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6)

* * *

이로운의 결별 기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댓글이 가장 많이 달렸다. 계약 연애라는 글도 적지 않았다. 남들 눈에도 두 사람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나 보다.

이걸로 그녀와의 연결 고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기 까지는 마땅히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석은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가 사무실 한 켠에 흡연 부스를 마련한 게, 신의 한 수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25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는 중이었다. 흡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주형이 모습이 나타났다.

“형님. 아니 강이사님!”

“무슨 일이야?”

“기사 뜬 거 봤어요?”

주형이 부르짖듯 말했다.

“그게 뭐?”

지석이 차갑게 응수하자, 움찔하더니 다시 작게 물었다.

“괜찮... 으신거죠?”

지석의 관자놀이가 꿈틀 거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가.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주형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엔간하면 좀 참으시지.'

지난 번에, 회사에 이로운이 나타난 일로 직원들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사무실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주형은 은근히 뻐기면서, 이로운이 곧 형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자랑질을 했었다. 행여라도 지석이 그 일을 알게 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두 사람 사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K&K 직원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K&K 파이낸스 빌딩은 고회장이 지석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년 전에 건립한 국내 최대의 자산관리 센터였다.

리더스폰과 K&K 투자증권 외에도, 금융 자산 30억 이상의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굴지의 금융회사들의 PB(프라이빗 뱅킹)센터가 열 곳이나 모여 있었다.

국내 부자들의 자산을 관리하는 전문 직원들이 100명 넘게 상주하고 있었고, 이들 손에서 움직이는 자산만도 10조원대를 훌쩍 넘었다.

고객의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매일 같이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는 이곳 직원들에게도 강지석은 전설같은 존재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고회장을 비롯해, 몇몇 신흥 벤처업체의 자산을 수십 배로 늘려 준 사실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강지석이 K&K센터의 이사로 전격 취임한 한 달간, 빌딩 내에는 그와 친분을 맺어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거렸다.

지석이 흡연실을 이용한다는 소문이 돌자, 갑자기 센터의 흡연률이 수십배로 뛰는 바람에 결국은 사무실 한 켠에 개인 흡연 부스를 만드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강지석의 위상이 높아지자, 그의 오른팔인 주형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했고, K&K 직원들의 콧대도 높아졌다.

경쟁업체가 몰려 있다 보니, 실적이 부진하면 자연스레 고개들이 떠나기 때문에, 이곳에서 정보란 곧 돈과 직결된다.

오죽하면 증권가 찌라시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곳 사람들은 강지석과 이로운의 연애와 결별도 사업적으로 분석했다.

주형이 밖으로 나오자,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대개, 각 센터의 팀장급 임원들이었다.

“신실장! 강이사 기분이 어때 보여?”

신성증권 이진욱 지점장이 포문을 열자, 다들 한마디씩 했다. 주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난 듯이 말했다.

“역시, 계획된 연애였던 거지?”

“폭스 엔터 주식이 대폭 뛸 때부터 알아 봤지.”

“제가 뭐랬어요. 전략적 제휴였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모여 있던 사람들 중, 유일한 여자인 한일증권 강남CPC센터장 송세영이었다.

전 한일은행장이었던 故 송보국 씨의 증손녀로 한일증권 해외 지사에 있다가 올해, 센터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유일하게 강지석을 대적한 인물이 그녀라며 추켜 세우는 중이었다.

밖에서 어떤 소란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지석은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어제 만났던 로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그는 다시 인상을 썼다.

“어째, 점심시간인데 꼼짝도 안 해?”

고회장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셨습니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로 일어났다. 작년만 해도 풍채가 좋았던 고 회장은 여름에 위 전체를 드러내는 수술을 한 뒤, 몸이 반쪽이 되었다.

