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46)

* * *

“그게 무슨 소리야?”

로운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매니저인 동수의 전화였다.

-누나도 몰랐어요? 김대표님, 폭스랑 갈라섰어요. 어제 난리였는데...-

그녀는 머리가 아찔했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거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다. 당연히 김진택과 함께 나가야 한다. 하지만...

지난 주의 일이 떠오르자, 도저히 김진택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육개월이나 남은 재계약때까지 시간을 버는 수 밖에 없는건가.

“사무실은 그대로야?”

-사무실도 뺐죠, 그 빌딩이 폭스건데.-

동수의 목소리가 왠지 신나하는 것처럼 들렸다.

“근데, 넌 뭐가 그렇게 신나?”

-신나죠. 저랑 코디 정아는 누나 따라 폭스에 남았잖아요. 누나가 말해준거 아니에요? 폭스에서 누나만 원했다던데요? 그걸로 김진택이 폭스 돈 횡령한 거 다 퉁치기로 했다면서요.-

점점 갈수록 모를 얘기였다.

“횡령?”

-김대표가 건설 쪽에 투자를 했었나봐요. 근데 그게 하루 아침에 쪽박 나는 바람에... 암튼, 엄청 손해봤대요. 그래서 투자비로 받은걸 횡령하다 걸렸다나, 뭐 암튼 그래요.-

로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나 사무실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녀를 안고 있던 스톤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게 투자는 늘 조심해야지.”

어쩐지, 굉장히 고소해 하는 말투였다.

* * *

“어떻게 된 거야?”

로운은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고 간 듯한, 사무실을 둘러 보았다. 휴지 쪼가리가 날라 다니는 사무실 중앙에 진택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을 팔아 넘기려 했던 사내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주식 했었어?”

그녀의 말에 진택은 이를 악물었다.

“이로운, 꽤 대단하신 양반을 물었나봐?”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대표 자리를 손에 넣은지 사흘만에, 갑자기 투자자가 원금을 회수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백방으로 구멍난 자금을 메꾸려 뛰어다녔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그를 위해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친형제처럼 살갑게 굴던 박창원까지 그를 외면했다. 방법이 없었다.

폭스는 이로운을 원했다. 갚아야 할 돈은 어마어마했고, 로운과의 계약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다른 길... 진택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이로운때문이라는 생각이 든 건 우연일까?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걸까? 정의원이 아니라 고회장이었나...

“너 혹시 리더스폰... 고회장이라고 알아?”

로운은 이마를 찡그렸다. 회장이니 의원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제 나랑 계약 끝났다며? 동수한테 듣고 오는 길이야. 폭스 쪽 변호사도 만났고. 김대표랑 나, 이제 남이던데?”

남은 계약 조건 그대로 폭스와 재계약 하기만 하면 된다는 변호사 말이었다.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진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더스폰은 대기업들도 무시못하는 사채회사지.”

사채란 말에 로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윤서 이름으로 또 빚 있는거야?”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그래서 요새 또 전화 없었군. 진택의 충혈된 눈이 그녀를 향했다.

“지난 번, 캐슬럭으로 널 부른건 고회장이었어. 난 그게 정의원 부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판단했군.”

진택이 다 알았다는 듯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 그런거였어... 축하해. 그렇게 도도한 척 하시더니... 결국은 줄을 잡았나 보네.”

“무슨 뜻이야?”

로운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진택을 위로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동정심이 싹 사라졌다.

“고회장이 기침을 하면, 대기업들도 감기에 걸린다는데, 나 같은 서민한테는 태풍이지. 니 덕분에 다 날아갔어... 아주 깡그리.”

그는 허탈한 듯 웃다가, 뱀처럼 가느다란 눈으로 로운을 쳐다보았다.

“고회장이란 그렇고 그런 사이란거 왜 나한테 숨겼냐? 일부러였어? 나 물먹이려고?”

진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사나와졌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모두 이로운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악을 썼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지난 십 년동안 번 돈이, 단 한순간에 날아갔다고!”

진택의 고함소리에 로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앉아 있는 진택을 싸늘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거, 나 때문에 번 거 아니었어? 나랑 계약하기 전까지는 별 볼일 없었던 걸로 아는데?”

