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6)

* * *

로운은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었다. 자신감 있어 보이기 위해, 힐과 모피코트까지 걸치고 나왔다.

이곳에 오자마자 건장한 사내들이 나타나 그녀를 안내했다. 가장 안쪽 룸에서 울고 있는 윤서를 잠깐 만나게 해 주고는 바로 다른 방으로 데려왔다.

“자, 말씀 하쇼. 어떤 식으로 빚을 갚을 건지 얘기 좀 들어 볼랑게.”

가운에 앉은 얍삽한 얼굴의 사내는 로운을 보자 마자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있는 자신의 통장들을 그가 이미 살펴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은행문이 여는 즉시, 인출할 수 있어요.”

뾰족한 송곳이 위를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그녀는 이들이 제발 이걸로 윤서를 풀어주기를 바랄뿐이었다.

“어허, 이 아가씨 세상 물정을 통 모르네. 그 통장 탈탈 털어봐야 10억도 안 될 텐데, 그걸로 뭘 어떻게 하겠단 거여?”

“나머지는 금방 갚을게요. 알잖아요. 윤서랑 나 작품 한 두 개만 하면 그 돈, 금방 갚을 수 있다구요.”

가운데 앉은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더니 히죽 웃었다.

“이자는 계산 안하나? 작품 한 두 개 할라믄 적어도 육 개월은 걸릴텐디? 우덜 계산으로는 그때쯤이면 원금 포함 이자가 백억은 넘을 거 같은데 말이야.”

로운은 따귀라도 얻어맞은 표정으로 이를 앙 다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백억? 니들 계산은 그러니? 빌린 건 3억이라며? 미안한테 내 변호사는 삼십억도 다 안 줘도 된다고 하드라. 어차피 도박 빚은 안 갚아도 되는거라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리고 나 여기 온 거, 소속사랑 매니저가 모를 거 같아? 흥, 니들 잘못 건드렸어.”

로운은 시간을 끌며, 소속사 대표인 진택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발이 넓은 그라면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을 모색해줄 것이다.

“뭔가 잘못 알고 있나 본데, 이건 도박 빚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빌린 돈이야. 당장 우리가 오윤서랑 너랑 사기죄로 고소하면 니 년이 이 바닥에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냐? 잔말 말고 여기다 도장 찍으쇼.”

사내가 내민 종이를 힐끗 쳐다보던 로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청담동에 있는 그녀 명의의 빌딩이었다. 현재 시가만 따져도 150억은 넘는 건물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철이 들면서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재작년에야 마련한 건물이었다. 결혼 할 동료배우들이야 남편 덕에 노후 걱정 안 해도 된다지만, 자신이야 결혼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노후 대비 재테크로 부동산을 택한 건 윤서의 조언이었다. 다행히 한 눈 안 팔고 착실히 모아 놓은 돈과, 은행 대출을 좀 끼고 마련한 건물 덕에 늙어 추해지지는 않겠구나, 나름 뿌듯해 했었다.

“이거 담보 잡히면, 육개월은 기다려줄테니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아요.”

로운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리질을 쳤다. 사내가 비열하게 웃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그 자와 잠시 귓속말을 나눈 사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라믄 나도 바쁘고, 그 쪽도 바쁠테니까 나랑 쪼까 토크어바웃 좀 할라요? 방법을 알려 줄테니께.”

사내의 눈짓에 옆에 서 있던 덩치 둘이 밖으로 나갔다. 룸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로운은 점점 더 공포에 질렸다.

설마, 이 사내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는 않을거야.

“자자, 이로운씨, 이건 진짜루 내가 이로운 씨 팬이라서 눈 딱 감고 말해 주는거니께, 잘 들으쇼.”

그녀는 사내의 입을 징그러운 뱀이라도 되는 듯 보고 있었다.

“내가 몰랐는디 이로운씨가 차암 비싸드만요.”

사내의 어투가 좀 전과는 달리 정중해졌다. 로운은 흠칫 해서 더듬거렸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위에 높으신 양반이 딱 오늘 하룻밤만 이로운씨를 사시겠다고 방금 연락이 왔지 뭐유, 허, 이거야 원, 난 그렇게 비싼 구멍이 있단 소리는 첨 들었수, 그짝 구멍엔 금칠을 했나배.”

로운은 꿈을 꾸는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소린지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정하쇼. 딱 오늘 하룻밤이면, 30억 버는 거요. 여자들은 참 좋겠어. 가랑이만 벌려주면 억이 턱턱 들어오고 말여. 카악, 퉤!”

그녀는 눈을 번들거리는 사내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모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말 다했어요?”

로운이 따닥 따닥 부딪히는 이빨을 악물고 한마디 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이구, 김대표, 올만이외다.”

앞에 있던 사내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연락받자마자 왔는데,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사장님.”

진택이었다. 로운은 그제서야 살았구나 싶어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격식차릴거 있나. 일전에도 유마담네서 봤고, 그나 저나 일이 이렇게 돼서 골 좀 아프겠수. 거 살살 말해보슈. 우리가 남도 아니고 말이지.”

진택은 박창호가 눈짓을 하며 나가자, 그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택을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늦은 시간인데 와줘서 고마워.”

로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 나 어떻게 해야 돼? 청담동 빌딩 고스란히 날리게 생겼어.”

로운은 앞에 있는 진택을 애원하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진택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로운의 긴장된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것만 날리면 다행이게.”

그녀는 진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게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캐슬럭에서 찍히면 힘들거라고.”

