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거 기억 안 나세요?”
지석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라희가 내민 핸드폰 동영상을 보았다. 스톤과 쥬엘의 정사 장면을 녹화한 모양이었다.
“보스도 저 싫어하지 않으셨잖아요?”
라희가 의자를 끌며 그의 책상 옆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다리에 은근슬쩍 종아리를 비비며 재차 말했다.
“저는 그냥, 딱 하룻밤만 원하는거에요.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이로운씨도 모를거고... 보스가 게임에서 결혼한 거, 비밀로 해드릴게요.”
라희는 하룻밤이면 만리장성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와 자고서 단 한 번으로 끝낸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작이 어렵지, 일단 관계를 맺고 나면 지석을 자신의 치마 폭에 휘감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도록 창조되었으니까. 싫다라고 말하는 건, 그의 지성이지 욕망은 아닐 것이다.
라희는 새빨간 입술을 빨며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지난 번에, 지석이 자신을 보면 흥분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보스도 사실은 절 원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지석은 그녀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이동하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가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보이는게 중요했다.
그의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성적인 문제가 있는 부유층의 여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종종 그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건, 지석이 흥분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유라희의 경우는 조금 특수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미 게임에서 그와 관계가 있었고, 로운 때문에 그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을 때, 그를 찾아왔었다.
그 두 가지 경우가 혼합되어, 망상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었다. 라희의 손이 자신의 중요 부위를 스치자. 지석은 아주,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다른 약을 처방해 드리죠.”
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번과 달리 그가 발기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그게 이로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스가 차가와진건 그 여자 때문이겠죠?”
라희가 돌아가며 남긴 말을 지석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가 지칭하는게 로운인지, 캔디인지 알수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게임은 접속하지 마. 아니 아예, 계정 삭제하는게 좋겠다.”
-무슨 말이에요?-
로운은 자신이 먼저 전화를 하려다 지석의 전화를 받게 되자 뛸 듯이 기뻐했다.
“쥬엘이 캔디에게 접근할지도 몰라.”
로운은 보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공항에 나가겠다는 로운을 말린 건, 그였다.
사람들 몰려든다고, 나오지 말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로운은 속이 상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건, 자신 뿐인 모양이다. 지석은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가 보다.
“아이 얘긴, 내가 미안해요.”
-신경 안 써. 그것보다, 당신 새 드라마 3월에 들어간다던데?-
로운은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들었어요?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지킬앤하이드야? 낮엔 정신과 의사, 밤엔 캣 우면? 무슨 드라마가... 요샌 죄다 환타지네-
“나 낼 모레 들어가는데... 당신 집으로 가도 돼요?”
-소속사에서 액션스쿨 잡아놨다더라, CF 촬영도 있고,-
로운은 조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일 얘기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나 안 보고 싶어요?”
-스캔들 이후로 기자들이 들러붙었어. 병원에도 오고,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게 좋아.-
지석은 저 쪽에서 들리는 작은 한숨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책상 옆에 놓인 작은 가방 안에는 로운이 그의 집에 남기고 간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지석은 가방을 노려보다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집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둔 일이 없었다.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병원까지 들고 온 것이다. 로운이 있을때는 그녀의 존재가 너무 강력해서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없자, 그는 다시 전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공간에 익숙치않은 물건이 있다 보니,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간호사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아연해졌다. 간호사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서너배 이상 환자가 많았던 것이다. 그의 병원은 철저한 예약제를 통해 운영이 되고 있어서, 갑자기 온다고 해도 진료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새로 온 환자 대부분은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다들 카메라 한 대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강박사님... 잠시 시간을...”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순간, 주변의 여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댔다.
“강박사님, 스타뉴스입니다. 인터뷰 좀 할 수 있을 까요?”
“이로운씨와는 언제부터 만나신 겁니까?”
“여행을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이로운씨와 동행한 건가요?”
“강박사님, 성적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석은 마지막 질문을 한 여자를 예리한 눈으로 쏘아 보았다. 사냥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로운과의 스캔들로 자신의 과거가 파헤쳐 질 거란 예상은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건, 기자들에게는 제대로 전달 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질문을 무시하고 막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마지막 질문을 했던 여자가 지나는 말처럼 재빠르게 중얼거렸다.
“L양 비디오가 있다는데 혹시 알고 계세요?”
지석은 우뚝 멈춰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기자의 말이 주는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L양비디오? 나 들은 적 있어.”
“그게 이로운이야?”
“설마, 말도 안돼.”
수군거림이 커지자 지석은 그 여기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신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얼음을 삼킨 듯 서늘한 말에 여기자는 움찔하더니 말을 흐렸다.
“아니, 난 오래 전부터 연예계 X파일에 있는 얘길 한 것 뿐이에요. 그게 이로운이라고 말한 것도 아니구요.”
“명확한 근거 없는 허위사실 유포에 명예훼손, 다 형사 고소할 수 있는 중죄입니다.”
지석은 다시 한 번, 그 여기자를 노려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있어? 확실해? 라는 소리들에 지석의 이마가 있는대로 구겨졌다.
'L양 비디오?'
* * *
-L양 섹스 비디오의 진실, 이로운인가 아닌가.-
-네티즌들 합성 의혹, 몰카의 진실-
-이로운 소속사 강력 대응 표명, 경찰 최초 유포자 파악 중-
이튿날, 일제히 쏟아낸 기사는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빠르게 유포되고 있는 사진은 누가 봐도 조악한 합성이었다.
지석의 걱정에도 지훈은 자신만만했다.
-걱정 할 거 없어. 아닌 거 확실하니까. 명예훼손죄로 형사고소에, CF 재계약 날아가면, 손해배상 청구까지 민사까지 다 걸 거야. 어떤 새끼인지 걸린 놈들은 다 죽었어.-
지훈은 오히려 희희 낙락했다. 폭스에서 최초 보도한 신문사와 기자는 물론이고, 악플러들과 허위 사실을 유포한 네티즌들까지 고소하겠다고 입장 표명을 한 후에야, 사태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동안 청순한 섹시가 컨셉이었던 로운의 이미지에 나쁜 색이 더해진 것 만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작 큰 건이 터진 건, 그 이후였다.
-강지석과 이로운, 계약 연애?-
-업계에서는 다 아는 강지석 게이설.-
-L양 비디오에 이은, K군의 BL 영상. 일파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