그녀의 차가운 말에 진택의 이가 앙 다물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가 꿈을 꾸게 된 것도 로운을 만나면서부터 였으니까.

그 꿈을 팔아 더 큰 꿈을 사려고 하다 결국은 이렇게 된 거였다. 진택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로운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김대표, 예전의 당신은 괜찮았어. 당신 배우들이 성공하는게 당신 꿈이라고 했지? 나 그 말이 좋았어. 헤어지는 마당에 충고하나 하자. 니 꿈을 니 손으로 싸게 만들지 마. 기분 진짜 더럽더라...”

진택의 사무실을 나오는 로운의 마음도 좋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그녀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김진택의 힘이 컸다.

갑자기 작년부터 이상해진거지, 그 전에는 그도 저렇지 않았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빠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자신을 알아보고 장난을 치나, 싶었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강지석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런 곳에서 볼 줄 몰랐기 때문에 로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게임에서만 만나고 있었다. 당분간은 바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게 핑계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여전히 스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로운은 그것만으로도 달콤한 기분이었다.

“일은?”

그녀가 다가가자 지석이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에 잡히는 순간, 멍해 있던 로운은 정신을 차렸다.

참, 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거지?

“대충 봤어요.”

지석이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내 차 타고 가.”

그녀는 머뭇거리다 자신의 차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가져 오면 돼.”

맞는 말이다. 로운은 지석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왔어요?”

“사무실에 간댔잖아.”

“그래서 데리러 온 거에요?”

그가 살짝 웃는 바람에 로운은 또 다시 가슴을 부여 잡았다. 심장을 누가 깃털로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저절로 입가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턱에 힘을 꽉 주었다.

바보처럼. 너무 좋아하는 티는 내지 마. 넌 스타라고!

배우가 된 이래, 밖에서는 한 순간도 그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있으면 모든게 사라지고, 그만 보였다.

조수석에 탄 로운은 지석이 자신의 몸 위로 다가오자 움찔, 긴장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주차장인데...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를 밀어낼 자신은 없다.

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뜨자, 지석이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워주는게 보였다.

단정한 표정과 달리 달리 귀를 간질이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가 놀리듯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여기 주차장이야.”

지석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내, 내 눈이 어쨌는데요?”

“키스해 달라는데?”

“누, 누가요?”

그녀는 펄쩍 뛰었다.

“당신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로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음...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다. 애초부터 속이는 건 불가능해. 차라리 다른 말을 하자. 안전한 주제를 택하는 거야.

“바쁘다면서요?”

“대충 끝냈어.”

지석은 지난 사흘간, 정신없이 바빴다. 그 중에는 고회장을 만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회장은 그가 안 하던 짓을 하자, 의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의 돈이니 막을 수도 없었다.

“리더스폰을 본격적으로 맡아서 하는게 어떠냐?”

고회장은 그의 심중을 떠보려 했다. 지석은 예의바르게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이 좋습니다. 이번 경우는...”

지석은 살짝 눈을 내려깔았다.

“좀 특별했어요. 하지만 그 건설회사는 김진택이 박창원을 이용해 반 협박으로 대표 자리 뺏다시피 한거니까. 순리대로 풀어간 것 뿐입니다.”

“순리?”

고회장의 늘어진 볼 살이 말하고 싶은 걸 참듯 씰룩거렸다.

언제부터 니가 순리대로 살았다고?

남들은 그가 운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가 찍고, 그 뒤에 변하는 것이다. 그 수법이 너무나 교묘해서, 아무도 모른다는 게, 그가 말하는 순리였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가 한 번도 표면에 나선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이상했다. 지난 번, 캐슬럭의 일만 해도 그랬다.

고회장의 눈가가 슬그머니 가늘어지더니 넌지시 물었다.

“너 연애하냐?”

지석은 무표정하게 고회장을 보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정의원과 추진하고 계신 일 있으면, 그만두십시오. 그 말씀 드리러 온 겁니다.”

하지만, 희미하게 붉어지는 귓불은 아무리 그라해도 도저히 감출수가 없었다.

고회장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이로운이랑? 허... 내가 살다 살다 네 놈이 연애한단 소리를 다 듣는구나.”

지석의 턱이 불끈, 다물어졌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신실장이 지난 번 이로운이 가게 왔을 때, 네 놈도 다녀 갔다길래 내 이상타 하긴 했지. 니가 어디 그런데 갈 놈이야?”

