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 도발
* * *
“김진택, 그 새끼가 정말 그랬다니까... 그럼 가만 두지 않으면? 고소하냐? 당분간 안 볼 거야. 드라마고 영화고 다 깔 거야 내가. 남은 계약기간동안 내가 하나 봐라... 안 하면, 지가 어쩔 건데? 진짜 내가 똥 밟은 생각만 하면...”
로운은 윤서랑 통화를 하며 집으로 들어섰다. 젖은 옷에서는 아직도 풀풀 와인냄새가 풍겼다.
“아우, 이거 협찬인데 어뜨케... 아 참, 나 거기서 니 남편 같은 사람도 봤다... 정확한건 아니고, 마스크 써서...”
윤서는 지금 자료 조사차 대만에 가 있다고 했다. 거기서 어떻게 나왔냐는 질문에 로운은 그냥이라고 얼버무렸다.
강지석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 기묘한 키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응... 들어와서 보자.”
로운은 스마트폰을 침대로 던졌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 현실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장식 된 거울 속에 파리한 얼굴이 보였다. 겁먹은 표정의 젊은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아야!”
습관처럼 입술을 빨다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부풀어 오른 입술 한 쪽에 터진 상처가 있다는 걸 몰랐다.
“아씨... 터졌잖아.”
로운은 손끝으로 가만히 입술을 쓸어보았다. 상처 부위가 얼얼하고 쓰라렸다.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제 얼굴에 손을 대보았다. 얼음처럼 차갑다. 하지만, 아까는 불처럼 뜨거웠다. 뜨거워서 데일 것 같았다.
잡아 삼킬 것처럼 그녀를 탐하던 입술, 밀고 들어오던 뜨거운 그의 혀, 입 안을 온통 헤집어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던 격렬함. 터질듯한 심장의 고동소리. 그리고...
그녀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저도 모르게 바짝 조여드는 가슴의 은근한 통증이 낯설어 고개를 숙였다.
슬립 위로 빳빳하게 곤두선 젖꼭지가 볼록 튀어 나와 있었다. 가슴을 쥐어 터뜨릴 것처럼 우악스럽게 움켜쥐던 지석의 손...
그녀의 입술을 미친 사람처럼 빨아들이며, 가슴에 손가락을 박던 그를 떠올린 순간, 아랫배가 뭉치듯 조여들었다.
“나 뭐야...”
로운은 손을 위로 올려 부푼 가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끝으로 톡 곤두 선 정점을 건드린 순간, 전율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어머, 어머, 이로운, 너 지금 무슨 생각 했니? 야한 생각 했지? 미쳤나봐 진짜!”
로운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둘러 샤워기를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오늘의 일을 모두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세찬 물줄기가 가슴에, 몸에, 다리 사이에 닿을 때마다 예리한 자극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자신을 억세게 끌어안고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밀어붙이던 지석의 행동, 거칠고 난폭한 손길이 그녀를 겁먹게 했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로운은 왜 자신이 지석을 밀쳐내지 않았을까 이상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묘한 전율이, 지금까지는 더럽고 추하다고만 생각했던 접촉이 궁금했다.
“왜 가버린 거지?”
로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석은 분명히 흥분해 있었다. 아랫배에 와 닿던 그 끔찍하게 커다란 남성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 어째서 중간에 그런 식으로 나가 버린 걸까?
'설마 나와 스캔들이 날까봐서? 아니면, 내가 성적 매력이 없어서?'
인터넷 댓글에 그런 악플이 자주 달리긴 했었다. 이로운은 인형처럼 예쁘기만 하지, 여자로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섹시함이 부족하다는 평론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강지석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내가 그런 자리에나 불려 다니는 여자라고 생각한 걸까? 잘 나신 의사양반이랑 격이 안 맞아서?
그가 아닌 이상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사과를 받았어야만 해!”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의 무례를 바로 지적하지 않았던 걸까? 그가 키스한 바로 그 순간에 밀쳐냈어야만 했다. 성추행이라고 쏴붙여야 했다.
“다음에 만나기만 하면 절대로 그냥은 안 넘어갈 거야. 두고 봐. 깡패 같은 자식. 내가 그 잘난 척 하는 가면을 반드시 벗겨줄 테니까.”