위암은 고씨 집안의 가족력이었다. 지석의 양어머니인 고경희도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와 고회장인 육촌간이었다. 아들이 없는 고회장이 그를 친자식처럼 끔찍하게 아끼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비록, 혈육으로 맺어지진 않았지만, 고회장에게 지석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강회장과, 자신의 육촌 누이인 경희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자신의 두 딸이 미모와 지성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 있었어도, 그는 지석을 사위로 삼기 위해, 무슨 노력이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딸들과는 맞지 않는 짝이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평범한 여자에게는 갖다 줘도 못 먹을 음식이 강지석이란 놈이었다.

“이로운이랑 연애 한 거 아니었냐?”

고회장은 지석의 맞은 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앉으며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긴, 너 인마, 연애 비슷하게는 했잖아.”

지석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서류를 뒤적거리는 척 했다. 노친네가 나이가 들더니, 어째 자신의 일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지는 눈치였다.

“한가하시면, 주형이 부를까요? 사우나 좋아하시니 모시라고 할께요.”

“됐어. 내가 너 보러 왔지. 신실장 보러 왔냐? 근데 들오다 보니, 한일에 송세영이 고것도 여기 와 있더라. 너 보러 온 거지?”

지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저 오기 전에 센터 들어 온 걸로 아는데요.”

고회장은 다 안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너 올 줄 알고 들온거야. 척 보면 알지. 이상하게 올해 여기 여성 PB들 비율이 높아졌다드라. 것도 간부급들로...”

고회장은 슬쩍 지석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 불금인데, 약속 없냐?”

“일 많아서 야근해야 합니다.”

“거참, 젊은 놈이 뭔 일만 하고 사냐?”

고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의사할 때도 그랬어? 안 그랬잖아. 그땐, 일주일에 사흘만 병원가면서도 일 잘했다. 왜 갑자기 워커홀릭질이야?”

“일하는게 뭐가 어때서요?”

“어떻냐니! 청춘이 아깝잖아. 청춘이!”

고회장은 마치 자신의 나이라도 되는 양, 인상을 썼다.

“나이 들어 뼈에 바람 솔솔 들어봐라. 늙어 후회한다. 마누라도 없지, 자식도 없지, 돈을 태산같이 쌓아놔도 같이 쓸 사람이 없으면 말짱 헛거라니까. 인생 헛사는거야.”

고회장이 침을 튀기며 말하자 지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프실만 하네요. 수술하고 나셔서 더 정정해지셨습니다. 인생의 진리도 깨달으시고... 회장님 수술집도한 의사 제 친굽니다. 확실히 잘하죠?”

“에잉, 말귀 못 알아듣는 놈! 저녁에 시간 비워.”

고 회장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협회에 또 모임 있습니까?”

지석은 고회장은 가끔 그를 아들 삼아 자랑하듯 데리고 나가는 경제인 협회를 떠올렸다.

“늙은이들은 봐서 뭐하려고, 너 여자 한 번 만나 봐라. 신일 황 회장 막내딸이 귀국했다는데 유명한 플루티스트야. 아주 참하다드라.”

고회장이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바쁩니다. 야근해야 된다니까요,”

지석이 단칼에 자르자, 고회장의 턱살이 실룩거렸다.

“야! 이 눔아! 니가 이러니 여즉 남색질 한다는 소문이 도는 거야. 정신과 의사라 정신병자만 꼬인다는 소리가 없나, 고자라는 소리가 없나. 다들 니 놈이 병 있는 줄 알어.”

세간의 소문이 어떻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고회장이 저러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본인의 인맥은 물론이려니와, 고회장 처에 이미 시집 간 두 딸들 까지 나서서 지석을 결혼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럼 사내 연애라도 한 번 해 봐라. 송세영 말고도 많잖아. 리더스폰에 이주은, 걘 어떠냐? 아주 참한 아가씨지.”

“계속 여기 계실거면, 전 외부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지석이 그를 피해 달아나려고 하자, 고회장은 인상을 구겼다.

“에라, 못난 놈! 고집도 어지간해야지!”

고회장이 호통을 치는 소리에, 문이 덜컹 열렸다 닫히는 것처럼 흔들렸다.

고회장이 입에 침을 튀겼다.