지석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신주형의 입이 그의 체중 보다 많이 가볍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얼마나 더 같은 질문을 받게 될는지,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에요?”

로운의 목소리에 지석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밥 먹으러, 아, 먹었나?”

시계를 보며 그가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하다가 로운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안 먹었어요. 생, 생각해보니 나 저녁 굶었네. 하하.”

지석은 힐끗, 옆을 보았다. 로운의 비쩍 마른 몸을 보면서 물었다.

“다이어트?”

배우는 365일 다이어트지만, 오늘만은 때려죽여도 안 한다. 로운은 고개를 휙 저었다.

“안 해요! 쉬, 쉴때는 다이어트 안 해요. 안 그럼, 스트레스 받아서 어떻게 살라구요. 나 많이 먹어요. 아, 배고프다.”

로운은 중얼거리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검은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과 지석의 모습이 함께 비쳤다. 마치, 모니터를 보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벌어지려고 해서, 힘을 꽉 주었다. 게임에서 캔디와 스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심하게 요동치는 가슴 소리만 좀 어떻게 한다면... 그를 보면, 당연하게도 부끄러운 일이 떠오르고, 몸이 달아오른다.

그녀는 지석의 곧은 자세라던가, 핸들 위에 올려진 길고 가는 손가락, 전방을 주시한 표정등을 훔쳐 보면서,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강지석에서 눈이 먼게 틀림없다. 그가 남자 혐오증이라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다.

그녀는 난감할 정도로 그에게 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떤 걸까?

못 이기는 척, 자신과 그런 사이가 되어 버렸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결정난 게 없었다.

게임에서 부부라고, 현실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섹스를 하긴 했지만, 두 번의 상황은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뻔뻔하게도 그를 먼저 유혹한 것은 그녀였다. 그도 그렇게 말했었다. 초대 해 놓고 이제 와서 도망가지 말라고.

그 때가 떠오르자, 로운은 또 다시 심장이 쿵쾅거려 살수가 없었다.

아, 정말이지 심하게 부끄럽다...

그녀는 민망한 나머지 괜히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뒷 좌석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발견했다.

“저거...”

지난 번에 지석이 양쪽에서 나타나 놀랐던 일이 떠올라 로운이 물었다. 그때, 노트북을 쓴다고 했지.

“볼래?”

차가 신호등에 걸리자 그가 노트북을 들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히익!”

스톤과 캔디는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다행히 가벼운 스킨쉽만 하고 있어서 민망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 하하, 스톤은 아직 접속중이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게임 하는거야? 이 정도면 중독 수준 아냐?

지능형 범죄자들 중에는 정신과 의사도 많다던데... 스토커라거나 집착이 심해서 헤어지자고 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거나...

로운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웃긴 건,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지석이 자신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변태인 쪽은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나도 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걸까?

혼자서 낯부끄러운 생각을 하던 로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혹시 이 사람이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집착하는 여자라고... 헉, 맞아, 그렇게 생각하겠지. 왜 아니겠어. 이로운, 너 자존심도 없이 매달렸잖아.

로운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보며, 지석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이제서야 겁이 나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는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일 만큼은 비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으니까.

전화가 오자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꼈다.

-오빠! 이로운이랑 사귄다면서요?-

난데없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누이동생인 리언이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음... 잘못 안 거야.”

그는 로운을 힐끔 거렸다. 그녀는 그가 전화 받는 걸, 듣지 않는 척 하며,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맹렬하게 생각중이었다.

누구 전화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아라 아빠가 그랬다구요. 오빠가 이로운이랑 연애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에요?-

지석의 눈꼬리가 세밀하게 꿈틀거렸다.

수다스러운 입이 하나 더 있었군.

“운전중이야. 끊어.”

그가 전화를 끊자, 로운은 무심한 척 중얼거렸다.

“음주 단속 하나봐요.”

도로에 경찰차가 빼곡 했다. 어쩐지 거리가 익숙해서 밖을 보니, 캐슬럭과 엔비가 있는 번화가였다.

지석이 그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도로가 막혀 돌아가는게 나을 것 같은데, 오히려 차량 행렬의 긴 꼬리 뒤에 붙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때문에 엔비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로운은 그들을 보다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어? 저 사람?”

