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46)

제 8장 - 기다림

* * *

그리고,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은, 때때로 동물로 살아가고픈 충동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곁으로 날아온 로운은, 펜실베니아의 작은 소도시에서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부친인 진국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딸과 함께 보내는 것에 감사했다.

지석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려던 로운은 병약한 아버지를 괴롭게 해드릴 수가 없었다.

한 달 후, 진국은 로운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

로운의 새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곳에 있기 싫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후, 이복동생인 샘이 그녀를 찾아왔다.

“로운,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거야? 정말,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야?”

로운은 슬프게 웃었다.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에게 돌아가야 하는 걸까? 부모님 대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걸까?

지석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이미 기사를 통해, 그리고 윤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 유라희와 장성빈은 법적인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지석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윤서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몇 달에 걸쳐, 로운과 지석의 기사가 계속해서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는 그녀가 미국에 머무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지석이라면, 로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로운에게는 그게 마치, 그의 거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연락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연락하기 전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응, 나 당분간 여기에서 살 거야.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집이니까.”

그녀는 거절했지만, 진국은 딸에게 뭐든 주고 싶어했고, 샘의 동의하에 그 집은 로운의 소유가 되었다.

“왜 여기 있으려고 하는데? 로운, 한국에 사랑하는 사람 있잖아?”

로운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아프게 내려다보았다. 후드득, 뜨거운 눈물이 손등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돌아갈 수가 없어... 그 사람이 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난 갈 수 없어...”

로운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집 안에 틀어박혀 무감각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문소리만 나도, 혹시 지석이 온 게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려 뛰쳐나가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점점 모든 걸 포기하게 되었다. 늦잠을 자고,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보다가, 밤이 되면, 침대에 엎드려 우는 날의 연속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는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스카프를 썼다.

혹시라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서였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초 여름 어느 날, 로운은 마트에서 지석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다. 뒷모습 뿐이었지만, 그녀는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잘못 볼 수 있을까?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와글 와글 모여 있는 그 곳에서도, 그는 절대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양복이 아니라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었지만, 여전히 지적이고 멋졌으며, 우월한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약간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오만한 표정도 그대로 였고, 그녀를 설레게 하던 날카로운 옆선도 그대로였다.

그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로운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기 때문이다. 가슴이 미친 사람처럼 콩당 콩당 뛰었다.

'대체,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거지? 혹시 날 만나러 온 건가?'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운은 자신이 잘못 보았을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를 너무 그리워하던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옆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왔다. 늙은 노부부가 살고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가끔, 정원의 담장을 사이에 두고, 노부인과 새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그들이 언제 집을 판 것인지 모르겠다. 시끄러운 차 소리에 밖으로 나갔던 로운은 현관에 멈춰서고 말았다. 커다란 짐을 옮기는 사람들 틈에서, 지석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무심한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도 없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때와 똑같았다.

시간이 멈추고, 담장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불과, 석 달만에 이렇게 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로운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달려 가 안겼을 것이다. 이렇게 울면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

그녀가 흐려진 눈가를 비비며, 막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을 때, 이미 문은 닫혀 버렸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다시 헛 것을 본 것일까? 아니다. 틀림없이 강지석이었다.

로운은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정말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온 것일까?

일말의 희망이 그녀의 마음을 잠깐 밝게 했다가, 다시 사그라 들었다. 로운이 훌쩍 거리고 있는 동안, 날은 저물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로운은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문을 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가도 돼?”

지석은 로운은 대답도 않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현관에 세워 둘 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지석은 그녀의 몸을 밀치듯 하며, 안으로 들어 갔다. 그의 양손에서 커다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집 안은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로운은 청소와 정리 정돈에는 재능이 없었고,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는 주방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냉소했다.

“이럴 줄 알았지.”

“청소하려고 했어요.”

로운은 얼굴을 붉히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무심코 쇼파 아래 떨어진 옷가지를 발로 탁자아래 밀어 넣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지? 우리는 지금 석달 만에 다시 만난 거잖아.