“여복이 없어도 니 눔처럼 없으려고, 민며느리 삼으려고 데려온 건, 다른 놈한테 뺏기고,”

“리언이는 제 여동생입니다.”

지석은 언짢은 듯 말했다.

“원래는 니 처였잖아!”

“혼인 무효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남 좋은 시켰다고 하는 거다. 장가를 갔으면, 잘 지켜야지. 왜 다른 놈 한테 뺏겨, 뺏기길... 니가 보살이야?”

고회장도 그 때의 사정을 다는 몰라도, 대충은 알았다.

“아무리 밸이 없어도 그렇지, 제 아내 였던 여자를, 떡하니 혼인무효까지 시켜 다른 놈한테 시집 보내는 건, 내 이날 이때까정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다. 그 때부터, 니 눔 팔자에 홀애비살이 낀 거야.”

한 번 흥분하면, 여간해서는 멈추지 못하는 고회장의 입버릇을 알고 있기에, 지석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제풀에 지치실때까지 그냥 두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고회장이 혼자서 떠들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이사님.”

그때, 지석의 비서인 문희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김인호 팀장님이 보내신 서류입니다.”

지석은 서류를 꺼내자 마자 안색이 흐려졌다. 로운의 자산 관련 서류들이었다.

“김 팀장, 아직 밖에 있어요?”

“팀장님이 아니라, 이로운씨가 직접 오셨는데...”

“누구?”

“이로운 씨요. 제가 들어가시라고 했는데, 손님 계신 것 같다면서, 그냥 맡기고 가셨어요.”

“갔다구요?”

지석은 고회장을 쳐다보았다. 고회장이 찔끔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 갔지?”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문희가 바깥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방금 전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셨어요.”

지석은 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고회장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런 지석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놈, 저거...”

주형이 지석과 교대하듯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강이사님은 어디 가시는지? 곧 팀장급 회의 있는데요.”

고회장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콧방귀를 꼈다.

“아닙니다? 터진 주둥아리라고, 말은 잘 한다. 아니긴 개뿔 뭐가 아냐.”

“예?”

주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고회장은 지석이 뛰어나간 쪽을 보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가자.”

“어딜요?”

“회의라며, 나도 가.”

고회장이 나가고, 주형이 그 뒤를 따라가다, 문희에게 소곤거렸다.

“이로운씨, 왔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문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주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렇지, 내가 안 끝났을줄 알았어, 전략적 결별인거지.”

“뭐라구 궁시렁 대는 거야?”

“강이사님이랑 이로운씨 헤어졌잖습니까? 직원들이 그걸로 내기중입니다. 진짜냐, 아니냐를 놓구요.”

고회장은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쟤들 진짜 사귄 건 맞아? 같이 있는 사진은 한 두 번 밖에 안 떴잖아. 것도 무슨 공식 행사였지. 아마.”

“맞습니다. 그건 제가 보증합니다.”

주형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넌 어디다 걸었어?”

“저야, 당연히 아니다 쪽에 걸었죠.”

고회장은 곰곰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시 사귄다에 걸어.”

“예? 그럼 정말 헤어진게 맞단 건데요?”

주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자식이 안 하던 짓 하는 거 보면 몰라? 갑자기 술 쳐 먹어, 담배 펴, 죽기로 작정한 놈처럼 일만 파잖아. 이럼 답 나오지, 헤어진 건 맞다. 것도 아주 대차게 차인거야.”

고회장은 늙은 생강처럼 말했다.

“설마요...”

주형은 설마, 이로운이 지석을 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헤어졌다면, 그 반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하던 강지석이니, 이번에도 그랬을 거라 여겼다.

지석이 로운의 일을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빚보증 청산부터 시작해서 이로운을 건드리는 놈은 하나도 봐주지 않고, 박살을 낸 것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설령, 로운이 그런 걸 다 모른다고 해도, 강지석을 찼을 줄이야... 게다가 그가 봤을 땐, 이로운 쪽에서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역시, 여자란 요물이다. 그 중에서도 이로운은 꼬리가 한 백개 쯤 달린 여우일 것이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운은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뭔지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강지석이 누구와 혼인무효를 했었다고?

