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6)

* * *

그날 밤, 로운은 진택과 함께 캐슬럭의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곳에는 클럽 캐슬럭이 있었다.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하며, 초대 받지 못하는 손님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녀는 연한 푸른색의 프릴이 달린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깊이 패인 가슴 선에 장식된 프릴 사이로 작은 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우아한 몸매를 감싸듯 내려간 원피스는 무릎 아래에서 살짝 퍼져 그녀의 날씬한 종아리를 더욱 부각시켰다.

“천하의 이로운이 싸구려처럼 보이면 안 돼. 섹시하지만, 도도해야지. 그게 이로운의 컨셉이니까.”

스타일리스트 실장은 진택의 주문에 따라, 그녀에게 드러난 어깨를 가릴 수 있도록, 밍크 숄과 불가리의 클러치 백, 불가리의 와인컬러 소재의 시계를 내밀었다.

그녀의 대답 대신, 닥스의 스틸레토 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매끄러운 복도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진택은 차가운 모습의 로운을 보면서,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들어가서는 천사처럼 웃어야 돼. 지금 하고 있는 CF까지 전부 넘기고 싶지 않으면.”

“유일 건설 빽이 그렇게 셌어?”

소용돌이 무늬가 조각된 웅장한 마호가니 문 앞에서 로운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일 건설은 후진데, 윤 상무가 속한 모임에서 너 버릇 좀 들여야겠다는 소문이야. 지난 번, 연말 모임의 해프닝 결과지.”

책망하는 듯한 진택의 말에 로운의 고운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높으신 분들께 잘못 보였다는 얘기인가?

“무슨 모임인데?”

“그건 알 거 없고, 이거만 기억해. 거기서 찍히면 너 우리나라에서는 배우 못해. 그럼 외국 가야하고, 허접한 조연부터 오디션 봐야 하는데, 난 그거 뒷바라지 못해.”

진택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 뒤에 얼마나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는지 로운이 익히 알고 있었다.

“무섭네, 겁주는 거야? 나 덜덜 떨어야 해?”

로운은 그의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농담 아냐. 그러게 진작에 든든한 줄 하나 잡으랬잖아. 지금 잘 나가니까. 이로운 인기가 영원할 거 같지? 톱스타? 그 타이틀이 얼마나 갈 거 같아? 이 바닥에서 여배우 하나 추락 하는 거, 눈깜짝이야.”

진택이 그녀에게 얇은 은색의 마스크를 내밀었다.

“네 자존심을 지켜줄 도구야. 여기서는 다 똑같은 마스크를 쓰는 게 룰이거든. 일종의 배려지. 벗을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안 벗어도 돼. 누구도 네가 이로운이라는 걸 모를거야.”

그녀는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듯 마스크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내가 이로운인지 모를거라고? 웃기고 있네.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야.

“이게, 김대표가 말하는 좋은 소식이야?”

진택은 악수하듯 자신의 양손을 잡고 살짝 비볐다.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기에 따라선, 생각하기 나름이야. 이 모임 리더가 널 직접 지목했으니까. 이건 우리에겐 또 다른 기회일수도 있어.”

“우리? 당신이겠지?”

로운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아직 계약 기간 남았으니까 우리가 맞아. 이 모임에 초대되지 못해서 안달인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니가 알면 오히려 놀랄걸.”

“내가 여기서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진택의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소속사 문 닫아야지.”

“이럴려고 폭스에 들어갔어? 배우들 키워보겠다고, 거대 기획사랑 합병하는 거라더니, 결국, 이런 거로군.”

로운은 앙칼지게 말했다. 아무리 진택이 그녀를 스타로 키워준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진택은 딱딱하게 말했다.

“이 바닥 이런 거, 너도 모르지 않고, 나도 감춘 적 없어. 얌전히 살고 싶었으면 튀지도 말았어야지.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야. 정 싫으면 쇼룸이라고 생각하고 한 시간만 버텨.”

그녀는 빈정대듯 말했다.

“그래. 한 시간! 김 대표 말대로 그까짓거 마네킹처럼 예쁘게 앉아 있다가 나와 주지.”

“네가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너 혼자 감당해야 할 거야.”

그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번졌다. 로운은 죽일 듯이 진택을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그녀가 다가가자, 문 양쪽에 서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육중한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 안쪽에서 다시 카펫이 깔린 복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붉은 벨벳 휘장에 가려진 작은 문이 보였다.