지석이 탁자 위에 여러 가지 음식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저녁은?”

그녀는 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직...”

지석은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조금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몰골이 형편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의 멋진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녀를 지석은 어깨 너머로 힐끗 보았을 뿐이다.

로운이 간신히 봐줄만한 몰골을 회복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식사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 사이, 지석이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주방은 물론이고, 거실까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식기 전에 먹어.”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따스한 밥과 된장국, 잡채와 불고기등, 몇 가지의 한국식 반찬을 앞에 두고 그녀는 끝내 수저를 들지 못했다.

“어떻게... 왔어요?”

그를 앞에 두고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다니, 슬픔이 솟구쳤다.

그는 우리 부모님을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이 쪽 대학의 심리 프로젝트 의뢰를 받았어.”

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고는...”

천천히 움직이던 그의 젓가락이 잠깐 동안 멈칫했지만, 로운은 그의 얼굴만 보고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 잘 해결 됐어.”

다시 조용해졌다. 로운은 멍한 얼굴로 천천히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에요?”

그녀는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인지.

만일, 그가 아직도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유라희가 그녀에게 말했다.

강지석은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복수를 하고 싶은 것 뿐이라고.

그녀는 그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설령 그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에게 사과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는... 두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매우 힘들게 그 말을 꺼내 놓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이 그리 큰 실수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 하실지도 몰랐다.

당신 말고도 여러 명이 함께 저지른 비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지석의 인생이 꼬여 버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평생 동안 자신은 그에게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로운은 침울한 표정으로 국그릇을 수저로 헤집었다.

“미안해요. 난 아버지께 당신 얘기를 말씀 드릴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구고 말했다. 눈 앞이 흐려졌다.

“난...”

지석의 목소리가 식탁 위로 무겁게 깔렸다.

“...괜찮아.”

괜찮다고?

로운은 묻는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석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다만, 그녀에게 티슈통을 내밀면서 말했다.

“다 먹은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지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지석은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로운은 두 사람 관계가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그녀를 안아주지 않는다. 그녀가 안아달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진퇴양난이었다.

간신히 훌쩍거림이 멈춘, 로운 앞에 김이 모락 모락 하는 밥 한 그릇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저로 밥을 뜬 후,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로운은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수저를 쳐다 보았다.

“더 먹어.”

이 상황에서 먹으라고?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 그릇이나 비웠다. 체할지도 몰라.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더 못 먹겠어요.”

로운의 말에 지석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빠른 손놀림으로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아직 짐 정리가 덜 끝났어.”

지석은 겉옷을 챙겨 들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로운은 그의 생각이 뭔지 궁금했다.

어째서 짐 정리도 하기 전에, 그녀의 집에서 요리를 해서 밥을 먹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육하원칙에 맞춰 말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멍청한 표정으로 현관까지 그를 따라 나갔다. 그의 생각이 뭔지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지석씨, 우리...”

그는 심호흡을 했다. 지석은 현관문을 완전히 나서기 전,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말했다.

“오래 전 그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니야. 이 말을 해주러 왔어.”

로운의 마음이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그녀가 다시 물을 새도 없이, 지석은 성큼 성큼 걸어, 옆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지석은 저녁이 되면 그녀의 집에 와 요리를 해서, 같이 먹고 옆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말하려고 하면,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재빨리 돌아갔다.

사흘 째가 되자, 로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다.

혹시, 지금 이건 복수인건가?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가 생각이 났다. 나중에 잡아먹기 위해 가두고 사육하는...

지석은 설거지를 마치고, 일어났다. 현관까지 따라나오는 그녀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는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사흘, 그녀는 오래 참았다. 지석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열었던 뭄을 다시 닫았다.

“그러지.”

그는 느리게 커피를 내리고, 식탁 앞에 두 잔의 커피를 내왔다. 누가 보면, 이곳이 마치 그의 집인줄 알았을 것이다.

로운은 양손으로 커피잔을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를 잡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사귀고 있는 걸까? 아니면 헤어진 걸까?

