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46)

* * *

“박창호랑 정의원 관계를 알아봐. 더 윗선까지도. 남의 돈을 그렇게 꿀꺽 하면 체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그리고 JT 엔터가 어디랑 접촉하는지도...”

지석은 전화를 끊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지금까지 엔터 주식에는 별 관심이 없던 그였다.

그 쪽은 원래 고회장이 전문이기도 했고, 리언의 남편인 최지훈과 엮이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로운이 속해 있는 JT.Ent 가 폭스에 속해 있으니 싫어도 만날 일이 생겨버렸다. 연예인 상납이라는 그 고약한 관행을 최지훈도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운을 폭스에서 빼내주겠다고 이를 뿌드득 사려물었다. 이대로 뒀다간, 이로운의 앞날이 어떨지는 불은 보듯 뻔했다.

강한 척, 똑똑한 척, 이쁜 척, 도도한 척,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하는 여자가 그렇게 앞 뒤 분간 못하는 철부지 어린애에, 순둥이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정적일 거라는 것도, 눈을 가리고 쌕쌕 거리던 로운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눈에서 불꽃이 확 튀었다.

자신의 몸을 조여오던 미끈한 알몸을 떠올린 순간, 지석은 무섭게 차오르는 흥분을 느끼고,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그는 안경을 벗어 내팽개치듯 책상에 던지고, 양손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안대를 풀지 않겠다는 로운의 판단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

만일, 스톤이 그인줄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그와 자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에 대한 현실과 온라인의 온도차는 결코 작지 않으니까.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지석이 게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양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이동생까지 결혼한 마당에, 비밀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금은 그런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성정체성은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드러나 있었다.

그 사실이, 이로운에게 어떤 흠집이 될지 지석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그러니까, 두 사람은 게임에서는 만나도, 현실에서는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다. 자신이 그녀 인생에 끼어드는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야 했다.

이로운을 위해서라도.

“원장님, 예약하신 유라희씨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린 인터폰 소리에 지석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상담 스케쥴을 보다가, 유라희와 오윤서가 같은 날, 잡혀 있다는 걸 알았다.

윤서와는 그 날,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스톤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윤서의 우울증은 모두 그 남편 때문이었다.

환자의 가정사까지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오윤서의 남편새끼 때문에 이로운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떠올리자, 또 다시 무럭무럭 분노가 솟구쳤다.

자신이 로운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원래, 자신이 잘하는 것이었다.

엄한 놈 손 안 닿게, 눈 먼 돈 안 뺏기게, 주변 정리만 해 놓으면, 그 다음은 그녀가 알아서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좋은 남자 만나서... 갑자기 입안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지석은 자신이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었다는 것을 알고 인상을 찡그렸다.

“안녕하세요. 강 박사님.”

그는 환자가 들어오자, 차갑고 무표정한 닥터 강으로 돌아갔다. 이로운 때문에 가라앉지 못한 흥분이 신경 쓰였지만, 책상이 가려줄 것이다.

라희는 지석의 앞에 앉기 전에 이미, 그의 바지춤이 불룩한 것을 보고 있었다. 남자의 그 부위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직업병이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온다는 사실에 흥분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라희는 생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유라희씨. 지난 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라희는 낮고 섹시한 어조로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아주 짧은 빨간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탓에, 허벅지 사이로 그늘진 부위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차트를 보던 지석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라희는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다리를 크게 꼬아서 자신이 노팬티임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제가... 사업을 하나 시작했어요.”

지석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걸 보자, 라희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어, 성형으로 이룩한 D컵 가슴을 보란 듯이 밀어올렸다.

“사업이요?”

그는 라희의 턱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신축성 좋은 흰 상의는 목둘레가 깊게 파져 있어, 풍만한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오늘은 병원에 히터를 많이 틀었나봐요. 좀 덥네요.”

라희는 새빨간 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뒤, 짧은 모피 베스트를 벗어 옆에 내려 놓았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별로 두껍지 않은 옷감 덕에 거무스름한 젖꼭지의 모양과 형태가 고스란히 밖으로 내비치고 있었으니까.

지석은 눈매를 좁혔다. 라희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게이라고 소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유혹하려는 여자들은 많았다.

