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진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다 몰라요?”
로운은 백 여명은 넘을 것 같은 캐릭터들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녀가 졸라서, 스톤과 캔디는 쥬엘라의 패션쇼에 온 참이었다.
“몰라. 누군지.”
지석은 책상에 있는 데스크탑으로 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어지러운 도표들과 그래프가 가득해 로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게임 속의 스톤과 캔디도 한가해 보였으므로, 그녀는 지석을 내버려두고, 셋이 놀기로 한 것이다.
“근데 여긴 무슨 패션쇼를 일주일에 한번 씩 해요.”
말이 패션쇼지, 란제리 패션쇼다 보니, 무대 위를 멋지게 움직이는 아바타들은 하나같이 헐벗고 있었다.
게임 내의 패션쇼 장은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쥬엘라 샵 안에 거대한 홀이 있었고, 무대와 조명, 그리고 앞쪽에 마련된 관객석까지 똑같았다.
다른게 있다면,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이는 모델들의 과감한 동작이랄까. 좀더 선정적이고, 야한 포즈로 자신의 매력을 과신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눈이 휙 돌아갈 만큼 미인 아바타들이었다.
무대 저쪽에 서서 스톤과 캔디를 보고 있는 쥬엘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이 여자, 스톤 랜드 매니저였잖아요. 옛날 애인이기도 하고.”
로운은 노트북 모니터 한 쪽을 톡톡, 두들기며 지석을 노려보았다. 그는, 모니터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응...”
이 일은, 고회장과 그에게, 그리고 또 로운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의외로 고회장과 정의원이 함께 하고 있는 사업이 많아서 쉽사리 정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진짜 애인이었어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석은 그제서야 그녀가 뭘 물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의 침대에서, 자신의 파자마를 입고 뒹굴거리고 있는 여자를 보게 될 줄이야...
그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다르지. 그녀는 스톤과 가까웠지. 내가 말 안 했나. 당신이 좋아하는 스톤은 바람둥이야.”
마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로운은 침대 위에 놓인 그의 팔목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파자마 한 벌을 사이좋게 나눠 입고 있었다.
지석은 모니터속에서 허리를 비틀며, 움직이고 있는 아바타들과, 그 옆에 선, 캔디의 모습, 그리고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로운을 한 시야에 담아 보고 있었다.
가상의 존재들은 점점 희미해지는 반면, 그녀의 모습은 또렷하게 눈에 각인되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중에서 당신이 가장 섹시하군.”
지석은 노트북을 밀쳐놓고, 로운의 허리를 끌어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녀는 아차 해서 물었다.
“맞다. 전에 당신 책상에 그 명함이 있었잖아요.”
이 여자랑 지석이 현실에서도 아는 사이인거야? 내가 왜 지금껏 그걸 생각 못했지?
“설마, 그 여자랑도 알아요?”
지석은 그녀가 다음 말을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유라희에 대한 걸 설명하는 건, 복잡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교활하게, 그녀와의 관계는 스톤에게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사실, 자신은 결백하다. 적어도 강지석은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이로운 말고는.
실컷, 물고 빨려진 후에야 로운은 다시 입을 열 수가 있었다.
“봤어요? 그 쥬엘이라는 여자랑?”
지석이 말하려는 순간, 스피커에서 애교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스, 와주셨네요. 안녕하세요. 캔디님, 우리 처음 보네요.-
로운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뭐야, 이 여자는?
그녀는 지석을 노려보았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쥬엘의 프로필을 띄워 로운에게 보게 했다. 짧은 순간, 지석은 지난 메일함에서 그녀가 보낸 결혼초대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결혼했나봐.”
그는 마이크를 꺼 놓고, 로운에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쥬엘의 파트너로 '타짱' 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결혼한 날짜가 바로 어제였다.
지석은 그녀가 어제 병원에 와서 그를 유혹하려 했던 걸 떠올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여자다. 파트너까지 있는데 왜 자꾸 자신의 곁을 맴도는 걸까?
=스톤님은 지금 잠수중이에요.=
로운이 그 대신, 메시지를 적었다. 지석은 그녀가 로그아웃 하기를 바랐으나,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캔디님에게 말해야겠네요. 저희 리얼 샵이 압구정동에 오픈했거든요. 보스에게도 명함 드렸는데, 두 분이 함께 오세요.-
역시...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
* * *
-공공의 적이야!-
쥬엘의 정체를 말했주었을 때, 윤서는 로운보다 백배 이상 흥분했다. 그녀는 이미 장성빈과 이혼수속중이었지만, 유라희에 대한 증오는 누구보다도 컸다.
