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로운은 백화점 VIP 룸처럼 꾸며진 실내를 돌아보았다. 척 봐도 부티 나는 여자들이 삼삼오오, 끼리 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강남 한 복판, 노른자위 땅에 고급스러운 외형으로 지어진 5층짜리 단독 건물이었다. 외관만 본다면 전혀 병원스럽지 않았다.
유명 웨딩샵처럼 보인다. 들어오다 보니 검은색 대리석의 외벽에는 작은 금빛 명패에 라고 적혀있었다.
“무슨 정신 병원이 이래?”
윤서를 따라 강지석의 병원에 온 참이었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에 로운은 벌써부터 기분이 안 좋다.
있는 집 자식일수록 그녀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뭐 병원이라기 보다는 상담센터라고나 할까. 강남 재벌집 싸모님들만 예약제로 상담 하거든. 인테리어도 수준에 맞춰야지. 일반 서민이 강지석 얼굴 함 볼라면 10분 상담료도 한 달 치 월급은 갖다 받쳐야 할 걸?”
“뭐야? 그 인간은 말할 때마다 금가루 뱉는데?”
윤서는 다시 웃었다.
“금가루인지 설탕가루인지는 모르겠지만, 싸모님들이 이 병원에 못 와 환장이긴 해. 나도 왠지 다른데는 가기 싫더라구.”
로운은 곱게 눈을 흘겼다.
“그거 다 특권의식이야. 넌 왜 이런 데서 보자고 해? 나 사람 많은데 싫어하는 거 알면서.”
“병원 냄새라도 좀 맡으라고. 그럼 또 혹시 아니. 니 그 수컷혐오증이 고쳐질지.”
“쓸데없는 소리.”
“암튼, 이 병원은 아무리 너라도 예약 잡기 힘들거 같아 데려 온거야. 닥터 강께서 많이 바쁘셔서 새 환자는 당분간 안 받으시겠다고 선언하셨단다. 기존 환자들만 보시겠다고.”
“의사가 무슨 벼슬이야? 아주 지랄을 하세요.”
로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원장실이라고 쓰여진 문을 노려보았다. 문이 열리고 나오는 젊은 여자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돌았다.
“의사랑 상담하는데 저 여자 얼굴을 왜 붉히는 거야?”
턱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앉아있던 로운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윤서에게 물었다.
“섹스상담이라도 받았나 부지.”
“섹스 상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자 로운은 목을 움츠렸다.
“풉, 강지석 전문이 부부관계거든. 그런 얘기 다른 데 가서는 입 털기 어렵잖아.”
“부부관계를 왜 의사한테 상담하는데?”
윤서는 측은하다는 듯이 로운을 훑어보았다.
“쯧쯧, 이로운, 결혼도 안한 니가 뭘 알겠니? 하여간 요샌 의사도 츤데레가 먹히는 시대야. 강지석 말투는 엄청 싸가지 없는데 은근 매력 있거든.”
“츤데레? 그게 뭐야?”
“애쉬가 자주 쓰는 말이야. 겉으로만 까칠한척 하는 순정남이래. 주로 하는 말은 '니가 딱히 좋아서 잘해주는 건 아니야.' 라나.”
로운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너 요새 애쉬인지 뭔지 너무 자주 말한다.”
그 뿐이 아니라, 말할 때 표정도 달라졌다. 로운은 단짝 친구가 너무 깊게 온라인 게임에 빠진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걱정 할 거 없어. 나 새로 계약한 대본 쓰느라 당분간 바쁠거야.”
“민성현꺼 편성 5월로 미뤄질지도 모른다더라. 그 사이에 너꺼 들어가냐?”
“Htv꺼 아냐.”
“타방송사는 안한다더니, 의리 때매.”
“의리가 밥 먹여 주냐?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지.”
로운이 알만 하다는 듯이 말했다.
“또 냐? 그 놈의 정치 좀 안 하면 안 된대?”
윤서 남편이 국회의원에 목 맨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그 뒷바라지 때문에 우울증만 늘어가는 친구가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재미없는 내 얘기 말고 니 얘기 해. 전화로 들었지만, 그 사람. 스톤 말야. 직접 봤다며? 어때?”
윤서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 거렸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로운은 뜨끔했다. 머릿속에 스톤과 캔디의 키스 장면이 리플레이 된 탓이다.
