얘기는 그만 듣고 싶어요.”
지석의 투자 안목에 대해 설명하던 지훈이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 보았다.
“아시잖아요. 저희 이제... 끝난 사이라는 거,”
그래, 끝났다. 드라마에 끝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끝은 있다. 이미 끝난 드라마는 재방 밖에는 볼 수 없다. 평생 그 추억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훈은 뭔가 말하려다가 멈칫 하더니,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리언이 처음에 그랬어요. 열애 기사 났을 때, 당신이 독한 것 같아서 싫다고, 난 그 땐, 강지석보다 독한 사람이 어딨냐고 말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알겠군. 이로운 당신 참 독한 여자였네.”
독해?
로운은 딱딱하게 웃었다. 잊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였는지, 거만하고 도도하고 독하다고 소문난 여배우, 그게 이로운이었다.
지훈의 차는 종방연 장소에 다다랐다. 그녀가 내리기 전, 지훈이 말했다.
“그 놈, 지금 강남 병원에 있어요.”
차에서 내리려던 로운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병원에 있다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만 하드니, 결국 사흘 전에 피토하고 병원에 실려 갔어요. 뭐, 폐렴에 위출혈이라고, 운은 좋은 놈이니, 젊은 나이에 '죽지는' 않겠죠. 설마, 쫌 아프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지훈은 죽는다는 말을 은근히 강조했다. 창백하게 질려가는 로운의 얼굴을 보면서 빙글 빙글 웃었다.
“704호에요. 병원에 가든 말든 그건 이로운씨가 알아서 하겠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르니까, 하지만 리언이 강지석에게 그러더군요. 사랑은 드라마가 아니라고,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리라고, 멋지지 않아도 된다면서 야단을 치더군요.”
지훈의 차가 떠나고, 주인공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와 스탭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가 아프다고?
종방연 장소로 가던 로운은 우뚝 멈춰 섰다. 지석이 아픈게 자신 탓 인것만 같았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도의상 외면할 수는 없는게 아닌가.
그날, 추운데 그러고 가서 폐렴에 걸린 거라면...
“아, 잠시만요. 동수야, 잠깐 나 좀.”
그녀는 매니저인 동수를 잡아 끌고 구석으로 갔다. 로운을 담으려는 듯,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여기 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에에? 지금 가신다구요?”
동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아서 설명 잘 해. 정 할 말 없으면 그냥 내가 아프다고 하든가. 키 줘.”
그녀는 차를 몰고 강남병원으로 향했다. 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 때문인지, 아니면 차오르는 눈물 때문인지 시야가 흐려졌다. 최악의 상황이라 극도로 긴장하며 운전을 해야 했다.
로운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병원이라는 특별한 분위기 때문인지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훈이 알려준 병실은 사람들의 출입이 적은 곳이었다.
그녀는 병실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과연 이렇게 그를 보러 오는 것이 맞는 것인지, 더 이상 자신을 흔들지 말라던 지석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병실 문 손잡이를 잡고, 그녀가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오리언이었다.
전에 봤을 때랑은 다르게 앳되고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의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여리디 여린 리언을 보면서, 로운은 자신과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짜 결혼이라는 걸 하면서까지 지켜 주고 싶어했던 누이동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가장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병문안 온 거에요?”
“아, 저는...”
“한 발 늦었네요. 오빠 아까 퇴원했어요. 의사들 말도 듣지 않고, 멋대로 가버렸죠.”
리언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난 남은 짐 챙기러 온 거에요.”
여기 없구나. 로운은 갑자기 맥이 탁 빠져버렸다.
“다시 응급실에 실려올지도 모른다고 다들 말렸는데, 부득 부득 괜찮다고 우기더니 집으로 가버렸어요. 진짜 '죽으려나' 봐요.”
부부끼리는 닮은건지 리언도 '죽는'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럼, 전 이만 갈 께요.”
로운이 돌아서려 하자, 양손에 짐을 든 리언이 다가왔다. 워낙에 리언이 작은데다, 로운이 힐까지 신고 있어서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상당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짐이 좀.”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달리 리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운은 그녀의 양손에 들린 짐을 내려다 보았다. 리언의 체구에 비하면 좀 버거울 수도 있는 부피였다.
“네...”
