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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그 돈 어디서 난 건지 말 안할 거야?”
로운은 노트북을 타닥타닥 두드리는 윤서에게 또 한 번 물었다. 윤서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니가 갑자기 30억이란 돈이 어디서 나서 그걸 갚어?”
그녀는 짜증이 났다. 월요일 아침부터 윤서 집을 찾아와 이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운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오윤서, 저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이제와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느냐 말이다.
그녀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바로 사흘 전 일이었다. 차가 왔다는 호텔직원의 전화를 받고 눈을 뜨니, 한 낮이었다.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리는 캐슬럭의 스위트룸이란 것을 그때 알았다. 안대는 풀어져 있었고, 스톤도 없었다.
그녀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호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자신이 입은 건지, 그가 입혀 준건지도 기억이 없었다.
아니, 스톤이 정말로 거기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동통은 지난 밤의 일이 절대로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흔적이 깨끗하게 닦여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전날밤에 그런 섹스를 경험해 놓고, 어떻게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 경험한 섹스는 게임에서 그녀가 훔쳐보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로운은 욱씬거리는 근육의 통증도 잊을 만큼 감동과 충격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해버렸다... 라는 느낌이었달까.
그 때까지만 해도, 말랑말랑한 행복감에 휘감겨 천지 분간을 못했다. 뭔가 비밀스러운 연애에 빠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서 게임에 들어가면, 스톤이 있겠지. 우리는 좀 더 은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꿈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스톤이 없었다. 그 날부터, 오늘까지 만 나흘째,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로운은 메일로 이혼서류를 받았다.
“너 그 사람 누군지 알지?”
사람을 물로 봐도 유분수지, 어떻게 지 맘대로 이혼을 해? 그녀는 그때의 황당했던 기분을 떠올리고는 뽀드득 이를 갈았다.
“오윤서, 좋은 말로 할때, 말해라. 진짜 절교 하고 싶지 않으면, 나 너 때문에 빚쟁이에 팔려 갈 뻔 했어.”
로운은 윤서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노트북을 탁 덮었다. 엄마아, 하고 손이 끼이기 전에 빼낸 윤서는 책상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을 툭 하고 떨구었다.
“그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다. 친구야. 날 죽일년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어.”
서러운 울음이 터진 윤서를 보며, 이크 한 로운은 얼른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괜찮아, 괜찮아, 그건 이미 전화로 했으니까. 패스해.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그 사람이라고, 스톤, 너 누군지 알지? 그 사람이 돈 빌려준거 아냐?”
두 사람은 이미 전화로 사건의 전말을 모두 공유한 뒤였다. 윤서는 지석이 시킨대로 건물을 팔아 그 돈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로운은 믿지 않았다.
강지석이 어떻게 로운을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스톤을 만났다는 로운의 말을 듣고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았다.
스톤이 강지석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가 그렇게 부자라는 게 더 놀라웠다. 하긴, 전부터 주식부자라는 소문은 있었지.
윤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로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역시 여자는 예뻐야 하는걸까?
누구는 처음 게임을 하고, 처음 남자를 만나도, 강지석 같은 놈을 덥석 무는데, 왜 자신은 이년 팔개월이나 연애하고 결혼한 놈이 그 꼬라지일까.
그렇게 시작된 윤서의 눈물과 한탄은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새낀 뭐래? 이혼할거지?”
로운은 마지못해 물었다. 비극에 빠진 친구를 앞에 두고 본인의 치정사를 캐물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 숨었는지 연락도 안 되고, 하고 싶지도 않아.”
우울증에 빠져 자학하느라, 윤서의 지난 사흘은 거의 전쟁과도 같았다. 자고 먹고, 눈 뜨고 사는 일이 다 지옥이었다.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또 다시 엉엉 우는 윤서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로운이 말했다.
“안 되겠다 너, 이대로 두면 클나겠어. 우울증 심하면 것도 병이야. 병원가자. 강지석 그 인간 병원에 가서 상담 치료 받아. 내가 데려다 줄게.”
울고 있던 윤서가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로운이도 스톤이 강지석이라는 걸 아는건가? 아니, 모른다고 했는데,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었다. 그렇게만 해주면, 30억은 없던 걸로 치겠다고.
그래서 윤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스톤이 강지석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도 오지 말라는 소리는 안했으니까.
“흑, 그러자, 나 오늘 예약 있어.”
윤서가 빨개진 눈으로 일어서는 걸 보며, 로운이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애쉬인가? 그 사람이 계속 너 찾드라.”
로운은 다시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지난 사흘간, 그녀는 계속 게임에 있었는데, 들어오라는 스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엄한 사람들에게서 메일과 메시지를 받았다.
메일은 대부분 쇼핑샵에서 물건이 업데이트 됐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는 두 사람에게서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윤서의 파트너인 애쉬였다.
게임 안에서 윤서를 만날 때, 그를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애쉬는 윤서에게 연락이 안 된다며, 걱정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게임 접을거야. 이혼하고 확 이민 가 버릴거야. 한국에서 더 이상 살기 싫어. 장성빈, 그 인간이랑 같은 공기 마시고 싶지 않아.”
로운은 깜짝 놀라서 윤서의 뒤를 쫓아갔다.
“야! 그럼 나는?”
앞서 가던 윤서가 묘한 표정으로 로운을 돌아보았다.
“넌 스톤 있잖아.”
“너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니 얘기 듣고 안 거지.”
“아냐, 너 알아, 그 사람 누군지 알잖아? 오윤서 빨리 말해!”
로운은 통통한 윤서의 목을 안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서는 로운을 째려보다 불쑥 말했다.
“복도 많은 년!”
“뭐가?”
“그런게 있어. 그리고 스톤을 게임에서 찾아야지, 왜 나한테 와서 찾아?”
쌀쌀맞아진 윤서의 말투에 로운은 자신도 모르게 웃다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나만 찾는게 아니야. 그 쥬엘인지 뭔지 하는 여자도 찾드라.”
윤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비쳤다.
“쥬엘? 스톤 랜드 매니저?”
로운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애쉬 말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또 한 사람, 바로 쥬엘이었다.
“거기 쥬엘라 라는 속옷 가게가 생겼는데, 그 여자가 오너더라구. 주말에 란제리 패션쇼 보러 가자고 했었는데...”
갑자기 처음에 자신이 봤던 스톤과 쥬엘의 정사 장면이 떠올랐다. 그 바람에 로운의 기분이 거지 같아졌다. 그녀는 샐쭉해져서 말했다.
“그 여자 무지 마음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