특히, 환자들 중에 그런 여자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남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수 있는 '나쁜 여자' 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나쁜 여자들은 '나는 니가 게이라도 유혹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는지,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과시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여자에게, 아니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그녀들이 납득을 할지, 따로 강의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긴, 그것도 이로운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얘기였다. 그는 또 다시 로운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녀를 떠올리는 한,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흠...”

지석의 턱이 불끈거리고,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라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정면 돌파가 답이었어.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으시다더니... 어떤 사업이죠?”

라희는 화려하게 네일아트된 손톱으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지석의 책상 앞으로 밀었다.

“제가 란제리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요. 요번에 란제리 사업 하나 할까 하고, 곧 런칭하는데 오픈때 박사님도 와주세요. 초대장 보내드릴게요..”

지석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명함에 시선을 주었다.

“시간이 날 지 모르겠습니...”

쥬엘라? 명함에 박힌 상호명을 보고 그의 눈이 확 커졌다. 지석은 라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책상 앞으로 바짝 몸을 들이밀고는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꼬옥, 와주세요... 보스.”

지석은 상담 시간 내내, 평소와 다름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쥬엘이... 그녀였군.”

엉덩이를 흔들며 나가는 라희의 뒷모습을 보며 지석은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유라희가 어떻게 자신이 스톤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스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간다면, 언젠가는 로운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평온했던 그의 삶이 조금씩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캔디를 만난 그 순간부터, 이런 일이 예견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차트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에도 그가 스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오윤서,

“어머나, 또 뵙네요. 박사님?”

도레미파솔... 솔에서 시작하는 특유의 그 꾸미는 듯한 '어머나' 에 지석은 고개를 홱 들었다. 거의 힘이 빠져 있던 그의 남성도 뭔가에 얻어맞은 듯, 똑같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으음.... 이 로운씨가 어떻게?”

그녀가 알고 온 걸까?

지석은 당황한 내색을 비치지 않으려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포커페이스가 자랑인 그의 가면이 오늘따라 제대로 유지가 안 된다.

“오윤서씨, 흠흠, 상담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목소리가 잠겨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설마, 내가 스톤이라는 걸 알고 온 걸까? 오윤서가 알려준걸까? 아니, 그럼 30억을 갚아야 하는데, 그랬을 리 없어. 그럼 어떻게 안 거지?

문득,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왜 몰라? 지난 번에도 만났잖아. 니가 그랬듯이, 그녀도 너와 스톤이 같은 목소리라는 걸 알아 차린거야.

평온하던 심박수가 빠르게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로운은 강지석의 귓등이 희미하게 붉어지는 걸 보았다.

“윤서, 밖에 있어요. 오늘은 저 먼저 상담 받으려구요. 제가 요새 정상이 아닌거 같거든요. 박사님께서 지난 번에 저보고 환자로 오라고 하셨잖아요.”

로운은 척척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 그녀의 의상 컨셉은 턱까지 오는 두꺼운 터틀넥 스웨터에 짙은 색 청바지였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냥 상담 받으러 온 거였군.

지석의 싸늘한 말투에 로운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시치미 떼시겠다 이거지?

그녀는 의자에 앉아 팔짱도 꼬고, 다리도 척 꼬더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지석은 피식 웃었다. 유라희와 같은 자세로 앉았지만, 분위기는 정 반대였다.

마치 싸움이라도 걸러 온 사람처럼, 온 몸에 가시가 잔뜩 돋아있었다.

하지만, 유라희의 육탄공격에는 꼼짝도 안하던, 자신의 분신이 이 고슴도치같은 여자를 보고는, 넋이 나갔는지 아까부터 지랄 발광을 했다.

그는 콧등을 찌푸리고 가운 앞섶을 여미었다. 이걸 입고 있기를 잘했다.

“말씀해 보세요.”

로운은 망설였다. 말을 하려고 하니 막상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였다. 강지석이 스톤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다.

목소리는 확실히 비슷한 것 같았다.그 날은 좀 더 낮고 쉰 듯한 음색이긴 했다. 그걸 뺀다면, 정말 비슷하다.

진짜 이 사람이 맞을까? 자신의 감은 분명히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니면 어떻게 하지?

“그게요. 제가...”