줄줄이 굴비 두름 엮이듯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윤서 때문에 만났던 그 사채업자가 아닌가.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지석을 쳐다보았다. 그 날, 그가 그 곳에 온 것과 지금 이 일이 과연 우연인걸까? 에이 설마...

“당신이... 저런 거에요?”

지석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쪽을 힐끔 보더니, 턱으로 가리켰다.

“연말 연시 민생 안정이로군.”

로운은 가로수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플랭카드를 보았다.

<연말 연시 민생 안전 및 법 질서 확립 기간>

그럼 그렇지. 우연이야.

로운은 자신이 생각이 너무 어이 없다고 여겼다. 너무 큰 비약이다. 정신과 의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사채업자를 잡아넣는단 말인가.

경찰이 붉은 경고등을 흔들며 앞에서 차를 세웠다.

“실례합니다. 음주 운전 단속 중입니다.”

지석이 후, 불고 나서 지나는 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경찰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사기 도박과 불법 사채로 특별 검거령이 내려졌습니다.”

“고생 하십시오.”

로운은 엔비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캐슬럭 1층의 레스토랑에 있었다.

“진짜 사람일은 모른다더니, 김대표도 그렇고, 저 사람들도 그렇고, 하루 아침에 저렇게 되냐... 윤서가 알면 좋아하겠네요.”

지석은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음식 왔다.”

서빙 하는 웨이터들 뒤로 주형의 모습이 보였다.

로운의 등 뒤였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지나가는 주형을 보며, 지석은 고회장에게 일러 바친 일을 용서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식기 전에 먹어.”

그는 자신이 늘 공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치졸한 복수 같은 건 안 한다. 다만, 준법 정신이 투철할 뿐이다. 사회악은 뿌리 뽑아야 하니까.

식사는 맛있었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레스토랑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로운은 어쩌면 사진을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 기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지나가고 경찰차들도 모두 떠난 후에, 창가는 블라인드가 내려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웨이터들까지도.

안에 있던 그녀가 레스토랑 밖에 '내부공사중' 이라는 팻말이 붙은 걸 어찌 알겠는가?

다만, 오늘따라 사람들이 일찍 집에 간다고만 생각했다. 방금 전에는 그래도 식사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그럼 이제 우리 얘기를 좀 해보지.”

앞쪽에서 조금은 차갑고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석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처럼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부드러웠다.

보통이라면, 로운은 절대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스타 앞에 있는 사람이 긴장하니까.

하지만, 강지석 앞에서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배우 이로운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녀는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는 척 하면서,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우리 얘기요?”

지석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몰랐다면 모르되, 이미 알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그의 말이 끊어졌다. 로운은 감히 그 뒷말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어떻게라니!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냐구요. 아니, 내가 말하는게 맞는건가? 그렇지. 이 사람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니까.

달려든 것도 나고, 덮친 것도 나고, 초대한 것도 나다.

그러니까 내가 대답하는 게 옳다.

“어떻게 할까요?”

로운은 말하면서도 울고 싶었다. 연기를 할 때도 이렇게 어색한 상황에 처한 적은 없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지 마. 내가 듣고 싶은 건 당신 의견이지 내 의견이 아니니까.”

지석의 태도는 침착할 뿐 아니라, 태연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가 스톤이 맞는지 오히려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거? 로운은 멍해졌다.

생전 처음 남자를 원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프고, 몸이 조여들었다.

일분 일초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고통스러운데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게 혹시 사랑인 건가?

아마, 맞을 것이다. 로운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민망한 짓을 했는데, 그걸 제 입으로 확정짓는 말까지 할 수는 없는거 아닌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내 생각이 왜 궁금한데요?”

로운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볼은 발그레 하고 눈은 알 수 없는 기대와 열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이제 막 첫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품은 감정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게 그녀가 원하는 것일테니까.

몸은 이미 성인 여자였지만, 감수성은 이제 막 십대를 벗어난 어린 소녀, 그게 이로운이었다.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로, 남들은 몇 번이나 겪었어야 할 '통과의례'를 이제야 겪고 있는, 보기완 달리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여자다.