로운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자신의 생각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다.

배우 생활 십년, 돈과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인간들에게 여배우는 갖고 노는 예쁜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요샌 텐프로들이 여배우보다 훨씬 예쁘잖아요.'

갑자기, 지난 번, 강지석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텐프로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그녀는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운에게 쏠렸다. 정장을 차려 입은 여자와 남자들은 모두 그녀가 쓴 것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법한 그 가면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가면을 벗지 않는 한, 누구도 이로운이 이곳에 왔다는 걸 증명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치, 게임 속 같군.'

바로 오늘 아침, 온라인 세상에서 빠져 나왔는데 현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로운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갔다.

호텔 캐슬럭의 지하에 회원제 클럽이 있다는 사실은 그녀도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국내외 유력인사들이 다 모이는 곳이라던가.

하지만, 소문만 거창했지. 고급스럽다는 점만 빼면, 여느 클럽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분위기였다.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 쪽에서 당구를 치거나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운이 칵테일 바 끝의 빈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누구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로운 아닌가? 정말로 왔군.”

술에 취한 듯, 킬킬거리는 음성을 듣자마자 로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온 몸에 돋는 소름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윤 상무, 이 개 자식'

그녀의 눈에 불똥이 확 튀었다.

지난 번, 일로 앙심을 품고, 날 여기 오게 만든 게 너란 말이지? 오냐, 너 잘 만났다.

“어머나, 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이로운 닮았다는 말.”

로운은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며, 달콤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당신은 내 호기심을 끌 만한 누구와도 닮지 않았네요.”

비아냥거리는 말에, 은색 마스크 아래 두툼하게 살집이 진 턱이 씰룩거렸다. 윤상무는 그녀의 손목을 와락 잡아챘다.

“이로운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이야 다 똑같으니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질수 있는 것들이지.”

그 말로 이곳에 초대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그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그 말은 반대도 된다는 뜻이군요. 돈만 있으면, 저도 여기 있는 것들, 아무나 고를 수 있겠네요. 어떻게 해도 관심이 안 생길 것 같은 당신만 빼구요.”

윤상무의 턱이 굳어지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로운을 억지로 끌고 가려 했다. 근처의 남녀들이 재밌는 구경이라도 난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뾰족한 힐 끝으로 윤상무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악! 이 년이!”

그가 거친 욕설과 함께 주먹을 올리는 순간, 주변에서 여자들의 작은 비명과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운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서는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꺄악!”

깜짝 놀란 로운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러 그자를 때리려고 했다.

“이크, 조심!”

나타난 사람은 가느다란 그녀의 팔을 간단하게 제압해서는 가슴 앞 쪽에서 교차시켜 잡았다. 그리고는 뒤에서부터 안는 자세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희미한 남자의 로션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로운은 기절할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예상치 못한 남자와의 접촉에 심장마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간신히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목에서 쥐어 짜내는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놔요.”

로운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잔뜩 경직시켰다. 등줄기에 닿은 몽둥이 같은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뜨겁고 꿈틀거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순간, 그녀는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고,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게 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귓가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를 보낼 때까지, 조금만 참아 봐요.”

무식할 정도로 단단해진 페니스를 엉덩이에 눌러대고 있으면서, 조금도 흥분한 것 같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흑...”

그녀는 목 안 쪽으로 흐느낌을 삼켰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서지 마! 이건 마스터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윤상무가 헐떡거렸다.

“흐음, 이곳에서 폭력은 추방의 이유가 된다고 했을 텐데요. 회원님.”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듯, 뒤쪽의 사내는 로운의 어깨를 턱으로 지그시 누르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다.

로운의 젖은 볼에 따스하면서도 거칠거칠한 사내의 볼이 스쳤다. 화끈한 그 감각에 그녀는 또 다시 흠칫, 했다.

눈 바로 옆에 금빛의 마스크가 보였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옆에 찰싹 붙여놓았다.

“이번에는 마스터가 나서도 안 될 걸? 그 여자를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분이거든.”

윤상무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 분? 로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치권에서 유일 건설의 뒤를 봐주고 있다더니, 그걸 믿고 윤상무가 이렇게 나오는 거군,

“당신도, 그 분이 이 여자를 원해서 데려 온 거 아닌가?”

로운은 자신을 안은 그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움찔했다.