여동생이라면 오리언?

여자는 모른다고 했었다. 그녀가 처음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거짓말이었나?

로운은 이 순간, 강지석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알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다시 찾아온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누군가 차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옆 차량의 주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때 차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나?”

로운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나야.”

그녀는 옆 좌석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남자를 보았다. 강지석이었다. 지석은 그녀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미간을 찡그렸다.

“설명이 필요하군.”

그는 로운이 아직도 차 키를 꽉 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딱딱하게 말했다.

“내가 운전하는게 낫겠어. 내려.”

반사적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로운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할 말 없어요.”

그녀는 지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굉장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설마, 지석이 결혼했었을 줄이야... 그것도 그의 여동생과!

“난 있어!”

지석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난 신경 안 써요. 당신이 누구랑 결혼했었든지간에.”

그녀가 비웃는 듯이 말하자, 가라앉아 있던 지석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착잡한 어투로 말했다.

“오해야.”

“내 귀로 분명 들었어요.”

그녀는 꿋꿋하게 대꾸했다.

“그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지석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다시 말했다.

“설명하게 해 줘, 동생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야.”

로운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내 앞에서 여동생의 명예를 지켜 주고 싶다고 말한 거야?

그녀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화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요, 그럼. 듣죠.”

로운은 우아하게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올라탔다. 표정 하나, 시선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꼿꼿하게 등을 펴고 앉아서 전방만 주시했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고, 나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언이는 나랑 같은 고아였어... 세상에 겁이 많았고, 그래서 지켜주고 싶었던 내 여동생이었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여동생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했던 일이지만, 그녀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국 모든게 제 자리를 찾았다는 얘기였다.

지석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짧은 얘기와 긴 침묵 끝에 로운은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다다른 것을 알았다. 운전 중에 그가 주소를 물어, 새로 이사한 집 주소를 말해 주었다.

좀 더 뜸을 들이다 말해줬어야 했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거나... 그녀는 아주 잠깐 후회했다.

“들어가.”

지석이 내려 차 키를 건넸다. 로운은 그가 셔츠에 조끼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망설이다 말했다.

“당신은? 잠깐 들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지석이 말했다.

“그럼.”

로운은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전에는 멋지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넓은 등이 왜 이렇게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걸까?

언제나 오만하기만 했던 강지석이 왜 저런 모습인거야? 마치, 꼭 실연당한 사람 같잖아! 실연당한 건 난데!

그녀는 가슴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앞을 가로 막았다.

“차, 당신이 가져가요.”

그에게 키를 내밀었다.

“주형이 보고 차 가져 오라고 하면 돼.”

그는 로운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말투도 표정도 변함없었지만, 반년 전보다도 훨씬 더 야위었다.

시린 겨울 햇살이 유난히 도드라진 광대뼈 아래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 그를 더욱 우수에 차보이도록 했다.

“왜...?”

로운은 가슴이 아려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술, 담배 같은 거 안 했잖아요. 당신이 그러니 다들 오해 하죠.”

지석의 모습은 꼭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오리언이 그런 오해도 하는거고,

로운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오해 받기 싫어서 묻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도 오해가 싫어서 자신을 따라왔다고 했으니까. 이런 말 정도는 물어도 될 것이다.

“오해? 뭘 오해해?”

그의 목소리가 겨울 바람처럼 차갑다.

“마치 나랑... 헤어져서 그런 것처럼... 다들 내가 당신을 버린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닌데...”

로운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찬 공기를 가르며,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어째서, 그게 아니라는 거지?”

그녀는 말이 막혀 잠깐 멈칫했다. 로운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애초에 연락하지 말라고 한건 당신이었어요.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발끈해서 말했지만, 사실 이건 억지였다. 그 때, 지석은 유라희에게 감금당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기부터 말을 해야 했다. 자신은 그가 갇혀 있다는 걸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연락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석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그가 납치 감금 되었던 그 사흘 만에 그녀는 사라졌다.

