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46)

* * *

하루 하루가 덧없이 흘러갔다. 사랑은 끝났어도, 시간은 흐르고,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었다.

그 후로, 로운은 단 한 번도 지석을 보지 못했다. 그가 이사를 갔나 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새벽이면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신경이 쓰여, 잠을 이룰수가 없었는데, 의외로 그녀의 신경은 생각보다 튼튼한 모양이었다.

그의 차 소리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이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말로는 그와 헤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그와 멀어지는게 싫었는지, 그녀는 틈만 나면, 옆 집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거야 말로, 스토커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실연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한국의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반 년 가까이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해 보자는 반가운 소리였다. 그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일이 필요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로운은 일에 밀려 바쁘게 살았다. 여름에는 CF재계약과 화보 촬영, 영화 촬영, 가을부터는 새 드라마 촬영으로 숨 돌릴 틈도 없는 나날을 보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다시 연말이 되었다. 그녀는 윤서와 서민재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서민재는 로운과 한 드라마에 출연 중이었다. 조연급이었지만, 대중의 인기가 높아 방송가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신인이었다.

“시간 참 빨라. 한 것도 없이 또 한 살 먹었네.”

윤서가 투덜거렸다.

“한 게 왜 없어요? 난 제일 바쁜 한 해 였구만.”

민재가 눈 속에 피어오르는 불꽃을 감추지도 않고 그녀의 말에 응수했다. 사람들에게는 그저 친한 방송가 동료로만 보이겠지만, 두 사람의 일을 다 알고 있는 로운은 윤서의 발을 툭 치며 핀잔을 주었다.

“민재씨 좀 말려, 저러다 너 화상 입겠다.”

시니컬한 로운의 목소리에 윤서가 지지 않게 맞받아쳤다.

“말린다고 말려지니, 저 나이엔 말리면 더 할 나인데,”

로운이 눈꼬리를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그냥 확, 기자들한테 불어 버릴까봐. 서민재 연애한다고...”

그 말에 윤서가 뜨끔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더니, 그녀의 손등을 찰싹, 두들겼다.

“아서라, 너 미친 개인걸 내가 깜박 했어.”

“미친 개? 로운 누나가? 에이 설마,”

민재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물었다. 윤서는 민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뾰로퉁하게 말했다.

“어머, 너 얘가 아무나 보면 물어뜯으려고 하는거 안 보여?”

“아무나는 아니고, 오윤서씨한테만 그런 거 같은데?”

“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니.”

말은 새침해도, 윤서의 눈은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있었다. 로운은 두 사람이 의미 있는 시선을 교환 하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 두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했지만, 어쨌든, 지금 함께 있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윤서는 눈에 띄게 화사해지고 예뻐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윤서의 얘기를 들어주느라, 그녀는 지석의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사실, 꺼낼 만한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은 고작 해야 석달 남짓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불타올랐고,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애초부터 그녀 혼자 화르르 타올랐으니까. 악연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지속할만한 연료가 없었던 것 뿐이다.

몇 개월 동안,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 마음이 돌연, 시려왔다. 그녀는 코 끝이 찌잉해지는 것 같자,어깨에 걸친 코트를 단단히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에 들어서자, 누군가 뒤를 이어 들어왔다.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 같은 여자를 보고 로운은 멍해져 버렸다.

이 여자를 알고 있다. 직접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기사를 찾아봤었다.

오 리언, 강 지석의 의붓남매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여자였는데, 거울 속의 모습은 냉정해 보였다.

남매라서 이런 점은 비슷한 것인가?

“안녕하세요. 이로운씨.”

리언이 먼저 말을 걸어오자, 로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오...”

“오리언이에요. 잘 모르시겠지만, 강지석씨 여동생이구요.”

왠지 말 속에 뼈가 있었다. 로운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열애 기사는 났지만, 결별 기사는 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일수도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로운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두 사람이 헤어진 걸 모른다면, 말해 주어야 하는건가?

아니, 어쩌면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후에 말해도 늦지 않을 거야.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이로운씨는 별로 변하지 않았네요.”

맑지만,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로운은 그녀의 말투에 자신을 비난하는 기색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씁쓸해졌다.

우리가 헤어진 걸 알고 있구나. 그의 소식을 들을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던 자신이 민망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리언이 다시 조용하게 말했다.

“여전히 멋진 연기에요. 애정 연기가 훨씬 더 깊고 풍부해졌다고 다들 칭찬하던데요?”

이번 드라마에서 그녀가 맡은 역은,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 하는 가난한 여주인공이었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감정 몰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연기 이야기를 하는거지? 그에 대한 말을 하고 싶은게 아니었나?

“감사합니...”

“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죠. 오빠한테 하셔야지.”

로운은 어리둥절해졌다. 강지석에게 감사하라는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잘 있겠죠?”

“잘 있느냐구요? 이제야 그게 궁금하다니, 이로운씨는 듣던대로 정말 냉정하시네요.”

리언의 목소리가 참지 못한 듯이 조금 커졌다.

“오빠는 지난 달에 귀국했어요.”

그동안 한국에 없었구나...

차가운 시선이 로운을 향했다.

“다시 오빠를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을 난 영원히 잊을수 없을 거에요. 마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어요.”

리언은 원망하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죠.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취한 모습은 상상도 해본 적 없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로운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취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조차도 그의 그런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지, 이미 반년도 넘게 지났다. 아마 리언은 뭔가 잘못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가 술을 마셨다고 해도,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저 때문은 아닐 거에요.”

로운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날, 지석은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현관을 나가서, 두 번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 인생에 존재 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는 그토록이나 쉬웠던 것이다. 자신과의 이별이.

“당신 때문이 아니라구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술에 취한 오빠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이 헤어지자고 했다던데... 알아요? 오빠가 그렇게까지 좋아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열렬히 좋아했었던 것은...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죽을 만큼 아팠고,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이미 끝난 사이였다.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자신이 맞지만,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가 자신을 잡지 않는데...

그가 쉽게 여자를 잡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불안했고, 결국은 그녀가 예상한 대로 되었다.

지석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했다면, 어째서 떠나도록 내버려 뒀겠는가?

“당신은 몰라요...”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그가 잡아주기를 바랐는지, 하지만, 그는 결정권을 그녀에게 넘겼다. 지석은 부모님의 일을 모른 척 하고, 그녀를 잡을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리언은 그의 친부모님과 그녀의 부모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건, 한 가지에요. 오빠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거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로운은 리언이 했던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오빠는 지금 정상이 아니에요. 미친 사람 같아요.'

로운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까지 그토록 힘들다면, 어째서 그때, 자신을 잡지 않았던 걸까?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리언이 건네 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K&K 투자금융 전무 이사 강지석' 이라고 쓰여진, 명함 뒤쪽에 그녀가 모르는 아파트의 주소가 볼펜으로 써 있었다.

'오빤, 요새 병원에 안 나가요.'

의사가 아니라 이사구나. 뭐, 발음은 비슷하네.

로운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그 명함 속의 이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한 아픔이 손가락을 통해 심장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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