자신의 눈 옆에서 위쪽으로 보기 좋게 올라가는 입꼬리의 주름이 보였다.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이 분은 오늘, 제 손님으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윤 상무는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호기롭게 말했다.

“당신 지금 크게 실수하는 거야. 여기서 장사하는 게 다 누구 덕인지 알고나 까부는 거야?”

마스터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 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 이 건방진 놈! 너 장사 그만 접고 싶어! 그 년, 얼른 안 내놔!”

윤상무는 버럭 고함을 쳤다. 아까부터 로운을 한 대 패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주먹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그 주먹은 마스터의 손에 붙잡혀, 그대로 뒤로 꺾여 버렸다. 그는 한 손으로는 윤상무의 주먹을 꺾고, 다른 손으로는 로운의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윤상무의 몸이 휙 날아가 테이블로 쪽에 쳐 박히자, 실내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로운은 윤상무가 넘어진 곳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운데 체구가 작은 중년 사내를 빙 둘러 싸고 앉아 있는 남자들은 누가 봐도 힘깨나 쓸 법한 덩치들이었다.

윤상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덩치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치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려고 하자, 중앙에 앉아있던 키 작은 중년 남자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늙수그레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어허, 이거야 원, 고 회장이 그간, 돈 많이 번 모양이야.”

아무래도, 그 중년인이 윤 상무가 말한 그 분인가 보다. 로운은 자신의 앞을 가린 마스터의 어깨 너머로 그 분이 누군지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정확한 용모를 알기는 어려웠다.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며 로운을 가린 사내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자네가 이곳 담당자인가? 고 회장에게 좋은 대접 받았다고 전하시게.”

중년인과 덩치들이 나가고, 윤상무가 절룩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 중,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로운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띠었다.

'저 사람... 분명 아는 사람인데? 어디서 봤더라.'

그녀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빼는 순간, 마스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 성큼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봐요? 어디 가는 거에요?”

로운은 깜짝 놀라서 그의 손에서 자신의 팔목을 비틀어 뺐다. 하지만, 강철처럼 손목에 달라붙은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꺄악! 이거 놔요. 날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에요?”

로운은 겁이 나서 마구 비명을 질렀다. 사내는 복도를 지나 죽 늘어선 방문 중 한 곳을 열더니, 그녀를 쇼파로 집어 던지듯, 확 밀쳤다.

“일이 정말 귀찮게 됐군.”

차가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다시 금빛 마스크를 쓴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마스터가 둘이야?

로운은 깜짝 놀라서 자신을 데려온 사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남자가 새로 나타난 남자보다는 안전한 것 같았다.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 이번 일은 형님이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정 의원과 척을 진 걸, 고회장님이 알면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뒤이어 방에 들어온 사내는 자신을 데려온 사내보다 키는 비슷했지만, 체구는 훨씬 컸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몸이 좀 전에 봤던 그 덩치들과 비슷해 보였다.

혀, 형님? 이 사람들 뭐야? 깡패야? 아까 윤 상무도 그랬지. 장사 접고 싶냐고... 고급이니 어쩌니 해도 여기 술 장사, 여자 장사 하는데잖아, 어머나 정말 깡패 소굴 맞나봐. 나 어떻게 해...

로운은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연예계가 조폭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로운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일진이 사납더니, 아주 제대로 더러운 꼴을 당하게 될 모양이었다.

“설마, 정 의원이 왔을 줄을 몰랐어.”

로운의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듣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답답하단 듯이 마스크를 휙 벗었다.

“저도 갑자기 연락 받았습니다. 이로운씨가 온다는 것두요.”

군인처럼 짧은 머리에 단단하고 네모진 얼굴, 볼 쪽에 커다란 흉터까지 있는 남자는 딱 봐도 범죄 조직의 두목처럼 보였다.

그 험상궂은 모습에 로운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사내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살짝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클럽 캐슬럭 지배인인, 신 주형입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남자는 그 자세에서 고개만 들더니 이를 드러내고 씨익웃었다. 생긴 것 답지 않게 순박한 웃음이었다.

“근데, 억수로 이뿌네요. 나도 가게 하면서 이쁘다 하는 아가씨들은 진짜 많이 봤는데, 이로운씨는 직접 보는게 훨씬 이쁩니다. 형님 말대로 카메라 빨이 진짜루 안 받는거네요.”

