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보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맛점하세요.-
지석의 스팸 메일함을 가득 메운 유라희의 메일에 잔뜩 인상을 썼다. 그녀는 이제 병원에는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 몇 통씩, 별 의미 없는 메일과 문자를 보내오고 있었다.
스팸에 차단까지 걸어놨지만,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유라희는 여전히 그를 보스라고 불렀다. 가상의 관계를 현실에서까지 유지하려는 것이다.
집착성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지만, 병적일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스팸함을 자꾸 열어보게 되는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꽤 여러 곳에서 유라희와의 접점이 생기고 있었다.
로운의 사건 때문에 경찰서에 갔을 때, 자신도 피해자라며 고소장을 접수하러 온 유라희를 만났다. 합성 영상 속, 여자가 유라희였다니, 이걸 우연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그녀가 연예인 지망생이었을 때, 사기꾼에게 속아 찍었던 영상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자신도 몰랐다면서,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이상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유라희는 얼핏 보면, 로운과 옆모습이 닮았다. 최초 영상 유포자와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었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를 볼 때의 유라희의 눈빛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주 오래 전, 그를 잡으려 했던 남자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허락받지 못한 집착은 사람을 병들게도, 죽게도 할 수 있다는 걸, 지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자신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이 또, 다치게 된다면, 그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문자를 볼 때마다, 뒤통수에 벌레가 달라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운에게서 오는 문자가 기다려지는 것과는 대척점에 있는 불쾌감이었다. 비슷한 행위에 다른 감정을 같게 되는 것은 역시나 그의 마음이 달라서일 것이다.
지이잉-
문자 진동음에 핸드폰을 보던 지석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휘어졌다.
-저녁, 같이 먹을래요?-
간다고 했지만, 벌써 여러 날, 지석은 로운에게 가지 않았다. 뭐하냐? 밥 먹었냐? 퇴근했냐? 정도의 일상적인 문자는 결국, 그를 부르는 것으로 변했다.
지석은 그녀가 망설이면서, 문자를 누르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또 웃었다. 분명,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을 내민 채, 그의 무관심을 탓하고 있겠지.
사실, 그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만 할까?
사귄다고 해놓고,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일들은 말하지 않는, 무책임한 관계를 계속 그녀가 견디게 하는게 옳은 일인가. 계속 고민했다.
고민이라니, 그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회할 일은 애초부터 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삶의 진리였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로운이 바로 그 예외였다.
자신의 이기심이 결국은 그녀를 망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다. 그녀를 만나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잔뜩 촌스러운 모습으로 게임에서 나타나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더니, 그 후에는 거절할 새도 없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심장을 도둑맞는다는 건, 아마도 이런 기분일 것이다.
로운이 자신을 원하는 걸 볼 때마다, 그는 정신적인 오르가즘에 이르고, 간절한 열망 때문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에게는 단지, 정신병이라고 치부해 버린 그 감정은 너무나 달콤해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 곳에서 몸을 집어 빼내 보지만, 그를 잡고 있는 하얀 손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녀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면서, 지석은 자신을 저주하는 한편, 또 행복감에 빠져 들었다.
집착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하지만, 집착 당하고 싶어지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로운이 자신에게 집착하기를, 원했다.
그가 아무리 밀어내도,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녀를 생각한다면, 보내주어야 한다. 그가 전에 그의 누이동생에게 그랬듯이... 때가 되면... 아직은 아니다.
지석은, 천천히 문자를 입력했다.
-뭐 사 갈까?-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이모티콘이 몇 개나 액정을 장식한 후에야, 다시 문자가 나왔다.
-당신 좋아하는 와인으로 사 와요.-
가는 길에, 집에 들러 로운이 흘린 물건들을 챙겼다.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집으로 옮겨 간, 그녀의 물건들이었다.
어디에 두어도, 적당한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그녀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막 현관을 나오려는데, 로운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와인 샀어요?-
“아직”
-사지 마요. 와인 선물 들어 왔어요.-
“선물? 누구한테? 함부로 그런 거 받지 말랬지.”
-택배가 주고 가는 걸, 어떻게 안 받아요.-
“나 가기 전까지 뜯지 마.”