“뭐, 뭐가 어때? 너도 본 적 있다던데?”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랜드 연말 파티에서 봤지.”
“연말 파티? 그런 것도 해?”
“그럼, 거기서들 뭐하겠니? 다들 현실에서는 충족 못하는 걸 채우러 들어 가는 거지. 그게 사랑이든 돈이든...”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사가 윤서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원장실로 들어가자 우아한 방이 나타났다. 바로 강지석을 보는 게 아닌가 보다.
윤서는 안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고 로운은 다시 바깥의 고급 쇼파에 앉아 기다렸다.
양쪽에 앉아 있는 두 명의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사인을 해달라는 건가 싶어서 방긋 웃던 로운은 우울증테스트 설문지라는 걸 알고는 표정을 굳혔다.
“무기력, 좌절감, 공허함, 식욕감퇴, 분노, 부정적, 상실감, 성욕저하...”
또 다시 스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가오는 긴 속눈썹과 취한 듯 반쯤 감긴 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살짝 내밀어진 혀가 그녀의 아랫 입술을 스치고...
아우, 미치겠네.
로운은 아랫배가 오싹 조여드는 것 같아 얼른 설문지를 내려놓고, 쇼파에 등을 기댔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자, 간호사들이 다가왔다.
“작성 다 하셨어요?”
“전, 환자로 온 거 아니에요.”
로운의 도도한 말투에 간호사들이 안색이 살짝 변했다.
“네? 그래도 원장님 만나시려면 이거 하셔야...”
“제가 들어가서 말씀 드릴게요.”
“그러세요. 그럼.”
자리로 돌아간 간호사가 앞에 있는 여자에게 작게 '재수 없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듣지 못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우아한 자세를 유지했다.
잠시 후, 윤서가 나오고,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듯이 눈을 찡긋 했다.
“기다릴게. 내 상담 시간 줄여서 너 봐 주는 거니까 오래는 못 볼거야.”
“웃긴다. 진짜. 지가 무슨 한류스타야?”
로운이 윤서에게 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실도 바깥의 인테리어와 비슷한 색조로 꾸며져 있었다.
고급 전원주택의 서재처럼 꾸며진 공간이었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서가 앞에는 안락해 보이는 커다란 가죽 쇼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서가 반대편으로 난 통창 뒤쪽에는 넓은 베란다가 있었는데, 멋진 조경으로 꾸며져 있어 베란다라기 보다는 일반 정원처럼 보였다.
대체 일개 의사가 돈을 얼마나 벌면 이런 병원을 지을 수 있는거지?
그 창문을 등에 진 곳에 소문으로만 듣던 강지석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의사 가운도 입고 있지 않아서 책상 위의 명패만 아니면 그가 의사라는 걸, 증명할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JS 심리 센터 연구소장 강 지석'
티끌 하나 없이 닦여진 명패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 없는 것처럼 생긴 사내였다.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끔하게 올백으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은 올드해 보일 법도 하건만, 오히려, 그가 어려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로운씨?”
지석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니터만 노려 본 채, 입을 열었다.
윤서가 분명 자신이 왔다고 말했을 텐데도 마치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른다는 투였다.
“저, 우울증 아니에요. 환자도 아니구요.”
가까이 다가간 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매가 슬쩍 그녀를 쳐다보고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런가요? 그럼 여기 왜 오셨습니까?”
로운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녀는 또각또각 지석이 있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의자 끝까지 깊숙하게 앉은 게 아니라, 엉덩이를 반만 걸쳐, 각선미가 길어보이도록 의도된 자세였다.
“윤서가... 방금 전에 상담하신 오윤서요.”
아니나 다를까. 지석의 시선이 매끄럽게 잘 빠진 다리를 발목에서부터 훑듯이 타고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곧 드라마 하나 들어가는데 역할이 정신과 의사거든요. 한번 뵙고 자문을 구하라고 해서 온거에요.”
로운은 한 쪽으로 얌전하게 모았던 다리 하나를 무심한척, 들어 올려 다른 쪽 허벅지 위에 걸쳤다.
지석의 시선이 다리를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보통때였다면 남자의 그런 시선에 소름이 돋았을 텐데, 지금은 가벼운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까짓게 아무리 잘난 척 해 봐야 남자지. 여자 알기는 우습게 알아도 예쁜 여자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 돌아가는 겉다르고 속 다른 족속들...'