“너 쉰 소리 할래?”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가 갑자기 엄청 큰 소리를 질렀다. 뒤에 있던 로운은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로운. 여기서 기죽으면 안 돼. 호랑이 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어.

“뭐, 뭐에요? 당신들. 까, 깡패에요?”

로운은 그 험상궂은 모습에 놀라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 뒤로 더욱 바짝 들어갔다. 후우, 깊게 한숨을 쉰 사내는 마침내 마스크를 벗어 쇼파 위로 던졌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던 사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 로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강... 지석씨?”

“진짜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지석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로운을 쳐다보았다. 뒤늦게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철이 든 후로, 그가 스스로 세운 규칙, 사람들 앞에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철칙을 깬 것이다. 이 여자 때문에!

시작은 단순했다. 이로운의 스케줄을 알아보는 것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그녀가 다니는 휘트니스 클럽이 캐슬럭이라는 걸 안 순간, 재밌다고 생각했다.

캐슬럭은 그가 고 회장을 통해 투자하고 있는 호텔 중 하나였다. 우연히 같은 헬스클럽을 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일이 요상하게 돌아갔다.

로운이 도착한 걸 보고, 그가 아는 척 하려는 찰나, 그녀의 소속사 사장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채 가듯, 그의 눈앞에서 이로운을 채갔던 것이다.

지석은 또 한 번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 손을 놨어야만 했다.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이곳까지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도대체 왜? 한 번도 온 적 없는 클럽 까지 와서 이로운의 일에 참견을 했단 말인가. 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이다. 그는 앞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주형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석은 참다못해 차갑게 한 마디 했다.

“흐흐, 예, 형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형이 동네 바보형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는 것만 봐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답이 나왔다.

“너, 이만 나가라, 나 이로운씨랑 얘기 좀 하게.”

그 말에 주형은 허리를 펴더니 다시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되십시오.”

로운은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도끼눈을 뜨고 지석을 노려보았다.

“좋은 시간이라니요? 지금 저 사람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저 자식은 쓸데없는 소리가 특기니까.”

그녀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내가 강지석이라는 걸 안 후부터, 묘하게 공포와 두려움이 반쯤은 사라졌다.

대신 그녀가 느낀 것은 분노와 수치심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만 해도 그녀는 톱스타로서 그를 만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급 콜걸이 된 것 같았다.

지석이 자신을 텐프로랑 비교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류층들에게 그녀가 매춘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그녀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강지석 앞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을 어떻게든 되찾고 싶었다.

잠시 후, 주형을 따라 들어온 몇 명의 사내들이 테이블 위에 술병과 안주들을 주욱 늘어놓고 나갔다.

이것들이 점점... 날 지금 뭘루 보구...

로운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십오도 정도 바짝 치켜들었다.

우이쒸, 십 센티짜리 힐을 신었는데도 지석의 코 부근에도 못 미쳤다.

“박사님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에요?”

그녀는 주눅 들지 않으려고 더욱 더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정신과 의사 강지석을,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제가 운이 참 좋네요. 그것도 대단하신 마스터씩이나 되는 분이라면서요. 당신 환자들도 이거 알아요?”

그렇지, 약점을 파고 드는거야. 이 사람도 자신이 이런 곳의 마스터라는 건 들키고 싶지 않을 거잖아? 지금까지 의사로서 쌓아올린 자기 명예가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들을 속여요? 겉으로는 의사 행세를 하지만, 실제는 조폭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싸가지가 없었던 거야. 깡패처럼 배운게 없으니까 여자를 막 물건 다루듯이...”

지석의 눈가가 가늘어지자, 로운은 자신이 너무 나갔다 싶어서 말끝을 흐렸다.

'아니지, 배운게 없다는 말은 좀 맞지 않는 거 같네. 이 사람 의학박사라며, 그것도 천재라고 소문난... 배우긴 엄청 배운거지. 암튼, 조폭 주제에 어떻게 의사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생이 조폭인 것은 맞을거야. 틀림없어.'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고 석상처럼 뻣뻣하게 서 있자, 지석이 쇼파에 앉으며 맞은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일단, 좀 앉읍시다. 난처한 상황도 정리할 겸,”

로운은 그가 가리키는 쇼파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어디 한 번 해보시지. 누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줄 줄 알아? 얼굴도 다 까발렸겠다. 너 딱 걸렸어. 나한테 손끝이라도 댔단 봐. 그 잘난 의사 면허 당장 취소되게 만들어줄테니까.'

