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46)

제 9장 - 변화

* * *

“반갑습니다. 이로운씨.”

로운은 일부러 'K&K 투자금융'에 온 것이 아니었다. 마침, 그녀는 마땅한 자산관리회사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소속사와 동료 연예인들에 물어본 결과, 이곳을 추천받아서 온 것이었다.

넓고 쾌적한 사무실로 안내 받은 뒤, 고액자산 전문 관리 담당이라는 젊은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 이사실이 고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강지석 이사님께서는 회장실에 계십니다. 오셨다고 연락드릴까요?”

젊은 남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 그 사람을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상담을 좀...”

로운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둘러 손을 내저었지만, 젊은 남자는 시종일관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가까운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아직도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급하신 일이면, 제가 도움이...”

젊은 남자는 초초한 표정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자산관리사님이 해주시면 돼요.”

“하하, 그럴수야 없죠. 이쪽은 강이사님께서 워낙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시는 분야거든요. 회장님의 신뢰가 아주 두터우셔서, 억지로 끌어들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의사만 하시기에는 정말 아까운 재능이죠. 저희들은 마이더스 이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하하, 근데 저, 정말 예쁘십니다. 저희 이사님과 잘 어울리세요.”

젊은 남자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연신 바깥쪽에 시선을 주었다. 강지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곳에 계속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로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편해졌다. 이건 그냥 일적인 부분이었다. 오늘 상담을 한 후에는 두 번 다시 이 곳에 올 일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서류 봉투를 올려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제 전 회계사님에게 서류를 부탁드렸어요. 여기 이것들이에요. 살펴보신 후에 연락 주세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운은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다시 인연을 이어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돌아와 버렸다.

* * *

“누가... 다녀 갔다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지석은 잘못 들었는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김인호는 로운이 주고 간 서류 봉투를 그의 책상에 내려 놓았다.

“이로운씨가...”

이런 건, 둘이 사적으로 얘기해도 되지 않나, 이렇게 공적으로 처리하다니, 역시 있는 사람들은 일 처리 방식도 다른 모양이군... 공사를 구분 하는 이런 점은 배워야 해.

“하하, 제가 기다리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바쁘시다면서... 직접보니까 진짜 무척이나 아름다우시더라구요.”

요즘 들어 다이어트를 하는지 부쩍 더 날카로와진 지석을 보며, 김인호는 정말로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고 생각했다.

지석은 젊은데다 외모도 연예인급인데, 몸매마저 연예인들처럼 가꾸는 모양이었다. 마른 근육질이 요즘 여자들 로망이라던데 나도 당장 헬스 클럽에 등록해야겠어. 어디 다니시는지 살짝 물어라도 볼까.

“이건 뭐지?”

지석은 서류 봉투 위에 붉은 색의 작은 카드 지갑을 보며 물었다.

“가시고 난 후에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데요. 아무래도 이로운씨가 흘리신 거 같습니다.”

아직도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군.

그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설마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온 걸까? 그의 눈에 찰나간 빛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차갑고 쓸쓸한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다시 인연이 얽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한 번 끊어진 인연은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한 후에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또 다시,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는 그를 흔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 * *

“로운이 넌 확실히 연기가 깊어졌다 작년이랑 확 달라.”

극 중에서 남주의 어머니로 나오는 신혜옥이 로운을 보며 말했다.

혜옥은 후배 연기자를 칭찬 하는 법이 별로 없는, 까다로운 선배 연기자였다. 느닷없는 칭찬에 로운은 살풋 미소를 띠었다.

“아이, 그거야 선배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그렇죠.”

“아냐 아냐, 전에는 똑같은 연기를 해도, 뭔가 좀 밍숭맹숭, 니맛도 내맛도 아닌 그런게 있었는데, 이젠 완전 물이 올랐어. 아까 눈물 연기 좋드라.”

혜옥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송피디가 거들었다.

“이로운이 작년에 일이 좀 많았어요. 그러니 그렇겠죠. 이제 감정이 쭈아악 차오르는거지.”

“그래, 확실히 연기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경험이 많아야 깊고 풍부해지지.”

혜옥이 맞장구를 치는데, 스탭 중 한 사람이 로운을 불렀다.

“로운씨, 누가 찾아왔어요.”

누구지? 기자인가?

방송국 세트장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기자가 가장 많기 때문에, 로운은 흔쾌히 일어섰다. 사라졌던 그녀의 새 코디 지영이 눈을 반짝거리며 달려왔다.

“언니, 언니, 대기실에 그 분 왔어요. 우와, 나 완전 심쿵했잖아요. 연예인이줄 알았어. 완전 짱 멋있어! 짱 멋있어! 사진보다 백배 근사해요. 그동안, 외국에 나가계셨다면서요. 어쩐지이, 내가 왜 안 보이나 했어.”