“아버지 때문에...”

십여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 이건 변명으로는 너무 빈약하다. 요점은 이게 아니다. 로운은 입술을 잠깐 깨물었다가 빠르게 쏟아냈다.

“물론, 헤어지잔 말을 한 건 나지만, 당신도 막지 않았잖아요. 내가 그런 말 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 버린 건 당신이에요.”

결국, 진실은 그것이다. 그는 자신을 잡을 만큼 원하지 않았다.

“그럼, 날 버리지 말라고 빌기라도 했어야 했다는 건가?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였나?”

지석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낮고 덤덤한 톤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로운의 머릿속을 강하게 내리쳤다.

지금 저 사람이 뭐라고 말한거지? 빌어?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면, 당신이 정말 내 옆에 남아줬을까?”

무거운 말들이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로운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애원하다니, 자신이 바란 건, 그저...

한참만에야 지석이 다시 말했다.

“지금 내가 애원하면... 다시 올 건가?”

그가 애원한다고? 저 강지석이? 로운은 그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로 뭐였을까?

지금까지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고만 생각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원인은 그에게 있다고, 자신이 그를 더 많이 좋아하고, 그는 그녀만큼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소리도 안 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잡았으면 헤어지지 않을 생각이었나?

아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로운은 사실 한국을 떠날 때부터, 그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듯, 아버지 곁으로 갔던 거다.

부모님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 밉보이게 되는게 두려워서, 차라리 그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 없이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자 지석의 눈빛은 실망과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었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그걸 말해주면, 문제가 없을거라 기대했지.”

로운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그렇게 말했었다. 미국까지 찾아와서 그녀에게 괜찮다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그의 말이 뭘 뜻하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들을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가혹한 운명을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지.”

지석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 옆에 있었을 거야. 그럴려고 간 거였으니까.”

지석의 그녀의 곁을 맴돌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참혹하게 짓밟혔던 자신의 마음을...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녀의 이별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바랐다. 로운이 이 모든 일을 흘려 보낼 때까지 자신이 더 기다렸어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서 그 녀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생각해주기를, 그래서 예전처럼, 어느 날, 그의 일상으로 들어와 주기를,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면, 그녀가 그곳에 있기를, 바라고 또 소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를 버려두고 떠나버렸다. 지석은 그제서야 자신의 짧은 꿈이 끝났다는 것을, 그녀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난...”

로운은 목이 잠긴 것처럼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서도, 날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더군.”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무뚝뚝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한 마디 한 마디 쥐어짜내듯, 억지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알량한 사랑 놀음에 어울려, 몇 번이나 더, 버려져야 하나?”

사랑 놀음?

로운은 그가 내뱉은 말에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을 뻔 했다. 지석의 양 손이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강철 집게로 조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드러내듯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캔디였을 때부터 난 말했었어. 날 내버려두라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어째서 그러지 않았지? 왜!”

그는 비통에 빠진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어째서 나한테... 내가 당신에게 빠져 허우적 거리는게 재밌었어?”

로운은 그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기가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지석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그저 하얗게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당신이 원하는 건, 그저 해보지 못한 사랑에 대한 환상 같은 거였다는 걸. 금방 식어버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눈에 보였지.”

그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는데도 기대했어. 바보처럼.”

지석은 천천히 손에서 힘을 빼냈다.

“어쩌면, 당신은 날 버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순간이나마 착각했었어.”

로운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정반대가 되어버린 상황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아니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고작해야 사과를 할 뿐이었다.

지석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사과할 뿐, 그와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몰랐어요.”

로운은 뭐가 잘못 됐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급급해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버려지는게 가장 두렵다는 사람을 몇 번이나 버려두고 온 것은 자신이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의 입술에서 딱딱하게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더는 나를 흔들지 마.”

뚝뚝, 얼음을 씹어 뱉듯 잇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얼려 버릴 것만 같았다.

로운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멀어지는 그의 그림자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 끝이 닿은 아스팔트에 작고 검은 물방울들이 점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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