진택이 바짝 조여 맨 넥타이를 답답한 듯 손으로 몇 번 만졌다.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들어? 니가 오윤서 때문에 이 꼴 난게 아니야. 오윤서가 너 때문에 인생 황 된 거지.”

로운은 어리둥절했다. 자신 때문에 윤서가 저렇게 됐다니? 진택은 순진해 보이는 로운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너 때문에 제대로 자존심 상하신 분이 단단히 벼른 모양이다. 아까 나간 그 사내가 박창호라고,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야. 까놓고 말하면, 이 바닥 전문 뚜쟁이지.”

“알아듣게 말해!”

진택의 말을 들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끝이 아니란 거야. 니가 또 거절하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널 끌어 내릴거야. 니가 두 발로 싹싹 빌면서 찾아오도록.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든든한 줄 하나 없는 여배우가 이 바닥에서 버티기 얼마나 힘든지.”

로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그걸 하는게 소속사잖아? 그런 일 하라고 김대표랑 계약한 거야. 그리고 나 때문에 그동안 돈 많이 벌었잖아?”

진택이 힐끔 룸 밖을 쳐다 보며 말했다.

“그래, 그 돈, 잘나신 이로운 덕에 다 날리게 생겼다. 투자자들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줄줄히 투자한 돈 빼겠다고 연락 왔어.”

“그게, 가능해?”

로운이 날카롭게 물었다. 진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능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겠지. 생각 잘 해. 어차피 몸뚱이 굴려서 벌어먹고 사는 거야. 눈 딱 감고 줄 하나만 잘 잡으면,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그리고 오윤서도, 다른 사람들도 다 편해.”

차가운 진택의 말에 로운은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누군데? 나도 좀 알자? 대체 그 대단하신 양반이 누군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자신을 이토록 집요하게 원한단 말인가. 지난 번에 캐슬럭에서 만난 정의원, 그 사람인가?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낱, 국회의원이 이 정도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높은 위치라는 걸, 믿을수가 없었다.

“그건 알 거 없고, 결정해.”

“싫다고 하면?”

진택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오윤서 하나로 끝나지 않겠지. 복잡하게 가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저쪽에서는 얼마든지 환영할거야. 네가 진흙탕싸움에 뛰어 들어 먹물을 뒤집어쓰면 어차피 몸값은 더 떨어질 테니까.”

“그래서 김대표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게 맞다는 거야?”

“니가 아무리 고고한 척 해봐야 옛날로 치면 너도 어차피 기생이야. 알아? 기생 주제에 정승판서 비위 거스른거라고.”

로운은 입 안이 깔깔해서 억지로 침을 삼켰다. 지금이라도 연예인을 그만 두면, 이런 더러운 꼴 안보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윤서는? 이렇게까지 하는 걸로 봐서 자신이 연예인을 그만둔다고 해도 가만히 버려둘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돼?”

그녀는 마음의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진택이 딱딱하게 말했다.

“결정 한 거야?”

로운은 서늘하게 웃었다.

“이래야 한다며? 다른 방법 있어? 있으면 말해.”

진택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없어.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이게 다 니가 너무 예뻐서라고 생각해.”

그녀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네, 위로는 안 되지만.”

어느새, 로운의 얼굴이 차가운 밀랍처럼 변해 있었다. 풀을 먹인 하얀 가면을 한 겹 둘러 쓴 것처럼 표정마저 바뀌었다.

진택은 그 표정을 보고 로운이 배우 모드로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실제 모습과 배우일때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에로 영화 한 편 찍는다고 생각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뒷일은 걱정할 거 없어. 소문도 안 날거고, 소문나면 오히려 저쪽이 더 골 아파. 대신 넌, 이 하룻밤으로 황금 날개를 달게 될 거야.”

로운의 시선은 이미 진택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을 무장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를 늦추기 위해서 안달 아닌, 안달을 했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통과의례를 치루게 될 줄은 몰랐다.

룸의 문이 열리고 박창호와 진택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덩치 둘이 들어와 로운의 양팔을 잡았다.

“내 놔. 차용증.”

로운은 그 손을 뿌리치고, 창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파랗게 독오른 표정에 창호가 혀를 내두르며, 품에서 차용증을 꺼냈다.

그녀는 그 차용증을 받아 두 사람 눈앞에서 짝짝 찢어 팽개쳤다. 진택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이걸로 됐지? 윤서, 두 번 다시 건드리지 마.”

창호는 조각난 차용증을 보며 혀를 찼다.

“아따, 이거 아까버서 워쩐댜. 나 같으믄 절대로 이런 데 돈 안 쓸건디 말여. 뭐하러 돈을 쓴당가, 높으신 양반들 속을 모르겄네. 내가.”

창호가 손짓을 하자, 덩치들이 다시 로운을 양쪽에서 잡았다. 진택은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참, 기집들 돈 벌기 쉽다. 쉬워.”

창호는 진택의 어깨에 팔을 턱 얹었다.

“내가 거마비 거하게 한 잔 쏠테니 갑시다. 김사장.”

두 사람이 막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

언제 나왔는지 룸에 있던 오윤서가 눈에서 불을 뿜으며 두 사람에 달려들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표를 던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자, 여기 니들이 원하는 30억이야. 됐지? 이로운 어딨어? 어디로 데려갔어? 이로운 당장 데려와. 이 새끼들아! 안 데려오면 니들 다 죽은 줄 알아. 내가 불법 추심으로 신고할 거야. 신고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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