그녀는 쇼파에 앉아 맵시 있게 다리를 꼬았다. 팔짱은 여전히 낀 채였다. 거만해 보이라고 그런 거지만, 실상은 제 멋대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키기 싫어서였다.

아무리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남자와 단 둘이 호텔방에 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아까부터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서, 로운은 몇 번이나 혀로 입술을 축이는 중이었다.

로운은 입 안의 침을 모아 꿀꺽 삼키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어머나, 매너도 좋으셔라.”

그녀의 비아냥에 지석은 그만 쿡, 웃고 말았다. 몇 번 듣지도 않았는데, 특유의 말투가 귀에 와 박힌 탓이다.

그는 로운을 보지도 않고, 와인잔을 반쯤 채우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좋게 봐주니까. 뭐 가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지만,”

로운은 눈이 샐쭉해졌다.

“아우, 박사님도 참, 제가 너무 친절하게 말해서 못 알아 들으셨나부다.”

그녀는 한껏, 더 빈정거리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니, 더 멋지시네. 근데, 그거 여기 오는 여자들한테 듣는 말이겠죠? 병원보다 여기가 훨씬 더 박사님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훨씬 더 친절하시고...”

그녀는 지석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쓰리피스의 연한 회색 슈트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남자의 몸을 보는 눈이 좀 까다로운 편이었다.

“몸도 훌륭하시네요.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로운은 마지못해 말했다. 의사 가운을 입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오랜 시간 운동한 근육질의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무슨 의사가 저렇게 몸이 좋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나 안았을때도 근육 덩어리였지. 완전 딱딱한...'

거기까지 상상하던 로운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헉!”

등줄기와 와 닿던 그의 단단한 몸이 떠오르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눈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짜르르, 목안을 타고 넘어가는 알콜에 가슴이 화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로운은 그만 사래가 들려 한참이나 콜록거렸다.

“술 못하면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간신히 그녀의 기침이 잦아들자, 지석은 그녀의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왠지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왜, 왜요?”

그녀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손끝으로 훔치며 헐떡임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여배우는 넘어질 때도 화보 같아야 한다는 게 로운의 지론이었다.

“남자들은 여자가 술 마시는 거 더 좋아하지 않나요? 저 술 세요.”

로운은 와인잔을 들어, 이번에는 우아하게 한 모금씩 홀짝거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알콜의 힘을 약간은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남자와 둘이 호텔방에 있다고 해서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이 남자가 알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는가?

지석은 로운을 보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혹시, 지금, 나랑 있는 거 무서워요?”

마치 자신의 속을 읽은 듯이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서 또 다시 벌컥, 와인을 삼켜버렸다.

“헉, 큭, 쿨럭...”

간신히 가라앉은 사래가 또 다시 터지고, 입 안에 한 가득 들어 있던 와인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당황해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일어서려 했다.

“쿨럭... 죄송해요. 저 화장실에... 좀...”

기침도 기침이지만, 고작 그런 말에 동요하는 자신이 싫었다. 참지 못하겠으면 그냥 일어나 가버리면 그만이지, 자존심 세우겠다고 이러고 앉아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지석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물수건을 내밀었다. 로운은 그걸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아뿔사, 이번에는 탁자 위에 있는 와인거치대를 쳐버렸다.

“앗!”

병이 그가 있는 쪽으로 구르며, 붉은 와인이 콸콸 쏟아졌다. 로운은 당황해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와인병과 와인잔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밝은 색 슈트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슈트 앞쪽이 붉게 물들었다.

“어머!”

로운은 당황해서 책상에 쏟아진 와인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떨리는 목소리와 손끝을 감추기 위해 박박, 힘을 주었다.

“박사님 옷 다 버렸네요. 이걸 어쩜 좋아.”

촬영하다 NG를 냈을 때처럼, 애교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미처, 삼키지 못한 눈물이 주책맞게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이젠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어떤 연기든지 척척 해내는 베테랑 연기자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

“괜찮으니 이리 줘요.”

지석이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빼내려 했지만, 로운은 악착같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마저 없으면, 울고 있다는 것도, 손을 떨고 있다는 것도, 들켜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 탄식하는 듯한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 당신 진짜 신경 쓰이게 하는 여자네...”