로운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나타내자 그제서야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았다. 좀 전과는 다르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
“제게 해주실 말씀 없으세요?”
지석은 다리에서 그녀의 허리, 가슴 순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리더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보자 로운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미세한 반응에 지석은 피식 웃었다.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성의 없이 말했다.
“어차피 대본에 다 써 있을 거 아니에요. 대본 대로 하면 됩니다.”
오윤서가 특별히 제 시간까지 빼서 만나 주십사 부탁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기에,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괜한 시간 낭비였나 보다.
“누가 그걸 몰라서 아까운 시간 들여 여기까지 왔을까요?”
로운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얘기 잘 들어요?”
지석이 다시 물었다.
“네?”
“다른 사람 얘기 잘 들어줍니까?”
로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직업상 감독님이든, 작가든, 매니저든 다 저한테 얘기하는 사람들이랑만 일하니까요.”
“그럼 됐네요. 나가보세요.”
“네?”
“그냥 잘 들어주는 척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 대사는 대본 보고 하세요.”
로운은 황당해서 다시 물었다.
“그게 다에요?”
“더 듣고 싶은 얘기 있습니까?”
“아니, 의사시잖아요. 말씀은 선생님이 해주셔야지요.”
지석은 피곤하다는 듯이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다시 시계를 보았다. 아직 상담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럼, 어디 들어보죠.”
“네?”
“제가 환자라고 생각하고, 정신과 의사답게 연기해보세요. 그럼 어디를 고쳐야 할지 말해 줄 테니까.”
로운은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연기를 하라고? 대본도 없이?
지금까지 대본 없이 연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대본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안 합니까?”
지석이 또 다시 피식거리며 말하는 바람에 로운은 발끈했다.
“전 대본 없이는 연기 안 해요.”
“아깐 대본대로 하랬더니 또 싫다면서요?”
로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럴거라 생각했어요. CF 전문 배우에게 아무 때나 연기를 요구할 수는 없죠..”
헉, 로운은 적나라한 지석의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선생님은 바쁘셔서 드라마나 영화는 잘 안 보시나 봐요? 저 CF말고 영화도 많이 찍었어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그녀는 다시 예쁜 미소를 지었다.
'이로운, 이런 사기꾼 자식에게 말려들지 마. 다 너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잘난 척 하는 사내의 속을 긁는 건 네 전문이잖아.'
“막장 드라마나 영화는 잘 안 봅니다. 이로운씨는 그런 것 밖에 안 찍으시던데요?”
씨이, 이게 진짜...
로운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움켜잡았다.
“저,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상 탄 작품도 있었는데, 모르셨구나.”
그녀의 냉랭한 표정에도 지석은 아랑곳없다는 투로 이어 말했다.
“아, 그거 이로운씨가 예쁜 여배우 2위인가 했을 때 찍은거죠? 동양인 최초로 서양인들에게도 어필하는 얼굴형이라고 소속사에서 엄청 언플해서 상 받았다는 그 영화 말하는 겁니까? 이로운 씨가 쇼걸로 나와서 봉춤 추는 거?”
그 장면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자 지석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로운이 출연한 영화는 그거 딱 한 편 밖에 안 봤다.
그래선지, 이로운 하면, 그 영화 속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붉은 톤의 조명 아래서 몽환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유혹하듯 웃던 그녀의 모습이,
다른 건 몰라도, 그 장면만큼은 확실하게 사내들의 심장을 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니까.
“네, 그거요. 선생님도 보셨다니 영광이네요.”
그는 머리에 떠오른 영상을 지우며 까칠하게 말했다.
“그것도 작품성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었죠. 그림이야 예뻤지만, 예쁘다고 다 배우는 아닌 시대잖아요. 요샌, 텐프로들이 배우보다 훨씬 더 예쁘니까. 강남 클럽 가면 그보다 춤 잘 추고 예쁜 여자들 널렸어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로운은 기가 막힌 나머지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선생님, 혹시 제 안티세요?”
지석은 그녀가 파르르 떨자 오히려 차분하게 응수했다.
“설마요. 제 환자들은 제가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네요. 환자마다 다 이런 식으로 대하세요? 그러고 비싼 진료비 받으시구요?”
