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남자를 알기 전에, 남자의 폭력을 먼저 경험했다. 그래서 남자가 두려웠다.
하지만,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두려움을 느꼈다. 눈 앞의 이 남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스톤이 그녀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했을 때, 로운이 느낀 건 분노였다. 운명일거라고 생각했다.
지석이 자신과 키스하다 말고 도망쳤던 그때부터, 강하고 질긴 인연의 끈을 예감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로운아...”
어쩔 줄 몰라하는 지석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뺨에 묻은 액체를 닦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진짜 막무가내로군.”
“나도 내가 이런 줄 몰랐어요. 엄마가 알면 놀랄거에요.”
로운은 몸을 반쯤 일으키는 지석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 버린 후, 다리를 벌리고 허리에 앉았다. 지석은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계속 이마를 찡그린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실거야.”
“별로... 나 때문에 두 분은 서먹해지셨고 그 후에 이혼했어요. 아빠는 엄마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셨죠. 지금은 두분 다, 미국에 계세요. 따로 따로 재혼하셨어요.”
로운의 일을 계기로 변호사였던 엄마는 국제법을 전공해서 국제 변호사가 되었다. 어린 딸의 행복보다 자신의 성공이 더 중요했던 그녀의 엄마를 아버지는 참지 못했다.
어머니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무능력하다고 넋두리를 했다. 쭉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은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혼했다.
“부모님을 봐도 그렇고, 윤서를 봐도 그렇고, 내 주변에는 별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결혼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없어요.”
그의 몸 위에서 몸을 띄운 채, 치마 속의 팬티를 재빨리 벗어버렸다. 지석은 그녀의 손에서 날아가는 작은 천조각을 보면서 다시 탄식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솔직히, 그녀의 말에 안심했다. 지석은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로운을 쳐다 보았다.
“당신은 어릴 때는 어땠어요?”
하얀 얼룩이 묻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그의 몸 위에 걸터 앉은 여자는 눈 앞이 아찔할 정도로 섹시했다.
따스한 몸이 아랫배를 눌러왔다. 지석은 포기한 듯, 뒤로 누웠다. 팔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사고로 돌아가셨어. 친척 집을 전전하던 난, 결국 고아원으로 갔고, 양자로 들어갈 때까지 별로 좋은 기억을 갖지 못했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한 적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는 몇 번이나 버려지고 학대 당했다. 거기서 그를 꺼내 준 것은 돌아가신 양부모들이었다.
“양부모님들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살았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정상적인 삶이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그는 팔에 닿는 가벼운 무게를 느꼈다.
“당신, 훌륭한 사람 맞아요.”
팔을 치우자, 바로 앞에 로운이 보였다.
“나한테는 가장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한테까지 그럴 필요 없다구요. 그럼 난 아마 화낼거야.”
로운이 그의 입술을 스치며 말했다.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갑자기 목이 간질거렸다.
아무도 이렇게 대책없이 그에게 자신을 내던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두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로운을 말릴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자제하려고 해도, 그녀에게는 안 됐다.
자신의 몸 위로 엎드리는 로운의 몸을 잡고, 지석은 다급하게 외쳤다.
“로운아, 방으로, 방으로 가자.”
초초한 듯, 목쉰 소리에 로운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빼내서 단단한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몸을 살짝 들어, 뒤쪽으로 움직였다.
“못가요... 난... 지금 당장, 당신을 원하니까...”
지석의 이마에 길게 주름이 잡혔다. 로운은 거침이 없이, 발기된 그의 페니스 위로 자신의 몸을 내렸다.
뜨겁고 촉촉하게 젖은 통로가 매끄럽게 그의 단단한 분신을 집어 삼켰다. 예민하게 달궈진 몸통에 소름 끼치는 자극이 달라붙었다.
“흐윽!”
그는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신음을 내질렀다. 최초를 제외하고,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원한다는 걸, 숨긴 적이 없었다.
게임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부딪혀 왔다. 그에게 애정을 퍼붓는게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다.
남자들이었지만, 지석과 만나면, 집착했고, 그래서 피곤했다. 그 동안은 귀찮아지면 도망치는게, 수순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스스로 원하지 않을 때, 섹스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로운과는 그렇게 되지 않는 걸까?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로운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만다. 거절할 수가 없다.
좋아하기 때문인가?
예전에도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 적은 있었다. 기본적인 호감마저 없다면, 함께 자지는 않으니까, 쾌락을 얻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그가 주도권을 뺏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보면서, 로운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허벅지가 허리를 바짝 조이고, 몸이 들썩 거릴 때마다, 아래쪽에서 불길이 타는 듯한 쾌감이 솟구쳤다.
그의 몸에서 빠르게 움직이던 로운이 무너지듯 그의 위로 쓰러졌다. 빨개진 얼굴을 그의 가슴에 대고 속삭였다.
“하아, 나 더 못하겠어...”
자세가 바뀐 탓에 다시 압박당하는 아래쪽에 진저리를 치며, 지석은 신음을 뱉어내듯 물었다.
“음, 벌써?”
