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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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화난 표정이야?”

침대 위로 남자가 올라오면 물었다.

알몸뚱이로 그를 맞이하던 여자, 유라희는 새빨간 입술을 앙 다문 채, 모니터에 떠오른 스톤의 프로필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접속 못한 사흘 사이에 그가 파트너를 맺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노리고 있던 사냥감을 다른 사람에게 뺏겼어요.”

스톤의 정체를 안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의 가게에 오는 손님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게임 회사의 간부였다.

몇 달 전, 술에 취해 그녀를 안고 떠드는 말 끝에 그 이름이 있었다.

강지석.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피안토피아의 대주주, 그리고, 지하 금융시장의 가장 큰 손이라는 정보까지. 그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매력적인 먹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조건이면 난장이 곰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적인 외모까지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라희는 지석이 출연한 방송을 보면서 처음으로 가슴이 뛴다는 게 뭔지 경험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내 같았다.

그녀가 처음 접대한 사내도 의사였다. 성형외과 의사, 돈 대신 전신 성형을 받았다. 남자와 자고 돈을 받은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라희에게 의사는 뭔가 아련한 첫사랑처럼 남아 있는 직업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강지석을 유혹하겠다고 다짐했다.

“아흑!”

갑자기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성빈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입술을 가져갔다.

“그 게임이 그렇게 재밌어? 우리 마누라도 그거 하던데, 하여간 여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재밌긴... 자기 안 올때 그냥 심심해서 하는거야. 일전에 말한 거 해줄 거지? 은행 연체 들어갔다니까”

성빈의 페니스로 손을 옮기는 라희의 눈에 색기가 뚝뚝 떨어졌다. 화류계에 몸 담근지 십년, 자신의 몸을 한 번 맛본 사내들은 절대로 그녀를 잊지 못한다는 게 라희의 자랑이었다.

“조금만 참아. 마누라가 아직 대출을 못 받았어. 곧 해올거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이억이라고 했지?”

“언제까지? 낼까지 못 막으면 부도나게 생겼어. 괜히 자기 말 듣고 사업 벌렸다가 이게 뭐야?”

눈물 연기를 펼치는 라희의 말에 성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보채지 마. 그깟 이억, 운만 좋으면, 이따 캐슬럭 가서 딸 수도 있어.”

“정말이지?”

라희는 성빈의 두툼한 목에 팔을 휘감고 다리를 허리에 감아 끌어당겼다. 어느새, 침대 위에서는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근데 자기, 정의원이 이번에는 확실히 공천해준대? 이따 만나?”

이미 물 건너갔다고, 정의원 측근에게 들었지만, 라희는 모르는 척 물었다.

“지가 나한테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이번에도 물 먹이면 나도 가만 안 있어. 검찰 가서 다 불거야. 씨발, 지난 번에 이로운 껀이 성사됐어야 하는 건데...”

성빈은 혀를 찼다. 대학 동창인 윤상무와 작당해 이로운을 캐슬럭까지 끌어들이고도, 놓친 게 두고 두고 후회스러웠다.

정의원이 이로운을 탐낸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듣고 있었다. 각종 루트를 통해 그녀에게 연락을 취한 모양이던데, 번번이 거절당했단다.

윤상무가 그것 때문에 이로운과 접촉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창피를 당한 뒤로는 더 안달을 내고 있다는 후문이었다.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결코 무시 못할 정의원을 거절하다니, 이로운이 아직 매운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음침한 눈빛을 번뜩였다.

“오늘 김비서랑 얘기 좀 더 해봐야겠어. 마누라를 한 번 동원해야 할까봐. 다른 말은 하지 말고, 술자리 한 번 만들라고 해야지. 그리고 들이닥치면 지가 어쩌겠어.”

“자기 마누라랑 이로운이 절친이랬지?”

성빈은 인상을 썼다.

“생긴 건 정 반대야. 이로운만큼만 예뻤으면 내가 업고 다녔다.”

라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병신 같은 새끼. 지랄하네. 지 주제도 모르고. 지금도 니 마누라 업고 다녀야 해. 미친놈아!'