연예인에게는 누구나 선물을 보낸다. 그게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받을 수 밖에 없다.
-참, 오늘 기사 봤어요? 디자이너인 롤리타 정이 어린 남자 모델이랑 커밍아웃 한 거? 그거 때문에 당신 기사는 벌써 묻혔어요. 요즘 커밍아웃이 유행인가봐.-
지석은 오래 전, 클럽에서 그 디자이너를 봤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도 못 본척 하는게, 그 세계의 룰이었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던가. 숨겨도 결국은 알게 된다.
-당신은 이 쪽에, 그런 사람들 다 알아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한 쌍의 연인이 그가 내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남남이야 보면 알지.”
64.
뒤에서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뒤돌아봤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위로 올라갔다.
“대충은 감이 오니까.”
그것도 옛날 말이다. 예리하던 관찰력도, 동물적인 감각도 무뎌지고 둔해졌다. 이제는 단 한 사람을 신경 쓰기에만도 벅찼다.
-음식 식어요. 빨리 와요.-
* * *
“식을 거라는 음식은 어디 있는데?”
지석은 노트북만 덩그마니 놓여 있는 식탁과, 전쟁터처럼 변해버린 주방과, 그 가운데에서 어쩔 줄 모른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로운을 보며, 느긋하게 물었다.
“누가 이렇게 빨리 오래요?”
“빨리 오라며?”
노트북에 해물탕 레시피가 띄워져 있는 걸 보고, 지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해물탕?”
“꽃게탕... 하려고... 했는데....”
어설프게 호박을 썰고 있던 로운이 띄엄띄엄 말했다. 지석은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손에서 칼을 빼고 에이프런을 벗겨냈다.
“이리 내.”
로운은 전문가처럼 움직이는 지석의 빠른 손놀림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성둥 성둥 자르던 호박을, 그는 일정한 크기로 얇게 잘라낸 뒤, 당근과 양파도 같은 크기로 잘랐다.
“요리도 할 줄 알아요?”
로운은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이게, 요리야? 그리고 난, 물에 들어간 바다 음식은 안 먹어.”
“헉, 진짜요? 난 완전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탕 말고 해물 볶음으로 해. 괜찮지?”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로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석을 보고 있었다.
양복을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본격적으로 요리에 돌입한 남자를 보면서, 그녀는 가슴이 두근 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요리 하는 여자들 보면서 남자들이 섹스하고 싶다는 기분... 이해가 갈 것 같아. 나... 지금 하고 싶어요. 당신이 고파요.”
그의 목근육이 움찔 굳어졌다. 잠시 멈췄던 칼질이 이내 타다닥,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못들은 걸로 할게, 난 위가 더 고프니까.”
로운이 다가와 등에 얼굴을 묻기 전에, 지석은 재빨리 손을 씻었다. 차가운 손이 달려드는 그녀의 팔뚝을 잡고, 단호하게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으으응?”
하지만, 로운이 얼굴 가득 애교스러운 미소를 띠고,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리에 팔을 감는 순간, 지석은 항복하듯 양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번, 딱 한 번만이야.”
달려드는 입술을 잽싸게 물어 삼키며, 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응응, 알았다니까요.”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때로는 끝을 말하면서도, 계속 되는 일이 있고, 또, 계속 되리라 믿었던 일이 갑작스레 끝나기도 한다.
사람의 일이란, 늘 그렇게 예측을 불허하는 법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2월이 다 지나도록, 로운은 차기작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녀와 관련된 소문들은 많이 잠잠해졌지만, 광고주들은 전처럼 그녀를 찾지 않았다.
3월에 들어가기로 한 드라마에서도 하차하기로 결정했다. 소속사와 그녀 모두, 조금 시간이 필요할 때라고 여기게 되었다.
로운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석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이제는 쉬어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석의 영상은 그녀 때와 마찬가지로 루머임이 밝혀졌다. 전문가가 세심하게 살핀 결과, 영상의 전반부, 클럽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지석은 맞지만, 후반에 나오는 나체의 남자들은 그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거기다 사람들이 지금은 완전히 게이 클럽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그 클럽에 일반 사람도 갈 수 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오면서, 네티즌들의 음모론이 거세졌다.