그녀는 입술을 잘근 잘근 씹었다.

지석은 푸른색 셔츠에 잘 어울리는 감청색 넥타이를 맸는데, 오늘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운때문인지 지난 번에 그녀가 병원에 왔을 때보다 더 차갑고 근엄하게 보였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저런 스타일을 했다면, 분명 느끼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 남자에게만은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운은 그 단정한 머리를 흐트러 뜨려놓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자신을 안았을때도 저렇게 금욕주의적인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아, 캐슬럭에서 키스했을때는 어땠지? 그녀는 아직 강지석과 그때의 일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눠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스톤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캐슬럭에서 그녀와 키스했던 일은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았다.

로운은 약이 올랐다. 저 남자,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그 키스도 나중에는 뜨거웠잖아.

강지석의 이상했던 키스와 스톤의 격렬했던 섹스가 번갈아 떠오르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확 합쳐졌다. 로운은 갑자기 몸이 확 달아오르는 바람에,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틀림없어! 이 남자야! 하지만, 만약 그런 얘기를 꺼냈는데 모르는 척, 딱 시치미를 떼면 어떡해. 아우, 그날 쪽팔림을 무릅쓰고서라도 안대를 확 풀어버렸어야 하는건데...

“음... 그러니까, 제가요...”

로운은 지석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게임 중독인 것 같아요.”

이크, 지석은 뜨끔해서 되물었다.

“게임 중독이요?”

그녀는 얼른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네, 요새 제가 게임만 해요. 거기서 만난 사람이 있는데...”

“아직, 접수 안 하셨네요.”

지석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빈 차트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나가서 간호사에게 접수하시고...”

로운이 그 차트를 확 뺏어 들었다.

“그냥, 여기서 쓸게요. 제 이름은 아실거고, 주소랑 전화번호 적으면 되죠. 집 전화랑 핸드폰 번호...”

그녀는 미동조차 없는 지석의 표정을 힐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질러 보는거야. 그녀는 쓱쓱 차트에 적어 나갔다.

“저 폰이 두 개 에요. 둘 다 적어요? 두 번째 꺼가 개인 폰인데,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이리 전화하시면 돼요.”

지석은 그녀가 뭘 하려는지 몰라서 그저 묵묵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이 스톤이라는 걸 알고 왔다고 해도,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고한 결심과는 달리, 그녀의 동글 동글한 머리통을 보는 동안, 저절로 눈매가 풀려 버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볼펜을 어찌나 꼭 쥐고 쓰는지, 저러다 부러지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또 뭐 쓰면 돼요?”

로운은 빈 칸을 다 메우고는 지석을 보았다. 그날, 그가 끝내 보지 못했던, 까만 눈동자가 똑바로 그의 눈을 향했다. 지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됐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하죠.”

그는 황급히 몸을 바로 세우며,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습관처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금색 명함이 거슬리자, 보지도 않고, 메모지 옆 명함꽂이에 넣었다.

'응?'

로운의 눈이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처럼 반짝 빛났다. 그녀의 손이 얼른 그 명함을 나꿔 채서는 유심히 살폈다.

지석은 또 다시 흠칫했다. 이런, 저걸 치우는 것을 잊다니, 로운이 나타나고 나서 그는 평소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어서 이곳을 나가주었으면, 아니,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무척이나 반가왔다. 로운을 보는 순간, 너무 반가와서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잊고 저도 모르게 끌어안을 뻔 했다.

“쥬엘라?”

비단처럼 매끄럽고 서늘한 목소리가 천천히 로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상호네요.”

지석은 움찔,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간호사가, 두고 간 모양이군요.”

그 말을 들으며 로운은 웃었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눈 앞에 보이는 명패를 옆으로 치웠다.

지석은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몰라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부릅떴다.

“이로운씨?”

놀라는 지석의 모습을 보면서 로운은 책상 위로 고양이처럼 올라갔다.

“지금 무슨 짓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은은하고 남성다운 체향이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때와 똑같은 향기, 똑같은 목소리...

로운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겨서는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똑같은 입술, 빙고!

그녀는 걸리적거리는 지석의 안경을 벗기고, 다른 손으로 크게 떠진 그의 눈을 가렸다.