“말해 봐. 무슨 얘길 하고 싶어?”

그의 냉정한 목소리에 로운은 움찔했다.

“난 아직...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 사건? 어떤 쪽의 사건? 삼십년 전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석달 전을 말하는 건가?”

로운은 그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당신이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담담하던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 때의 기분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

그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행복한 꿈은 짧았고, 원래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지석은 예감하고 있었다. 신은 그에게 평온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로운과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게 악연이었기 때문이다.

운명은 그에게 한 번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괴로울 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 그게 지금까지 지석이 지켜온 방식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는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녀 옆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로운은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대화가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있는 편이 낫다.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그들이 연인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친구도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친구... 이제 그와는 친구로서밖에 지낼 수 없는건가. 선명한 아픔이 그녀의 심장을 저미게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지석은 석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유라희 대신 성빈을 설득했다. 그녀가 외출한 걸 확인하고, 소리쳐 성빈을 불렀다. 몇 마디 말로 성빈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쉬웠다.

라희가 돌아오자, 성빈은 지석이 말한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수인, 또는 정상참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그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뒤, 곧장 로운의 집으로 왔지만, 그녀는 없었다.

윤서에게 로운의 부친이 아파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떠났다.

떠났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일상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잡을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억울해졌다. 분노와 괴로움, 상실감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왜, 나는 그녀를 가지면 안 되는 거지?

지석은 세상에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로운의 부친은 사망한 후였다. 그는, 선뜻 그 녀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로운이 그를 떠났다는 것이, 두 사람 사이가 이미 변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로운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는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줄곧,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로운은 어찌나 둔한지, 한 달이 넘도록 지켜 보는 동안, 한 번도 그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집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고, 거리를 걸을 땐, 모자와 스카프, 선글라스로 무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늘 땅만 보고 걸어다녔다.

그가 마트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그가 이곳에 온 것을 몰랐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

언제나처럼 담담한 어조로 그가 물었다.

두 사람 관계의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다는 듯이, 로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부모님의 잘못을 잊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괜찮다고 말해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고 해도, 전처럼 무작정 좋다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지석은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일을 떠올릴테니까. 그때마다 자신은 그에게 미안해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사랑했고, 더 많이 사랑했다. 그런 사람이 약자라고 했던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은 늘 불안했다. 거기에 죄책감까지 더해지자, 로운은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들이 댈 수도 없었다.

그의 질문은 그런 의미였다. 그녀에게 끝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석은 그녀를 먼저 잡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 관계를 시작한 것은 그녀였다. 그러니 끝내는 것도 그녀가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로운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야 알겠다.

그가 괜찮다고 말해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도, 나는 그를 잡을 수가 없어...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지석이 낮지만 힘 있는 소리로 말했다. 그는 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한은 언제까지라도 그 녀 옆에 있어줄지도 모른다.

사랑이 식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더라도, 그녀가 원한다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는 그렇게 해줄 것이다.

모르는 척, 막무가내로 받아 달라 떼를 쓰면, 아마도 그는 전처럼 그녀를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를 보고, 더 이상 사랑해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사랑이 서서히 차가와지는 걸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끝을 알면서 또 다시 달려 갈 만한 용기가, 이제는 없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은 그를 무엇으로 잡는단 말인가? 사랑, 그 식어빠진 사랑으로 그에게 매달리는 것은 얼마나 추할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이나 연약한 존재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있었다. 단지, 사랑만으로 그의 곁에 남기엔, 자신은 너무나 겁이 많았다.

그동안은 그에게 미쳤었던 거다. 사랑은 병이라고 그가 말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로운은 심장이 지독하게 아파서,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죽어버린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웃어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

심하게 갈리지는 목소리에 로운은 심호흡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 했지만, 눈물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렸다. 로운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작게 말했다.

“그만... 만나요.”

그의 숨소리가 멈추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공기가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이 주위를 지배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가버렸다.

로운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을 잡지 않았다.

정말로, 이젠 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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