지석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바빴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때문인지 그녀에게 매일 오지 못했다. 오지 못하는 날은 거의 게임을 켜두었다.
지석이 투자하고 있는 게임 회사는 피안토피아_라이프의 성공에 힘입어,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출시했는데, 현재 테스트 서버를 운영 중이었다.
그는 원래 투자하는 회사의 모든 부분을 살피는 걸 좋아해서 로운에게도 그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피안토피아 스페셜이라고 이름 붙혀진 그 게임이 매우 수작이어서 라이프의 전설을 이어갈 거라고, 지석은 그녀에게 주식을 사두라고 권유했다.
그 게임에서 지석은 검을 사용하는 남자 무사 캐릭터를 했다. 로운은 치료를 주로 하는 힐러 역할을 했는데, 동작이 어려워 번번히 그를 죽게 만들었다.
지석도 처음에는 끈기있게 그녀의 실력이 나아지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엔 그저 그를 쫓아다니며, 떨어진 아이템을 줍는 역할만 하게 했다.
“이런 게임은 너무 어렵다구요.”
로운의 투덜거림에 지석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손 고자야.”
은어처럼 하얀 손이 그의 손등을 탁 쳤다. 지석은 그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비어있는 손가락이 허전해 보여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샀지만, 명분이 없었다.
“흠, 더 연습해. 게이머가 배역으로 들어올지도 모르잖아.”
헛기침을 하는 지석을 로운은 한껏 째려보다가 게임에서 나가버렸다.
“나, 당신이랑 게임 안 해요.... 어? 뭐야? 이 기사 봤어요?”
로운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걸 보고, 지석은 그녀의 노트북을 보고는, 이내 다시 게임에 정신을 팔았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몰랐지만, 관심없어.”
지석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와아, 진짜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남 일에 안됐다는 못하겠고, 잘됐네. 아주.”
그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보면, 은근 독해.”
로운은 그의 노트북을 노려보다가 잽싸게, 마우스를 빼앗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알고 보면? 흥, 대 놓고 봐도 독해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결국 레슬링에 돌입했다. 초반에 우위를 잡는 건 늘 로운이었지만, 결국엔 지석에게 깔려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하여간 나쁜 버릇, 말로 안 되면, 꼭 무력을 쓰려고 하지.”
지석은 그녀의 양 팔을 잡고 침대로 밀어 붙였다. 그녀의 코 끝까지 얼굴을 내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에는 한없는 따사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는 당신은요, 누가 의사 아니랄까봐, 맨날 가르치려고 하고, 못하면 구박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치켜 올리고, 그의 입술을 물어 뜯으려고 했지만, 딱 하는 이빨 소리만 내고 말았다. 지석의 눈이 험악해졌다.
“이제는 물기까지? 안되겠다. 당신 요새 너무 포악해졌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로운은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요?”
“어쩌긴, 나도 똑같이 해줘야지.”
“... 읏, 아파!”
로운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지만, 이내 등을 휘며, 그에게 가슴을 내밀었다. 그녀의 가슴을 한 입 꽉 깨물었던 지석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더 해줘요.”
지석이 혀를 차자, 로운은 팔을 빼내어 그의 머리를 가슴에 품어 안았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탐닉한다는 걸, 알고 있다.
뭉클한 촉감에 그는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을 위로 걷어 올렸다.
“음...”
그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며, 로운은 몸 안이 찌잉 울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너무 밝힌다고 내가 말했었나?”
로운은 그를 눈썹 아래로 내려다 보았다. 단정한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빗질하듯 쓸어내리며 말했다.
“매번 말하면서... 뭐 난 괜찮아요. 뻔뻔하니까. 그리고 좀 뻔뻔해도 돼요. 대신, 예쁘잖아.”
그의 입술로 가슴을 들이밀며 말하자, 지석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뻔뻔한데, 반박할 수가 없군. 너무 예뻐서...”
그녀의 가슴을 보는 그의 눈빛이 전기가 튀는 듯 했다. 뽀얗게 드러난 가슴과, 분홍빛 젖꼭지를 잡아채 마음껏 빨았다. 가느다란 허리를 죄고, 향기로운 체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는 변했다. 전보다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잘 웃었다.
성큼, 봄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