“으응...”
로운은 완전히 지친 듯, 대답 대신 신음만 흘렸다.
“시작해 놓고, 이러면 곤란하지.”
지석은 혀를 찼다. 정말, 곤란했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 방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미 그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와줄까?”
로운은 고개를 들고, 그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았다. 미간을 찡그리고,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내리쳤다.
“게으름뱅이!"”
지석이 웃었다. 그 웃음에 가슴이 떨려서 로운은 참지 못하고 그의 턱에 입술을 문질렀다. 마치, 그가 거기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어서, 하라구요!”
그의 턱 아래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석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을 한 줌 걷어 올렸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목덜미를 깊숙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몸에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지만, 이런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끼자, 지석의 흥분은 고조되었다.
“전에도 말했던가? 당신은 너무... 밝혀.”
“뭐라...?”
로운이 발끈해서 머리를 드는 순간, 그는 허리를 튕겨올렸다.
“하악,”
급박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이 튕기듯, 위로 올라가 뒤쪽으로 둥글게 휘어졌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입을 약간 벌리고, 달뜬 호흡을 뱉어내는 로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섹시했다.
이렇게 방만한 자세로, 옷조차 벗지 않고, 바닥에서 안아야 할 정도록, 누군가에게 몰두 해 본 적은 맹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지석은 언젠가 영화 속에서 그녀가 봉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발기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백했다.
“지금서야 알았는데, 난 당신 팬이었나봐.”
그는 투덜거렸다. 그녀의 연기력이 아주 좋아지는 것은, 그다지 찬성할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하아... 지금 뭐라고...?”
로운은 그의 몸 위에서 흔들리면서도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밝힌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이제 와서 이성적인 척 하는건 소용 없는 짓이다. 그래도, 너무...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다.
“아아, 지석씨!”
하지만, 생각 뿐이었다. 그가 거칠게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머리속은 또 다시 텅 비어 버렸다. 그의 몸이 안을 가득 채우고, 둥글게 움직였다가, 다시 위를 향해 힘껏 뻗는 순간, 로운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백치가 된 것처럼, 입을 벌린 채, 신음만을 토해낼 뿐이었다. 쾌감은 쾌락으로 이어지고, 끝없이 행위에 몰두해, 결국 그 말고는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게 되었다.
“천천히, 앗, 제발, 지석씨. 조금만...”
거칠게 흔들리는 몸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그에게 애원했다.
지석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움직였다. 마주 잡은 손이 축축해질 정도로 진땀이 솟고, 지독하게 몰려드는 쾌락만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안 돼, 못 멈춰, 로운아, 로운아...”
로운은 그가 전에, 자신에게 스톤이랑 헷갈리지 말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로운은 그의 몸을 꽉 조이며,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지석씨... 이제 그만... 와 줘요.”
그녀는 지석이 어떤 것에 흥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제하려고 하면서도, 그녀가 도발하는 걸, 참지 못했다. 그 점이 아마도 그녀를 더욱 흥분시키는 것이리라.
지석이 그녀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질때마다 로운은 몸이 달아올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분신을 죄고, 자신의 안으로 더욱 빨아들이려고 몸부림쳤다. 그의 입에서 막지 못한 신음소리가 연거푸 터졌다.
“흐윽,”
지석을 유혹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그의 몸 위에서 몸부림 치는 게 창피할 만도 하건만, 로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로운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게 좋았다. 정신을 잃고 그녀 안으로 파고 드는게, 몽롱한 눈으로 쳐다 보는 것이, 금욕적인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무엇보다 자신의 몸 안을 휘젓는 그의 단단한 몸이 소름끼치게 좋았다.
로운은 숨도 못 쉬고, 그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깊숙하게 자신의 위로 내리는 순간, 로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높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 위에 길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지석도 격렬한 사정감에 짐승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고, 진저리를 치며, 끓어오르는 체액을 그녀의 몸 안으로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로운은 그가 사정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 몸이 경직되었다가, 풀리고, 왈칵, 뜨거운 것이 몸안을 휘젓다가 흘러내렸다.
그녀를 끌어안고 몸서리를 치던 지석은 마침내, 팔에서 힘을 빼고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대로 폭발할 것 같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줄어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몸 안에서 빠지는 느낌에 치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주륵, 흘러내리는 걸,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피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다니, 이건 오히려 좋은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쩐지 잠깐동안 우울했다.
영원히 그의 아이는 가질 수 없는 걸까?
“외출하지 마.”
지석은 그녀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손으로 어루만지는 중이었다.
“게임도 못하고, 외출도 못하고,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요?”
원래 외출 안 했었다는 것도 잊고, 로운이 삐죽거렸다.
“음... 당신보다 내가 조금 더 늙어서, 뼈가 쑤시지만. 그래도 내가 올게.”
“알았어요. 이제 그만... 자요.”
“여기서, 자자고?”
“나, 너무... 졸려요...”
미치겠군. 이라고 투덜거리는 지석이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잠에 빠져 들었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등을 계속 토닥거리는 손길이 흐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