다음 순간, 그녀는 거칠게 일으켜졌다. 딸려가지 않으려고 해봐야 소용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쳤다.

“놔요!”

지석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한손으로 뾰족한 턱을 강하게 잡아서는 억지로 위로 들어 올렸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다.

“저주로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로운이 막을 겨를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자신이 입술로 덮어 버렸다.

“흡!”

로운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숨을 멈추고, 온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쫄지 마, 이로운. 겁낼 거 없어. 이건 연기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금까지도 키스나 포옹은 많이 해봤잖아. 잘 해왔잖아. 이것도 그런 거랑 똑같은 거야.'

그녀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축축한 입술과,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징그러운 혀를 예상하며 이를 악물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참으면 돼! 지금까지도 그렇게 참았잖아.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금방 지나갈거라구.'

하지만,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녀가 예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석은 그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실눈을 뜨고 살짝 앞을 보았다. 마주 닿은 코에서 따스한 숨결이 새어나와 입술 위를 간지럽혔다.

지석은 그녀의 어깨와 입술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자신의 몸을 대지 않았다.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앙 다문 그녀의 입술 위에서 거친 호흡만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게임에서 스톤과 처음 키스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기분 나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물론, 그건 실제로 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로운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혐오감도 구역질도 나지 않았다.

“아...”

입과 턱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로운은 시간이 흐르자, 그 부분에 경련이 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서서히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아래 위로 힘껏 맞물려 있던 입술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최대한 턱과 입술을 안쪽으로 빼며 중얼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아무리 그녀가 닿지 않도록 말하려고 했어도,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이상, 말할 때마다 입술 끼리 스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마주 닿은 입술 사이로 달콤한 와인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로운은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혀끝을 살짝 내밀어 입술을 축이며 속삭였다.

“그만 놔...”

그 순간, 지석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빨아들이거나 혀를 내밀어 핥은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입술만 사용해 살짝 문 것이다.

“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탐하듯, 아주 조금씩, 지석은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녀와 어깨와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로운이 뿌리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서 있었다. 입술에 닿는 깃털 같은 감촉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억눌린 듯한 숨소리와 달큰하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계속해서 간지럽혔다. 커다란 손이 양볼을 부드럽게 감싸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하아...”

가뿐 호흡소리와 함께 촉촉한 혀가 그녀의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애태우듯 그녀의 아랫입술을 조금씩 핥더니, 다시 윗입술도 똑같은 방법으로 핥았다.

그건,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기묘할 정도로 답답한 키스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야릇한 감각이 로운을 괴롭혔다.

입술 전체를 작은 개미들이 물어뜯고 있는 것 같았다. 미세하고 따끔거리는 듯한 전율이 입술을 간질이며 가슴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내려갔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입술만을 아주 조금씩, 아껴서 맛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칠지도, 난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로운은 심장이 쥐어 짜내어지는 듯 했다. 키스 당하고 있는 곳은 입술인데 어째서 가슴과 배가, 그리고 좀 더 아래, 생각조차 하기 두려운 곳이, 느껴지는 걸까...

그의 혀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탐닉하고 있었다. 그의 혀가 마침내 살짝 벌어진 로운의 입술 안쪽을 건드렸을 때, 그녀의 몸이 흠칫 거렸다.

“열어줘... 제발...”

지석의 목에서 잔뜩 억눌린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욕망을 억누르는 남자의 성마른 목소리가 아니었다. 괴로움으로 폐부를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목소리였다.

로운은 그제서야 자신의 볼을 감싸 쥔 지석의 손이 진땀으로 축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만이 아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도 없을 것 같던, 지석의 대리석 같은 이마와 결 좋은 머리카락도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남아 있는 건전지를 쥐어 짜낸 인형처럼, 양 옆에 늘어뜨려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바로 앞에 있는 지석의 가슴에 손을 댔다.

자신의 심장보다도 몇 배나 더 빠르게 뛰고 있는 것 같은 세찬 고동소리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와인 때문이 아니라, 땀으로 젖은 셔츠 아래, 느껴지는 몸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왜...?”

로운은 어째서 그가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서 중얼거렸다. 그의 목울대가 마른 침을 삼키듯, 위 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제발...”