-어차피 장성빈 그 인간은 구제불능이니까, 줘버려도 상관없어. 근데 강지석은 다르잖아. 너 정신 똑바로 차려. 그 여자, 완전 악질 꽃뱀이라구.-
로운은 윤서로부터, 유라희가 장성빈 뿐 아니라, 꽤 많은 유력 인사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여자, 혹시 니가 캔디라는 것도 알고 있어?-
윤서의 질문에 로운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답했다.
“모르는 것 같았어.”
-피안토피아의 보안은 엄청 철저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강박이 스톤이라는 걸 안 걸까? 두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깊은 사이였대?-
윤서의 말에 로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구겼다. 쥬엘의 초대에 대해,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부러 기분이 나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사이 아니었어. 그리고 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 그건 온라인이지 현실이 아니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은 강지석이지, 스톤이 아니거든.”
어쩐지 지석이 했던 말을 고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운은 처음으로 스톤과 강지석을 분리하고 싶어졌다.
-물론, 그렇지만, 유라희가 병원까지 들락거린다는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윤서는 즉각, 문제점을 짚어냈다. 그 부분이 로운의 심기를 건드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석은 단지, 환자일 뿐이라고 못 박았지만, 게임 안에서 쥬엘의 행동을 보면, 누구나 그녀가 스톤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되지 말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쥬엘라가 설마 그 여자가 하는 건 줄은 몰랐어.-
“너도 쥬엘라 알아?”
-들어 본 적 있어. SR 이번 년도 런칭 행사에 포함되어 있을거야. 회사에도 초대장 왔던데 우리 가볼래?-
로운은 윤서의 말에 입을 떠억 벌렸다.
“너 지금, 남편과 바람난 여자를 직접 보러 가겠단 거야?”
윤서의 우울증을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윤서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흥! 유유상종이야. 내가 그 인간들 때문에 우울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사랑도, 정도, 의리도 없는 철딱서니 때문에 내 인생을 낭비하는건 바보짓이야.-
“멋지다. 오윤서!”
로운은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그러니까, 넌 나랑 그곳에 가야 돼. 절대적으로!-
근데, 얘기가 어째서 그렇게 되는건데?
SR패션은 이태리와 합작한 유명 패션 브랜드였다. 패션과 쥬얼리, 그리고 란제리 행사가 동시에 열리는 큰 행사여서 익숙한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로운은 어째서 윤서가 이곳에 오자고 했는지 곧 알아차렸다. 쥬엘라는 SR 패션의 유력 브랜드가 아니었고, 메인 무대의 오프닝 정도였다.
하지만, 신인 패션 디자이너로 무대에 선 유라희는 꽤 여유 있어 보였다. 연예인들이나 언론인들과도 안면이 있는 듯 시종일관, 화려한 미소를 머금고 파티장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누가 보면 행사 주최자인줄 알겠네. 하여간에 뻔뻔해.”
윤서는 테이블 사이를 한 마리 나비처럼 움직이는 유라희를 보며 냉소했다.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오늘 장성빈도 여기 올지 모르잖아?”
“난 상관없어. 아무렇지도 않아.”
로운의 말에 윤서가 웃어 보였다.
“강박이 그러더라. 내가 착한여자 코스프레를 해서 아픈거래. 착하지 않으니까, 원래 성격대로 살라고. 난 앞으로 나쁜 여자로 살기로 했어.”
로운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사람이 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촌철살인! 난 강박이 꾸미지 않고 말하는 게 좋아. 핵심을 명확하게 짚어주거든. 아마 다른 여자들도 그런 점을 좋아하겠지.”
윤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로운, 니 남자는 엄청 똑똑한데다, 잘생겼고, 돈도 많은데, 명망도 높다고, 꽃뱀이 들러붙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해.”
“너, 무슨 강지석 팬 클럽 같아.”
“맞아.”
로운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자 윤서가 까르륵 웃었다. 친구의 웃음소리에 그녀의 기분도 밝아졌다.