그녀는 가운을 입은 채, 머리를 말리다, 침대 위에 놓인 노트북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 낮에 매니저가 로운의 부탁으로 사다 준 것이다.
“있을까?... 있네.”
스톤의 모습을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오늘 낮에, 두 번 다시 접속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누구와든 대화를 하고 싶었다. 차갑고 썰렁한 침대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훌쩍거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어스름한 방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스톤은 그녀가 접속한 걸 모르는 듯 했다.
“나, 왔어요?”
그녀가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쩌면 세워놓고 자러 간 것일수도 있다. 늦은 시간이었으니까.
“무슨 남편이 이래... 마누라가 집에 안 들어왔는데 걱정도 안 하고...”
로운은 왠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어 중얼거렸다. 그의 주위를 빙빙 돌아보다가, 심심해서 널찍한 등을 툭 건드렸다.
스톤이 휘청하더니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쿡 하고 웃었다.
원래대로 라면, 그녀가 친다고 해서 움직일 리 없었다. 그가 캔디에게 자신의 몸에 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설정한 모양이다.
“재밌네...”
그녀는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계속 그의 등을 밀어, 침대 앞까지 전진시켰다.
로운은 물끄러미 스톤을 보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엉망인 기분일 때, 괜찮다고 말해줬음 좋겠어... 안아주고 키스해 주면...”
그때, 갑자기 IM 창에 메시지가 떴다.
-파트너인 스톤님이 키스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로운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이제 들어온 건가? 내 말을 들었나 보다.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강지석의 '제발' 이라는 목소리가 떠올라 버렸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다들 나한테 이래?'
그녀는 머릿속에서 강지석을 몰아내고, 핀잔하는 투로 말했다.
“이건 또 뭐에요? 전에는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마구 하더니, 이젠 결혼까지 했으면서 수락해달라는 건 또 뭐래?”
“...키스해 달라며?”
“내, 내가 언제요?”
로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전에, 분명 들었어. 키스해주면 좋겠다고 한 말.”
잠을 자다 깼는지 스톤의 음성은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또 다시 아야, 신음했다.
“어디 다쳤어?”
“아니에요. 입술이 좀...”
“... 누구랑 키스라도 했나?”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로운은 웃고 말았다.
“왜요? 질투해요?”
“설마... 당신 리얼 라이프는 관심 없어. 내 파트너는 이곳에 있는 캔디니까. 여기서만 바람 안 피면 돼.”
“어머나, 무서워라.”
그녀는 놀리듯 말했다. 남자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재밌었다.
“말해 봐요. 내가 여기서 다른 남자 만나면 질투할 거에요? 정말 기분 나쁠 거 같아요?”
“키스, 안 할 건가?”
로운은 자신이 아직까지 그의 신청을 수락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마우스로 Y를 클릭했다.
“흥! 그렇게 피해간다 이거죠?”
스톤과 캔디가 마주 서더니, 서로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스톤은 따스하게 미소 짓더니, 상냥한 손으로 캔디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볼을 쓰다듬고 귓불을 어루만졌다.
캔디가 스톤을 손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볼에 대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로운도 무심코 자신의 볼을 쓰다듬다, 얼굴을 찡그렸다.
'저건 너무 바라는 것 같잖아. 여자가 자존심도 없게.'
스톤의 고개가 숙여지고, 캔디의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둘의 입술이 몇 번 붙었다 떨어졌다 하더니 단단히 밀착되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 턱 밑에 손을 괴고 중얼거렸다.
“키스가 아름답다고 느낀 게, 온라인이라니 웃기죠? 난 남자와 여자가 어째서 사랑을 나누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고통과 상처뿐인데...”
스피커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런지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로운은 고개를 들었다. 스톤과 캔디는 아직도 낭만적인 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슨... 의미에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야. 직접 부딪히는 것, 통과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지.”
어쩐지 의사 같은 말투에 로운은 짜증을 냈다.
“돌려 말하지 말고, 알아듣게 얘기해요.”
스톤의 퉁명스러운 대꾸가 들려왔다.