또 한 번, 그의 입술 사이로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석은 전신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요동쳤고, 달아오른 쇠처럼 단단해진 남성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부풀었다.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먼저 애정을 갈구해 본 일이 없었다. 손 내밀어 본 적이 없었다.

늘 상대가 먼저 다가왔고,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거기에 염증을 느껴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상대와 쾌락만을 쫓았던 추한 기억이 전부였다. 지금은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어쩌자고, 이제 와서... 이 여자를 앞에 두고 이러는 걸까... 대체 뭘 어쩌자고...

자신인들 한 번쯤은 상상해 본 적 없었을까? 꿈 꿔본 적 없었을까?

외로움이 사무치고, 사무쳐 화석처럼 굳어져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먼 훗날, 삶이 일장춘몽이었다 싶은 나이가 되었을 때라면...

어쩌면, 그도 다른 남자들처럼 평범하게 늙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망하기도 했었다. 그 때, 자신 옆에 아무것도 모른 채, 웃어줄 여자 하나, 바란 적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양심을 속이고, 두 눈 딱 감고,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보통 여자야만 했다. 아니 보통 여자도 그에게는 과분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로운이라니... 아무리 그가 재수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가 눈가로 스며들어 따가웠다.

“흣...”

지석은 타들어가는 몸의 고통과, 심장의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신음했다. 또 다시 진땀이 솟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생소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자신은 거세되었다고 스스로 단죄한, 바로 그 야만이었다.

거칠고 난폭한 수컷의 본능이었다. 지석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넘어뜨리고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이로운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든 이유가 뭐였는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건, 당장이라도 채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갈증이었다. 스스로 박제시킨 수컷의 욕망이었다. 온 몸의 세포가 그녀를 갖고 싶다고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로운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느라 두려움도 잊을 정도였다. '제발' 이라는 건 부탁할 때나 쓰는 단어잖아.

'키스 해 달라는 건가? 나한테? 헉! 이 사람 혹시 변태야? 정신과 의사들은 변태가 많다더니... 정말 그런거야?'

그녀는 눈을 뜨고 일그러진 얼굴의 지석을 쳐다보았다. 지석 역시도 반쯤 취한 듯 눈을 감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 미묘한 시선 아래서 로운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지석의 눈동자가 갈망으로 가득 찬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어쩐지 선뜻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정중한 키스는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미동도 없이 이런 자세로 있어서였을까. 세상이 빙글 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로운은 다리가 풀린 듯 약간 비틀거리다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으음...”

그 순간, 그의 목에서 감출 수 없는 신음이 터졌다. 로운의 볼을 잡은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흡!”

터질 것처럼 입술이 다가오고, 뭉클한 것이 입속을 밀고 들어왔다. 로운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안... 돼.”

단단한 이에 부딪혀 뭉개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녀는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석은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등으로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된 입술 안으로 들어온 혀는 그녀의 입안을 샅샅이 헤집고 빨아들였다.

로운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뜨겁게 고동치는 심장소리에 놀라 주먹을 꼭 쥐었을 뿐이다.

지석은 신음하며 그녀의 머리를 더욱 단단히 감싸고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과 뺨, 귓가를 지나 목덜미로 내려왔다.

그녀는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그의 품 안에서 부들 부들 떨기만 했다. 몸속을 관통하는 짜릿한 쾌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두려웠다.

“제발... 떨지 마...”

옆구리를 타고 위로 올라온 손이 그녀의 가슴을 힘껏 쥐는 순간, 로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가슴을 짓뭉개버릴 듯, 우악스럽게 손길에 로운은 찬물을 끼얹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하지 마요!”

그 순간, 지석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하더니 그녀를 확 밀쳐냈다. 로운은 찌푸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석의 얼굴은 놀랄 만큼 창백했다.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던, 로운은 그가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자, 할 말을 삼키고 말았다.

“미안...”

지석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탁한 음성을 내뱉더니, 도망치듯 방에서 나가버렸다.

로운은 힘이 빠진 것처럼 옆의 쇼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지가 당한 표정이야?”

떨리는 손만큼이나 목소리도 떨렸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몸을 떨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당한 건 난데...”

폭풍 같은 접촉은 단 한 순간이었다.

허기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자신의 입술을 삼키던 지석의 입술이 떠오르자, 로운은 또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몸을 억세게 조이던 그의 강인한 팔이 떠올랐다.

오싹,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마구 비볐다.

“저 남자는 이상해...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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