“이번엔 당신이 가릴 차례에요.”

어둠 속에서, 달콤한 숨과 함께 밀착해 오는 로운의 입술만이 느껴졌다.

“으음...”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기댔다. 그녀를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좀 더 편한 자세가 필요했던 건지 모르겠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자신에게 무게를 실어오는 푹신한 여체가 그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완전히 책상을 넘어온 로운이 그의 허리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질긴 청바지를 사이에 두고도 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곤두선 남성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압박했다. 로운은 살짝 입술을 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마누라 허락도 없이 가출하랬어요? 강가의 돌멩이씨.”

강가의 돌멩이.

별 고민 없이 지은 이름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아무도 스톤 리버와 강지석이 같은 뜻이라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모른 척 빠져나가는 건 그른 모양이다.

'내가 잘못 봤군. 생각보다 똑똑한 여자였어.'

그는 속으로 피식거렸다. 여기서 어색하게 사과 하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석은 그녀의 키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라서 망설였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로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는 자신이 정말로 기다렸던 게 뭐였는지, 섬광처럼 깨달았다.

“...가출하길 잘 했군.”

그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운명처럼.

지석이 자신이 뺨을 감싸 쥐자, 로운은 눈을 가렸던 손을 그의 목에 둘렀다. 소극적이던 그의 입술이 벼락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목 안쪽에서 터지는 신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지석은 몇 번이니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로운의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어 얽히게 했다.

로운은 거부하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습하게 빠는 소리가 밀착된 입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서로를 인지하는 순간, 두 사람은 이 곳이 어디인지 잊고 말았다.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어질해질때까지, 숨이 차서 입술을 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키스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로운 너 뭐하느라 이렇게 오래... 어멋!”

윤서의 놀란 비명소리와, 문을 닫기 전, 간호사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가서 일들 보세요. 워, 원장님이 오늘 일찍들 퇴근하라실지도 몰라요.”

윤서는 병실 문을 지키듯 서서는 손으로 팔랑 팔랑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게이라는거 다 뻥이었어. 이로운, 저 복 받은 년, 난 강지석한테 절대 돈 안 갚을거야. 배 아파서라도 안 갚아!'

닫히는 문소리에 간신히 입술을 떼어낸 로운은 지친 사람처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 아래에서 뛰고 있는 맥박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섹스하고 싶어졌다.

“미쳤나봐...”

로운은 자신이 요즘 들어 이 말을 자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 남자만 보면 흥분하는건지,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건지, 몰라서 그녀도 당황스러웠다.

“난 멈추려고 했어!”

바로 앞에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로운은 몽롱한 눈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날은 볼 수 없었던 그의 눈동자, 이렇게 타오르고 있었구나...

“당신 눈... 보고 싶었어요.”

로운은 얇은 눈까풀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그 위에 깃털처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석은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찔한 감각이 몰려들었다. 그는 이를 갈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다시 시작한거야.”

그는 거친 신음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허리를 팔로 꽉 조여 안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물고, 빨아당겼다.

로운은 몸에 상처 나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오늘...”

로운은 그의 귀를 이빨로 지그시 깨물었다가 혀 끝으로 쓸었다. 좁은 구멍으로 혀를 살짝 넣자, 지석이 진저리를 치며 그녀를 부서질 듯이 억세게 끌어 안았다.

그가 흥분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서는 것 같았다.

사실은 강지석이 자신을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스톤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거나, 현실에서는 이러고 싶지 않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몸 아래 있는 강지석은 그 날, 자신을 안았던 그 남자와 조금도 다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로운은 그걸 확인하듯,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놓여 있는 불룩한 바지춤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의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잡히는 단단한 막대 같은 것을 엄지로 스윽 훑어 내렸다. 그의 몸이 경직되면서 거친 호흡이 터졌다.

“...우리 집에, 와요.”

로운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다시 키스했다. 커다란 손이 스웨터를 밀어 올리고, 따스한 맨살을 잡았다.

옆구리를 쓸 듯이 타고 올라간 손이 그대로 양쪽 가슴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쥐었다.

“아!”

그녀는 신음을 지르며 뒤로 몸을 젖혔다. 그는 스웨터와 함께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고, 그 끝의 정점을 찾아내 비틀었다.