“적어도 강박은 와이프가 애 못 낳는단 핑계로 바람피거나 하지는 않을거야. 그렇게 찌질해 보이지는 않거든.”
로운은 그 말에 찔끔했다. 지나는 투로 물었다.
“아이가 그렇게 중요한가?”
윤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잖아. 사랑이 식었을 때, 그걸 대체할 게 필요한 거지. 자식은 그런 존재야.”
“사랑이 안 식으면 되잖아.”
“아이구, 이로운, 꿈도 야무지다. 강박이 영원히 너만 사랑한다던?”
로운은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음... 윤서야. 남자가 정관 수술하면 애 못 낳는거 맞지?”
윤서가 뜨악한 얼굴로 쳐다봤다.
“왜? 강박이 그렇대?”
헉, 예리한 년, 그녀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냥 물어 본거야. 오늘 아침에 무, 무슨 아침프로에 나왔길래. 남편이 아내 모르게 정관 수술해서 이혼한다나 뭐라나...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묶은 걸 풀면, 뭐 낳을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래도 힘들걸, 5년 지나면 거의 확률 없다고 봐야 할거야. 전에 자료 찾다가 본 거 같아. 만분지 일 확률이라던가. 그 아내 마음도 이해가 가네, 보통 사랑하면 그 사람 아이를 낳고 싶어지잖아.”
그런가,
로운은 지금껏 한 번도 아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강지석을 닮은 아이를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헐, 저 여자, 이리 온다. 미친거야?”
윤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운이 쳐다보니, 정말로 유라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로운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설마, 내가 캔디라는 걸 알고 온 건 아니겠지.
“안녕하세요. 이로운씨, 와주셔서 감사해요.”
바로, 게임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로운은 저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그녀들의 자리가 파티장 중앙에 배치되어 있어서, 자연스레 시선이 몰려들었다.
“반갑네요. 저 이로운씨 완전 열렬한 팬이에요.”
라희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로운도 어쩔 수 없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SR 패션의 위치가 작지 않다보니, 오늘 이 행사에는 업계 관계자들과 많은 연예인들, 언론인과 패션 블로거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먼 곳에 있던 사람들은 유라희가 이로운과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파티장에 온 사람 중, 라희가 유명 클럽의 마담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참석한 사람들은 그녀가 젊은 나이에 성공한 여류 사업가라고 생각했다. 어느 자리에서나 신진세력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유라희의 미모가 연예인급인데다 지금 로운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단숨에 그녀는 파티장 전체의 관심을 받았다.
라희가 노린 건, 그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제야 비로소 이로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로운의 우려와는 달리, 라희는 그녀가 캔디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에게 정보를 주던, 게임사 직원이 얼마 전, 잘렸기 때문에, 더 이상 정보를 얻을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저 어렸을 때, 강남 이로운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라희가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하자, 윤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하나도 안 닮았다고 말하려 할 때, 행사장 입구 쪽에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파티장에는 다양한 방면의 사람들이 있었고, 연예인들도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새로운 온 손님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로운은 화려한 공작새 무리에 한 마리의 하얀 학이 등장한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만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로운은 그를 보자 마자, 갑자기 가슴이 설레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강지석은 그곳에 있는 다른 남자들에 비해 결코 화려한 생김새가 아니었다. 하지만, 큰 키와 묘하게 금욕적인 분위기는 단연 압권이어서, 그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 보았다.
그가 누군지를 묻는 수군거림이 커졌다. 몇 몇 여자들은 얼굴을 붉혔다. 로운은 처음으로 그의 병원에 여자들이 많이 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머, 손님이 왔나 봐요.”
유라희의 밝아진 목소리에 로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강지석이 누군지 알고 있다. 어쩌면 자신을 보러 온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례할게요.”
로운은 라희가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석은 아는 사람이 있는지, 오다가 곧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잡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무리는 오늘 여기 온 초대객들 중에서도 엄청난 포스를 뿌려대는 집단이었다. 라희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눈치였다.
“저기 저 사람 한일 사장 아냐?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니 소속사 대표인 마르스잖아.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윤서의 말에 로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마르스와는 한 번인가 밖에 인사 나누지 못했었는데, 지석은 어떻게 아는거지?
“나도 몰라. 아니 근데,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 온 거야?”