로운은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나눠들고 두 여자는 결국 주차장까지 함께 내려가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야 한댔는데... 밀린 일이 많다고, 그 회사는 오빠 없이는 안 돌아가나봐요.”
가만히 듣고 있던 로운은 할 말이 없어서 물었다.
“남자들은 좀 그렇죠. 대표님은 안 그러세요?”
리언의 눈이 동그랗게 떴다가 불평하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라 아빠요? 그 사람은 맨날 놀 궁리만 해요. 아니면, 나 괴롭힐 궁리만 하죠.”
로운은 좀 전까지 봤던 최지훈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어요.”
“아, 오늘 만나셨죠?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모습 안 보여요. 유능한 척 하죠.”
리언의 경쾌한 목소리는 사람의 기분을 밝게 했다. 최지훈이 자신을 만나러 온 걸 알고 있었구나. 부부 사이에 비밀이 없는 모양이다.
“정말로 유능한 사람은 오빠 같은 사람이죠.”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로운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오빠는 어렸을 때 부터 내 우상이었어요. 오빠 어머니는 날 입양하고 싶어했지만, 일찍 돌아가신 엄마한테 미안해서 난 싫다고 했어요.”
리언은 강지석과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지석이 말한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였다.
“난 겁이 엄청 많았어요. 세상에 나가는게 너무 두려워서 오빠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고 싶었죠. 오빠도 내가 그렇다는 걸 알았어요. 아라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았어요.”
리언은 그 시절을 떠올리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리언은 지석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해주었다.
지석이 고아원에서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에 대해서 들었을땐, 깜짝 놀랐다. 설마 그렇게까지 심할줄은 몰랐다. 로운은 충격받은 표정을 보면서 리언도 침울하게 말했다.
“나도 양어머니께 듣고는 정말 놀랐어요. 오빠는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완벽한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로운은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학습된 거였어요. 그렇게 자신을 꽁꽁 숨겼죠. 내가 뭘 원하든, 오빠는 다 해주려고 했어요. 그게 오빠가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지석은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했었다.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로운은 멍해졌다.
“오빤 자기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요. 가족이든 친구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해주고 싶어하니까. 본인이 정말 갖고 싶은 게,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를거에요. 오빤... 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서 자기가 갖고 싶은 게 있을 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리언은 차로 걸어가다가 잠시 멈추고는 뜸을 들였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런 오빠가 술을 마시고, 토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난 처음 봤어요. 오빠가 우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해야 당신을 잡을 수 있냐고...”
로운은 리언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서 꽂히는 걸 느꼈다. 그녀는 헐떡이다 겨우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어, 언제요?”
“오빠가 그 정신병자 여자에게 갇혀 있을 때... 당신이 미국으로 떠난 직후에요.”
리언의 목소리에 살짝 비난의 기색이 묻어났지만, 로운은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 전 부터일줄은 몰랐다. 거의 십 개월도 더 된 얘기였다.
“아라 아빠가 충고했죠. 후회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런데, 미국으로 떠났던 오빠가 다시 돌아왔을 땐, 예전보다 훨씬 더 안 좋았어요. 아주 아주 안 좋았죠. 이젠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해요. 거기다 골초까지 돼서... 담배냄새 때문에 아라도 더는 삼촌에게 안 가려고 해요.”
리언은 로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오빠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처음 알았어요. 아무도 오빠를 변하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오빠를 둘러 싼 벽은 너무 높고 두꺼워서, 누구도 깨뜨리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봐요.”
리언이 뭔가를 내밀었다. 지석의 병실에서 챙겨온 짐들이었다.
“괜찮다면, 이것 좀 오빠한테 전해주세요. 오늘은 집에 꼭 들어가 봐야 해서요.”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언이 이틀 전부터 지석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통에 지훈의 불만은 하늘을 뚫을 지경이었다.
오늘 밤에도 집에 오지 않으면, 아라 데리고 가출해 버린다고 협박까지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로운을 병원으로 보낼테니까, 반드시 집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하더니, 정말로 로운이 왔다.
리언은 남편에게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부탁할게요.”
로운은 주저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리언은 살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아마 자고 있을테니까 그냥 들어가요. 현관 비번은 20**0110이에요.”
묘하게 낯익은 숫자... 그건, 스톤과 캔디가 게임 속에서 결혼을 했던 날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