“흐응...”

로운의 입술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손가락 사이에서 자극당하는 젖꼭지가 따끔거렸다. 지석은 스웨터를 완전히 밀어 올리고 하얀 쇄골에 이를 박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밀었다. 그제서야 이곳이 그의 병원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아, 하지, 읏, 아...”

말리려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 가슴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아까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헤집고, 정수리에 입술을 눌렀다. 정갈하고 시원한 냄새가 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길어서 그의 이마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기절할만큼 섹시해서 심장이 아프도록 조여들었다. 이 남자도 자신이 이렇다는 걸 알까?

그녀는 반듯한 이마가 시작되는 곳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몸이 심하게 떨리더니 그녀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흐읏...”

부드러운 살점을 깨물리자, 로운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혔다. 낯선 천장과 조명이 흐릿한 눈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 병원...

지석은 까칠한 턱으로 그녀의 가슴을 문지른 후에, 마침내 가슴을 입에 물었다. 그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미 한 번 달콤함을 맛보았던 기억은 그를 더욱 견딜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체취만으로도 터뜨려 버릴것만 같다. 그는 구슬같이 튀어나온 젖꼭지를 이끝으로 깨물고 다시 혀로 쓸었다.

딱딱해진 젖꼭지를 이끝으로 살짝 깨물었다가 혀로 찰싹 휘감아 빨아들였다. 짜릿한 전율이 숨쉴 틈도 없이 아랫배로 타고 흘렀다.

머리가 어질 거리고 온 몸의 세포가 긴장했다. 청바지에 쓸리는 안쪽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그의 몸이 꿈틀거릴때마다 그녀의 몸도 자극당했다.

자신이 먼저 시작했으면서, 안 된다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앗, 아니, 여기서 말구... 집에...”

그의 허리를 꽉 조이며 로운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청바지 안쪽에서 뭔가 새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앗... 안 돼. 안 돼...”

짜릿한 전율의 예감이 느껴졌다. 로운은 진저리를 치며,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대고 꼭 눌렀다. 그의 머리를 죽어라 끌어안고 진저리를 쳤다. 눈 앞이 돌연, 까매졌다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음... 남성혐오증... 맞아?”

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엉망진창이 된 지석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눌러주었다. 조금 민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서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의 목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로운은 그의 가슴 부근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투덜거렸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러게 왜 안 들어오냐구요. 그러니까 우, 우리 집에요.”

우리 집?

지석의 눈썹이 휘어졌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로운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역시, 마치 정말로 두 사람이 결혼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지석은 로운이 하고 싶어하는게 뭔지 깨달았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신랑 각시 놀이가 하고 싶은 거였다.

트라우마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연애에 대한 환상을 스톤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그게 강지석에게로 확산되었다.

남성 혐오증이 종종 성적 문란으로 이어지는 건, 드물지 않은 사례였다. 안 좋은 기억을 남성에 대한 섹스어필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다.

다만, 그 기간이 매우 짧고, 강력한 성적 호르몬을 동반한다. 로운이 자신에게 끌리는 것은, 게임에서 이미 가상 섹스를 경험했고, 지난 번에...

“음...”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충동적인 욕망이 그걸 가로막았다.

그는 턱을 불끈거리며, 늘어뜨린 손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 끝에 가늘게 떨리고 있는 로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석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끝이 어떨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손 안에 쥔 캔디를 놓을 수 없었다.

-삐이, 원장님. 퇴근 시간 지났습니다.-

-이로운! 너 정말 안 나올거야?-

갑자기 인터폰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에 두 사람은 우당탕쿵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난 몰라. 윤서가 있다는 걸 깜빡 했어. 이제 어떻게 해요?”

로운은 소매를 쭉 잡아 당겨 쥐고, 얼굴을 가렸다. 목덜미가 붉어진 지석은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인터폰을 눌렀다.

“미안합니다. 퇴근하세요. 오윤서씨는 지금 상담하겠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에 로운은 고개를 쳐들었다.

안경을 쓰고, 양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는 지석은, 자신이 이 병실에 들어왔던 그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로운씨? 다음부터는 예약하고 오세요.”

'우이쒸! 이 남자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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