그는 차트에서 고개도 쳐들지 않고 말했다.
“이로운씨는 환자, 아니라면서요?”
로운은 그를 노려보다가 쌩하니 문으로 향했다. 막 문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환자로 오세요.”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지석은 고개를 들었다. 왜였는지 어제 게임에서 만났던 캔디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이로운 팬이라고 했지...
그 어이없는 외모를 이로운처럼 꾸미려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운은 밖에서 기다리는 윤서를 보자마자 따따따 쏘아붙였다.
“저 인간 미친 놈 아니니?”
하다가 그녀를 힐끔거리는 주위 시선을 눈치 채고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 기분 엿같이 만드는데 선수다. 여기 환자들 다 의사보고 그런 생각하는 거 아냐? 아 난 이 인간보다는 정상이야. 뭐 이런 거?”
“풉, 웬일이니? 강지석 보고 그런 말 하는건 니가 첨이다. 다들 시크 카리스마라고 난린데.”
“여기 오는 여자들 눈이 낮구나.”
“외모가 연예인 뺨 치잖아. 거기다 소문엔 엄청난 주식부자라더라.”
윤서와 병원을 나가던 로운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고가의 수입 외제차를 보고 관심을 나타났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노란색 람보르기니였다.
“저건 또 어떤 관심병자라니?”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더니 윤서의 얼굴의 확 굳어졌다.
“유라희네.”
“누구?”
“있어, 강남에 잘 나가는 전직 텐프로, 스폰 잘 만났는지 지금은 온라인 쇼핑몰 CEO도 하드라. 장성빈도 아마 그 스폰들 중 하나일걸?”
장성빈은 윤서의 남편 이름이었다.
“내가 버는 돈 절반은 유라희 구멍으로 들어 갔을거야. 아마.”
윤서의 독기 서린 말투에 로운은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청순한 베이글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데 텐프로라니...
예쁜 여자들은 다 강남 술집에 있다는 방금 전, 강지석의 말이 생각났다.
헐, 미친 새끼. 강남 술집에서 저런 텐프로만 만나고 다니니 연예인도 같잖다 이거겠지.
“저 여자도 여기 고객이야?”
윤서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왔겠지. 가자, 쟤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어. 폐가 썩는 느낌이라.”
“차라리 남편이랑 이혼하지 그래?”
돌아오는 길에서 로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싫어, 누구랑 결혼해도 그러고 살 거, 그냥 각자 좋을 대로 사는거지. 어차피 애도 못 낳는데 누가 나 같은 여자 델고 살겠어. 쇼윈도 부부라도 해야지.”
이 년 전, 자궁 적출 수술을 한 후, 윤서는 남편과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도 그녀를 여자로 봐주지 않았고, 윤서 자신도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단다.
하지만, 키도 작고 통통한 윤서는 누가 봐도 생기발랄한 미시족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녀가 그런 그늘을 안고 사는지 모를 것이다.
이로운, 그녀 자신처럼.
“자자, 우울한 얼굴 하지 말고, 어디 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우리 올해부터 삼십대야 삼십대,”
윤서가 기세 좋게 말하며 차에 올랐다.
“너 작년에도 그 말 했다?”
“작년이야 만으로 따지면 29세였잖아. 올해는 빼도 박도 못하지.”
“그래서 니 아디가 투나인이냐? 너 애쉬인가 하는 애한테도 스물아홉 살이라고 뻥 친거 아냐?”
로운의 질문에 윤서가 혀를 쏙 내밀며 밝게 말했다.
“당연하지. 난 영원히 스물아홉 살로 살고 싶어. 내가 마지막으로 여자였던 때니까. 온라인에서라도 그렇게 살 거야.”
여자, 자신은 언제부터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살았을까?
철부지였던 십 대, 누군가를 좋아했던 순수한 마음이 갈기갈기 걸레처럼 찢겨진 이후, 그녀는 의식적으로 남자를 멀리 해 왔다.
남자를 믿은 대가는 가혹했고, 어른들의 시선은 비수처럼 잔인했다. 상처 나고 피 흘리는 영혼을 한 점 한 점 주워 모으며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왔다.
아무에게도 상처 받지 않도록 견고한 성을 쌓은 덕에, 지금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몇 년 전 부터인가 문득, 이렇게 살다 죽는 게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그녀의 삶에 들여놓지 않는 삶이 과연 최선인걸까?