그녀는 자신이 오늘 이곳에 온다는 걸, 지석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앞에 있던 윤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랑 여기 올 거라고 말했어.”
로운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궁금하잖아. 강박이 유라희랑 어떻게 아는 척을 할지, 넌 안 궁금해?”
물론, 궁금했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너무나 표시가 난다. 지금까지 그녀는 강지석에게 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거기에 유치한 질투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윤서에게 눈을 흘겼다.
“아우, 오 윤서,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야?”
“오라는 말은 안 했다구. 그냥 너랑 여기 간다고만 했지. 나도 강박이 올 줄은 몰랐단 말야.”
그럼, 지석이 오늘 이곳에 온 건, 자신의 판단에 따른 건가.
“저 사람이 여기서 날 아는 척 하면 큰일이야.”
로운은 얼굴을 붉혔다. 윤서도 주위를 돌아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그렇지? 기자들도 많이 왔고, 그럼, 강박은 여기 왜 왔을까? 저 여자 만나러?”
윤서의 목소리에 배인 호기심에 로운은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오윤서, 너 지금 무지 사악해.”
“알아, 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윤서는 순순히 인정했다.
“분란의 여신이라고 해줘.”
그러다 곧 사과했다.
“미안, 아깐 유라희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단 생각 밖에 안 났어. 솔직히 강박이 어떻게 나올지도 좀 궁금했고,”
“너 진짜 못 됐어.”
로운은 그녀를 비난했다. 강지석을 이런 식으로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로운이 윤서를 시켜 전화를 하게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말했잖아. 앞으로는 나쁜 여자로 살 거라고.”
윤서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곧 고개를 떨구었다.
“이번 일은 내가 경솔했어. 근데 말야. 강박이 널 아는 척 할까?”
로운은 다시 심장이 떨렸다. 당연하게도, 이런 자리에서 그녀를 아는 척 하는 것은,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자고 말은 했지만, 그걸 공식화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지석이 그녀에게 말했던 건, 혹시나 의도치 않게 스캔들 기사가 터졌을때의 대응방법이었다.
당연하게도 스스로 나서 스캔들을 낼 필요는 없었다. 로운은 그가 이곳에서는 그녀를 모른 척 하고 있다가, 나갈 때 은근슬쩍 따라 나올 거라 생각했다.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지석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쪽을 보았다.
로운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간,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과 소음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지석은 함께 있던 무리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더니, 망설이지 않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라희가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강 지석 박사님,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지나칠 정도로 큰 목소리여서, 사람들은 모두 유라희와 그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 했다. 지석이 무슨 말을 할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시했다.
하지만, 지석은 오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형식적으로 고개만 까닥했다. 라희의 얼굴이 벌개지는 걸 보자, 윤서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킥, 소리를 냈다.
지석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로운의 테이블로 곧장 걸어 왔다.
테이블 사이를 빙 돌아, 그녀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조금 몸을 굽혔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대화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석은 그녀를 향한 뜨거운 시선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물었다.
“언제쯤 갈 거야?”
수백 쌍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그녀는 이로운의 도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좀 더 이따가요. 기다릴래요?”
“응, 그러지.”
지석은 로운의 왼쪽에는 윤서가, 오른쪽에는 가방과 코트가 걸려 있는 걸 보고는, 우아하게 그것들을 옆 자리로 옮겼다.
그러더니 로운의 옆에 의자를 가까이 붙이고, 그곳에 앉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 갑자기 찰칵, 하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렸다.
윤서는 고개를 들어 라희를 보다가, 지석에게 엄지 손가락을 척, 치켜 들었다.
“멋진 등장이었어요. 강박사님.”
“그랬나요?”
지석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쏠려 있었다.
“1부, 2부가 나누어져서 아직 마지막 쇼가 끝나지 않았어요.”
로운은 그에게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보여주었다.
행사의 마지막은 SR 패션이 야심차게 밀고 있는 캐쥬얼 브랜드였다. 한참 뜨고 있는 아이돌들이 나와 축하 공연을 펼쳤고, 멋진 무대가 이어졌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무대여서 시끄러운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로운은 지석에게 말을 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야만 했다.
“진짜, 여긴 왜 온 거에요?”
지석은 눈을 반쯤 내려 깐 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로운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눈빛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괜히 왔나?”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로운은 얼른, 그의 소매 끝을 잡고 말했다.
“잘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