“현실의 남자를 만나라는 거야. 여기 갇혀 살지 말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현실에서 만나자고 날 꼬시는 거야? 헐, 몇 번이나 봤다고, 윤서가 절대로 현실에서 보자는 말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로운은 정색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혹시, 지금 실제로 만나자고 제의하는 거라면, 어림도 없어요.”
살짝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니, 내가 당신과 만나자는 게 아니야. 난 여기 있을거야. 앞으로도 쭉, 하지만, 당신은 여기보다는 바깥 세계가 더 어울려. 곧 좋은 남자도 만날 수 있을거야.”
뭐지, 이 남자? 왜 이렇게 허둥거리는 거야.
그녀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쌀쌀맞게 말했다. 저건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잖아.
“뭐래? 좀 전에는 바람피지 말라더니, 지금 결혼하지 이틀밖에 안 된 신부에게 밖에 나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하는 거에요? 왜요? 벌써 내가 싫어졌어요? 괜히 결혼했다 싶어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강지석이 키스하다 말고 내뺀 것도 찜찜했는데, 스톤까지 자신을 거부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게 아니라니까. 어차피 여기는 가상 세계야. 로그아웃하면 단절 되는 곳이지. 당신에게 좋을 게 없어. 밖에 나가서 진짜 남자를 만나... 나 말고...”
“진짜, 웃긴다.”
로운은 팔짱을 끼고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게 스톤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냥 이혼하자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뭐에요. 사람 기분 나쁘게. 자기 맘대로 결혼하잘 땐 언제고... 궁합도 좋다고 해 놓고.”
말하다보니 캐슬럭에서의 일까지 떠오르고 말았다. 오늘은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이런 취급을 받는 날인가 보다.
“여기 있어봐야 더 허무해질 뿐이야. 이곳에서 행해지는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이건 경험자로 충고하는거니까. 잘 들어. 지금 당장 이 게임을 접어. 그리고 당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 이왕이면 남자들을. 주변에 많을 거 아냐.”
“많긴 뭐가 많아요. 당신이 봤어요?”
차가운 스톤의 말에 로운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지가 뭔데 날 먼저 차? 차도 내가 먼저 찰 거야. 흥, 일단 나한테 빠지게 한 후에. 보란 듯이 게임 접어 버릴거야. 그냥.'
“그 전에... 당신이 먼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그녀는 일부러 달콤하게 속삭였다.
“전에 그랬잖아요. 당신이 정상적인 남자라면 나한테 섹스의 즐거움을 가르쳐줬을 거라고... 당신도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거라면서요? 여자와 해보고 싶어서... 나랑 해봐요.”
스톤이 숨을 훅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로운은 속으로 깔깔 웃었다.
'이거 왜 이러셔. 이래뵈도 내가 멜로물을 몇 편이나 찍은 몸이야. 실제가 안돼서 그렇지 이론과 간접 경험은 빠삭하다구. 스톤 리버, 당신 나한테 잘못 걸린거야.'
그녀는 이유 모를 흥분에 휩싸였다. 개떡 같던 하루가 흥미진진해지는 느낌이었다. 로운은 키스만 하고 있는 스톤과 캔디를 보면서 물었다.
“지금 뭐 입고 있어요?”
“그건... 왜 묻지?”
로운의 손이 바빠졌다. 스톤만 캔디에게 결혼반지를 선물한 건 아니었다. 스톤이 낀 반지에도 같은 기능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키스를 중단하고, 스톤에게 허니문 플레이 3번을 제안했다. 그게 뭔지는 그녀도 모른다. 7번까지 있는 애니메이션 플레이 중에서 아무거나 선택한 거니까.
“뭐... 하자는 거지?”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은밀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거랑 똑같이 해봐요. 우리...”
그녀는 캔디가 스톤을 침대 위로 넘어뜨리는 장면을 보며 가벼운 휘파람을 불었다.
좋았어. 3번, 이거 아주 맘에 드는데.
“장난 하자는 건가?”
“보면서 상상만으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당신도 캔디랑 직접 한다고 생각하고, 나도 스, 흠, 스톤이랑 한다고 상상해볼게요.”
그 말을 할 땐, 왠지 목이 잠겨서 몇 번 가벼운 기침을 해야 했다.
“어리석은 짓이야.”