앞 뒤 못 가리는 맹목적인 감정 표출도 그런 이유였다. 해야 할 시기에 하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 뿐이다.

그 후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가 될 것이다. 더 좋은 여자가 될 것이고, 누군가의 좋은 아내가 되어, 좋은 엄마도 될 것이다.

그런게 여자로서의 행복이겠지.

지석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가슴의 지끈 거리는 통증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일이다.

누군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미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곳에, 물을 뿌리면 더 거세게 타오를 게 뻔하지 않은가.

불길이 스스로 꺼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게 아마도 자신이 그녀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 사실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그런 건 들추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그건 혼자 남겨졌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기사가 날지도 몰라.”

그는 머뭇거리는 로운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로운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맞아! 그런 기사가 나면 이 사람에게도 폐가 되겠지? 어떻게 하지?

“그, 그러게요. 그럼 어쩌죠? 오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왔는데... 기자들도 있었을 텐데...”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조만간 여러 사람이 물어 올 것 같으니까. 거기에 대한 답을 생각해둬야겠지.”

“뭐, 뭐라고 해요?”

“당신이 선택해야지. 아는 사이라고 할지, 사귀는 사이라고 할지. 여태 그걸 물은 거잖아.”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지석이 짓궂게 물었다.

“게임에서 만난 사이라고 해?”

“그건 안 돼요!”

로운은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선택하라는 거야. 나 보다는 당신이 잃을 게 많을 테니까.”

아마도 배려해주는 것일테지만, 로운은 그 말에 침울해졌다.

그는 여전히 태연하고 침착했다. 침대에서를 제외하면,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오히려 침대에서의 모습이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날 좋아하지 않는 걸까?

로운은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녀는 몇 번의 심호흡 끝에야 간신히 자신이 하려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호, 혹시, 날 조금은 좋아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왜 이렇게 뻔뻔할 수 밖에 없는 건지, 로운은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에게 돌진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한게 당연한 일 아닌가.

지석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침묵에 점점 난처해지고 있던 로운의 귀에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지만, 내가 잔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색찬란한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가득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처음이래...

가벼운 거품 방울이 안에서 솟아올라 계속 팡팡 소리를 내며 터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심장은 간질간질해지고, 귀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계속 해서 울려퍼졌다.

그게 실제로 레스토랑에 흐르는 음악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헤벌쭉 벌어지는 입가를 가리지도 못한 채,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나, 나도 처음이에요.”

로운은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지석이 일어나더니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가자, 이미 충분히 사진 찍혔을 테니까.”

총총, 엘리베이터로 가는 그를 따라가면서 로운이 물었다.

“기자들한테는 뭐라고 해요?”

그녀는 아직도 답을 내지 않았다는 걸, 지적했다.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고 싶어?”

“아니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석은 로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입술 한 쪽 끝을 올리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사귀는 사이인 걸로...”

“에?”

따스한 입술이 닿는 걸 느낀 순간, 로운은 사르르 눈을 감았다.

밖에서 하는 키스라니 굉장해!

철이 든 이후, 밖에서 뭔가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일이 아닌 문제로 대중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오죽하면, 일이 없을때는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당당히 강지석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러고 있다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게 오히려 조금 억울할 정도였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동네 방네 소문 내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다.

“당신은 괜찮아요?”

“뭘?”

“저기, 그런 기사 나도... 사람들이 막 악플 달고 그럴지도 몰라요.”

지석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신경쓰이나?”

“아니요.”

“그럼, 나도 괜찮아.”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지석이 다시 말했다.

“집에 데려다 줄까? 아니면... '내' 집으로 갈래?”

여기서 내 집이라는 건, 확실히 게임 속의 스톤랜드는 아니다. 그의 집에 간다는 의미는... 로운은 당황했다.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손님'이 아닌 '연인'으로 가는 거니까.”

로운의 얼굴이 또 다시 붉어졌다. 그 목소리는 마치, 게임에서 그녀에게 파트너 제의를 했을때와 똑같이, 사악했다.

“아... 음...”

이렇게 직접적인 초대라니, 하지만 지금 와서 뒤로 빼는 건 뭔가 더 어색한 듯 하다. 일단은 사귀기로 한 사이니까.

거기다, 그가 사는 곳을 보고 싶어! 라는 열망이 더 컸다. 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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