“헉... 헉, 난 라희야. 너 없으면 이제 안 돼. 이번에 돈 받으면, 마누라한테 이혼하자고 말할거야. 너랑 결혼할거야.”

'결혼 같은 소리 하네.'

라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은 돈 때문에 아쉬워 만났지만, 이제 더 이상 단물 빨아먹을 것도 없었다. 이미 도박빚이 산더미일 테니까.

장성빈이 도박 중독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도박으로 날릴 재산, 그녀가 좀 썼다고 해서 뭐가 문제랴.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지석과 만나려면, 당분간은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 게 좋겠지.

“근데, 이로운이 그렇게 이뻐? 우리 가게에 걔보다 더 이쁜 애가 얼마나 많은데. 정의원 눈도 참 낮다.”

성빈이 킬킬거렸다.

“그러게, 나이만 쳐먹더니 노안이 와서 그래. 내 눈에는 니가 이로운보다 백배는 이뿐데, 수준은 무슨...”

라희의 사나운 눈초리에 그는 얼른 말을 바꿨다.

“우리 집 여편네가 그러는데 이로운은 남자라면 질색한단다. 어릴 때 안 좋은 기억이 있다지 아마.”

“안 좋은 기억?”

“뭐 잘은 말 안하는데, 남자한테 성폭행 당한 적이 있다나봐.”

“정말?”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유독 로운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이도 엇비슷한데다 사춘기 시절부터 이로운 닮았단 소리를 많이 들었다.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것도 이로운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이로운은 이미 하이틴 스타였다.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여신으로 불렸다. 이로운을 닮은 그녀도 덩달아 인기를 누렸다.

가난한 부모가 지독히도 싫었던 그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연예인 기획사를 찾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영화배우 시켜 준다던 기획사 사장은 그녀에게 접대부터 가르쳤다. 이 바닥에서 크려면 다 이렇게 하는 거란 말에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클 수만 있다면, 옷 벗는 게 뭐가 대수랴. 거기다 아르바이트로는 생각도 못할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 일석 이조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때, 연예인이 아니라 강남의 유명한 텐프로가 되어 있었다. 나쁘다는 생각은 안했다. 그저 그런 연예인이 되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더 수입도 많았으니까.

그렇게 이십대를 보내고, 이제 삼십대의 문턱에 다다랐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남편만 잘 만나면 그녀가 이로운보다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몸뚱이 굴려 벌어먹고 사는 건 같지 않은가?

쭉정이만 남은 장성빈 따위 보다는 강지석이 탐이 났다. 텐프로라는 주홍글씨를 떼고, 명망 있는 의사의 아내로 살고 싶었다. 높이 날고 싶었다. 가능하면 이로운 보다도 더.

“흐억! 라희야. 사랑한다.”

헉헉거리는 장성빈 뒤로 스톤의 거대한 땅이 보였다. 하늘 위로 우뚝 솟은 천공의 성이 바로 그녀가 원하는 곳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스톤의 성.

라희의 눈빛이 다시 사납게 타올랐다.

'캔디? 대체 어떤 년이야. 내 눈 앞에서 강지석을 가로 채다니...'

게임에서 가장 탐 나는 사냥감,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녀를 의사 사모님으로 만들어 줄 사내를 코앞에서 뺏길 줄이야.

하지만 상관없다. 곧 그녀 차지가 될 것이다. 다른 여자의 남자를 뺏는 것이야 말로 바로 그녀, 유라희의 특기였으니까.

스톤의 랜드 매니저로 들어간지 한 달, 유능하면서도 섹시한 여자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강지석이 파트너 제의를 해오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게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게임에서 자신을 안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다.

인맥을 동원해서 강지석의 병원에도 다니고 있었다. 우울증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넌지시 말도 했다.

파트너가 된 후에, 자신이 쥬엘이라는 걸, 말할 셈이었다. 게임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알고 보니 자신의 환자였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라희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강지석은 도통 틈을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예의바른 말투와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한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캔디라... 누구지? 게임 회사 김 부장을 한번 만나야겠군.'

라희는 자신이 너무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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