“그러니까 어리석은지 아닌지 해보자구요. 어차피 여긴 가상의 세계니까. 원하면 뭐든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로운은 키득 웃었다. 마침내, 스톤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그녀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희희낙락해서 말했다.
“어머나, 보면 몰라요? 내가 당신을 덮치고 있잖아요. 그것도 아주 섹시하게,”
'좋았어. 너 내가 이 게임 초보라고 만만하게 봤다 이거지? 흥, 이 정도야 대본 리딩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식은 죽 먹기지.'
그녀는 눈에 보이는 장면을 마치 대사와 지문을 읊듯이 빠르게 설명해 나갔다.
“난 당신 옷을 벗기는 중이에요... 셔츠를 벗기고, 가슴에 키스를... 느껴봐요.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고 있다니까. 와우, 근육이 엄청난데요. 실제로 이런가? 풋, 아, 미안해요... 웃어서. 당신이 실제로도 저런 모습이라면 여자들에게 정말 인기 많을텐데. 어머나, 실례인가. 아, 이젠 바지를 벗기고 있어요. 키스하면서요. 그리고 손으로 당신의 피부를 애무하는 중이에요. 천천히... 가슴과 배... 그리고 더 아래로, 음...”
로운은 신이 나서 설명하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아... 저건... 음...”
캔디의 다음 행동을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스톤의 우람한 페니스를 쥐고, 손을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 나는... 당신의...”
로운은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장면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기껏 도발한 보람이 없었다. 하지만 저걸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적당한 말을 떠올리며 손톱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스피커에서 거친 숨소리와 억눌린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만져줘... 제발...”
스톤의 애원에 로운은 흠칫, 긴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입가에는 순수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 봐.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까. 남자를 유혹하는 것쯤이야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구. 이까짓 게임에서 내가 겁먹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여긴 가상세계라고, 이곳의 행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던, 스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캔디는 능숙하게 그의 페니스를 주물렀다. 우뚝 솟은 검붉은 기둥을 잡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일 때마다 끝에서 하얀 액체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 음...”
그 적나라한 광경에 로운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짧은 감탄사만 내는 중이었다.
'우와, 캔디, 쟤 왜 저렇게 야한거야. 어젠 저런 건 안했잖아?'
“으음... 잘하는군. 좋아, 그렇게 하는거야. 더 세게. 아래 위로 움직여. 조여 봐.”
다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목소리가 다르다.
로운은 그제서야 이게 플레이에 포함된 대화라는 걸 깨달았다.
'뭐야? 좀 전에도 스톤이 한 말이 아니야?'
갈색으로 잘 그을린 스톤의 다부진 몸은 그녀가 어루만질 때마다 당당하게 솟구쳤다.
“좋아! 더! 더!”
스톤은 능숙하게 캔디를 조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스톤이 아니었다. 그녀는 갑자기 맥이 빠졌다.
'어디 간 거야 이 남자. 설마 가 버린 건 아니겠지?'
스피커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남자와 여자의 거친 신음소리를 뚫고, 낮고 억눌린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죽인 듯한 그 소리야말로 진짜 스톤이었다.
이상한 떨림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운은 스톤 뒤에 숨어 있는 사내가 궁금했다. 정말로 여자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진지하게, 그를 유혹하고 싶다는 악마적인 충동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로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날 원하죠?”
지석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돌처럼 단단해진 페니스가 고통을 호소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운은 그 단호한 말투에 이마를 찡그렸다. 이대로 물러나기 싫었다. 스톤을, 아니 스톤 뒤에 숨은 이 남자를 흔들어놓고 싶었다. 자신처럼.
“거짓말... 나랑 하고 싶잖아요.”
로운은 캔디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숙여지는 것을 보면서 떨리는 숨결을 토했다. 매끄러운 실크 잠옷 아래서 유두가 뾰족하게 곤두 서는 게 느껴졌다.
가슴 전체가 서서히 뭉치고, 지석에게 잡혔던 부분이 은은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흡이 가빠졌다. 차가운 손가락을 옷 사이로 집어넣었다.
구슬처럼 튀어 오른 유두에 손끝이 스치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로운은 훅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요?”
지석은 손등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페니스는 이미 통제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저주했다.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페니스를 꽉 쥐었다.
“그만해.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
“싫어요.”