그 분? 로운은 잠시동안 그게 누구인지 생각하느라 멍해졌다. 지영의 호들갑에 주위에서도 관심을 가진 듯, 그녀를 힐끔거리며 농담을 했다.

“뭐야, 이로운씨 애인 왔나 보네. 우리도 궁금했다. 자기 애인.”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 좀 보여 봐.”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우 이 오지랖!”

동수가 지영의 옆구리를 세게 치자, 지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하얗게 떴다.

“매니저 오빠, 나한테 관심 있어요? 옆구리 좀 그만 찌르지?”

동수는 답답한 듯, 지영을 노려보다 다급하게 말했다.

“누, 누나, 제가 대신 나가볼까요?”

로운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나 만나러 온 사람인데 왜 니가 가.”

대기실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강지석이었다. 반듯한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정면의 거울을 통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과, 한결 날카로와진 턱선이 예전보다도 그를 훨씬 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그녀는 진땀이 솟아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여기까지 어쩐 일일까? 혹시 지난 번에 내가 찾아갔던 일 때문인가?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평범하게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건네면 되는거야.

“지...”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했다.

“이로운씨께 전할 물건이 있습니다.”

이로운씨?

정중한 호칭에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병원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올랐다.

지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작은 가방을 건네 주었다.

“촬영 때문에 바쁘실텐데, 매니저에게 그냥 주고 갈 걸 그랬군요.”

로운은 당황스러워서 그가 내민 종이 가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붉은 가죽으로 된 카드 지갑과, 그녀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몇 개의 소소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짝을 잃은 귀걸이와, 하이난에서 함께 샀던 구슬이 달린 팔찌도 있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얼굴을 가리려고 준비했던, 큰 스카프도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번번히 자신의 물건들을 흘리고 오곤 했다. 그가 몇 번 챙겨줬지만, 다음에는 또 다시 그녀의 물건을 두고 왔다.

“지난 번에 저희 회사에 떨어뜨리고 가신 물건과, 그 전에 두고 가신 물건들입니다. 진작 돌려줬어야 하는건데, 늦었습니다.”

그의 말투는 지나칠 정도로 깍듯하고, 또 차가왔다. 자신이 일부러 흘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로운은 무안한 어투로 주저하듯 물었다.

“이걸... 전해주러 오신 건가요?”

무표정한 눈동자가 그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마침,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유능한 자산관리사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소속사에서 관리 해주는 팀이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다. 로운은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개인적으로 좀 투, 투자 해보려구요.”

“제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과거를 생각해보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쪽으로 전혀 문외한이었다.

“투자는 투자자 본인도 어느 정도 지식과 정보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덜컥, 큰 돈을 남에게 맡겼다가 수익이 안 나면, 그때 가선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안전한 은행권이 나을 것 같군요.”

그의 음성은 차분해서, 누가 듣는다면,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속이 상했고, 마음이 아려왔다.

아무리 그들이 사귀다 헤어진 사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안부 인사 정도는 할 수도 있는거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아직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였다. 지석이 시종일관 차갑게 나오자, 로운은 저도 모르게 울컥 해서, 말했다.

“겨, 결별 기사, 나갈 거에요.”

몇 초간, 지석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다가, 다시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 편이 낫겠군요. 언론에 밝힐 내용에 관해서는 폭스 쪽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로운은,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낯선 사람처럼 변한 지석은 상대하기 어렵다. 그의 별명이나 이름처럼 한 겨울 강가의 차디찬 돌멩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걸 왜 제 소속사랑 해요?”

그녀는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석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그럼 누구와 합니까?”

“저랑 관련된 일이니까 당연히 저랑...”

“이로운씨!”

지석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피차간에 서로 다시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 정도의 인연이었으니까요.”

로운은 움찔해서 그를 쳐다 보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정도의 인연... 두 사람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오늘 이곳에 왜 직접 온 걸까?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면 매니저에게 맡기고 가도 됐을텐데... 왜 굳이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당신은... 오늘 여기 왜 왔나요?”

대기실에 그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로운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서, 문을 열기 전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녀의 착각이었다. 지석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남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긴 전, 로운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아 있는...도 같이 돌려주세요.”

지석은 문 손잡이를 잡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제게는 남은 물건이 더 없습니다. 다른 곳에 두셨을 겁니다.”

천천히 닫히는 틈으로 그의 모습이 멀어지는 걸 보면서, 로운은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한숨을 쉬듯 작은 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듣지 못할 만큼 가녀린 목소리였다.

“내 마음이요...”

이미 끝난 사이에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가...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조차도 몰랐었다. 그에게 두고 온 마음이 이미 뿌리 깊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걸.

지석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의 냉담함에 결국은 말라죽고 말게 될 마음의 나무가, 아직 거기 있었다.

강지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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