로운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가슴이 뛰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흥분되고 아찔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싫으면... 가 버리면 되잖아요.”
그녀는 왼 손을 잠옷 속으로 집어넣어 가슴의 정점을 건드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른 손은 날씬한 배를 지나 풍성한 검은 숲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이제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요.”
그녀는 캔디가 스톤의 허리에 걸터 앉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가느다란 몸이 활처럼 뒤로 휘어졌다.
“하지 마!”
스톤이 난폭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로운은 멈출 수가 없었다. 다리 사이로 들어간 손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서 살짝 튀어나온 돌기를 손가락으로 꼭 누르고 비벼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녀의 입에서 연거푸 참지 못한 신음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로운은 몸을 비틀었다.
스톤의 손이 부풀어 오른 캔디의 가슴을 꽉 쥐는 순간, 로운은 똑같이 자신의 가슴을 짓뭉갰다. 허벅지가 당겨지고, 발끝까지 뻣뻣해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채로 몸을 쭉 뻗었다. 몸서리를 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강하고 거칠게 자신을 몰아가고 싶었다.
“으응... 이걸로는 부족해...”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로운은 헉헉 거리며 스스로를 자극했다. 한 순간, 체온이 확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크리마스 전구가 켜지듯, 날카로운 쾌감이 작고 뾰족한 한 점을 벼락처럼 강타했다.
“아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린 그 순간, 로운은 어째선지 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크헉!”
지석은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힌 그 액체를 보고 있었다. 부서질 정도로 악물린 어금니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반쯤 힘이 빠진 페니스는 아직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이 필요했다.
매끄럽고 따스하고 좁은 어떤 곳, 부드러운 육체 속으로 파고들어, 성난 짐승을 풀어 놓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지금까지 여자를 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동안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은 것은 언제나 그였지만, 역할은 바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의 그 곳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으니까. 그의 결벽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정은 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원하는 때에 빠르고 간결하게. 상대는 이성을 잃을지언정, 그는 완벽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부정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지석은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키스했던 로운이었다.
녹아 버릴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 달콤한 와인향, 뜨겁고 격렬하게 자신의 혀를 휘감아오던 그녀의 입 속.
또 다시, 손 안에서 부피를 더해가는 페니스를 보면서 그는 간신히, 조용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만, 이제 그만해. 당신은 충분히 날 시험했어.”
오년 동안의 금욕이 그의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저쪽에서 빠른 숨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지석은 대체 로운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다시 나한테 가라고 해 봐요. 현실로 나가라고 말해 보라구요.”
로운은 할딱거리며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럴 수 없을 걸요. 왜냐하면 당신이 날 더 필요로 하니까요. 난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은 날 원하고 있어요.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날 원하잖아요.”
지석의 턱이 불끈거렸다. 그는 잠시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여기서라면... 인정할 수 있다.
“그래, 당신을 원해...”
“그것 봐요.”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공허함이 안도감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한 순간의 절정이 지나간 후에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기 연민이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씁쓸하기만 했다.
남성 혐오증이라고 하지만, 그녀 안에는 이렇게나 음란한 여자가 숨어 있었다. 남자가 혐오스러운 게 아니라, 쾌락에 굴복하고 만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톤의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녀는 우습게도 작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나른한 몸은 아직도 익숙치 못한 쾌감의 여운을 간직한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만 게임을 종료해야만 했다. 스톤이 자신에게 굴복했다는 걸, 두고 두고 놀려 먹을 생각이었다.
“안고 싶어...”
그런데 스톤의 낮은 음성이 그녀를 잡았다. 행위에 몰두한 신음 소리가 아니라, 애절하고 슬픈 목소리였다.
“만지고 싶어... 당신에게 키스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로운은 아랫배가 짜르르 뭉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한 번, 몸을 달군 열망이 빠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이제 가려고...”
지석이 막 가지 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메시지 창에 쥬엘의 IM이 들어왔다.
-보스, 어디 계세요?-
그는 쥬엘이 사흘만에야 접속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로운을 잡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난 이만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하지만, 짧은 망설임 끝에 로운이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석은 밀려드는 상실감을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털어냈다.
-보스! 설마 결혼했어요?-
경악에 찬 쥬엘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는 무시하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몸을 진정시킬 게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