윤서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다가, 컴퓨터를 슬쩍 쳐다보았다.
마치,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로운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로딩이 되는 동안, 그녀의 가슴은 쿵쾅쿵쾅, 이유도 없이 요동쳤다.
회색 화면이 화악 밝아지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아직도 스톤이랑 키스하고 있으면 어쩌지 싶어서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로운은 텅 빈 모래밭을 보며 맥이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오른쪽 화면 상단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S-07브레이슬렛의 AO(Animation Override)를 중지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얼른 확인을 눌렀다. 인벤토리를 열고 자신의 착용한 액세서리 중에서 팔찌를 찾아 해제하고 나서야 심장의 고동소리가 줄어들었다.
'그 인간은 어디 간 거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스톤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어제의 키스가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어쩌면 이곳에서 만나는 여자마다 그런 팔찌를 선물하는 걸지도 모른다. 윤서 말로는 이 게임을 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온라인상에서 가상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온다니까.
생각에 잠겨 있느라, 상태 바가 반짝거리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스톤님이 친구 맺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친구?”
로운은 수락할까 말까 망설였다. 어제 성추행에 가까운 그런 일을 당하고도 수락하면, 그녀를 너무 우습게 보는게 않을까, 은근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가상현실, 아무도 그녀를 모르는 곳이다. 로운은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가 수락을 누르자 마자, 오른쪽 상단에 접속 중인 친구- 스톤이라는 표시가 떴다.
친구 창에 이제는 윤서의 캐릭터인 투나인과 스톤, 둘이 되었다.
로운은 살짝 흥분한 표정이 되었다.
친구라... 지금까지 그녀에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윤서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동료였다.
“오늘은 로그인이 늦었네요.”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왔다.
“제가 늦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신데요?”
로운이 샐쭉하게 말하자, 저쪽에서 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이 전염됐는지 로운도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재팬랜드에요. 캔디에게 어울리는 스킨을 발견했는데, 한번 와서 볼래요?”
스톤이 쾌활하게 말하자, 그녀에게 텔레포트 창이 떴다. 그가 있는 곳으로 바로 오라는 뜻이다.
앗, 뭐지? 이거 데이트 신청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슉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아바타가 이동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몇 번 팔을 버둥버둥 거린 후에야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어서 와요.”
스톤은 그녀를 보자마자 바쁘게 앞 쪽으로 걸어갔다. 잘 짜여진 등근육과 탄탄한 엉덩이의 움직임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로운은 그 모습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배불뚝이 아저씨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실제 모습을 볼일도 없을 테니까.
“여긴 어디에요?”
주변에는 두 사람 말고도 다른 아바타들이 많이 있었다.
남녀가 함께 온 커플도 있었고, 남자끼리 여자끼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하나같이 미남 미녀들이라는 것이다.
로운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못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동양인들이 많이 오는 샵입니다. 여기 디자이너가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스킨을 잘 만들죠. 값이 꽤 비싸서 초보들은 잘 모르는 곳입니다.”
스톤은 그녀를 아시아라고 쓰여진 룸으로 데려갔다.
“여기 이거 봐요. 이로운 닮았죠?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스킨이라고 하더군요. 한국 여자들 열에 다섯은 이 스킨이죠.”
스톤은 쥬엘도 이 스킨을 쓴다는 걸 알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평하게 말한다면, 이 스킨은 실제로 본 이로운보다 덜 예뻤다.
연기력과 상관없이 그림이 되는 여자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스톤이 가리키는 사진을 본 로운은 입을 쩍 벌렸다. 정말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스킨이었다.
“그, 그러네요.”
“이거 입는다고 이로운 하고 똑같이 되지는 않아요. 성형 수술하듯 섬세하게 쉐이프도 손봐야 합니다.”
“쉐이프도 같이 주지 않아요?”
“그럼 성형외과에서 판박이로 찍어내는 거랑 똑같잖아요. 여기 유저들은 그런거 싫어해요. 다들 자신이 직접 골격을 만지는 걸 선호하는 편이죠. 이걸로 하겠어요?”
이거 했다가 사람들이 날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다, 다른 것도 좀 보구요.”
그녀의 말에 스톤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이로운씨 팬 아니었습니까?”
“팬 아니에요. 어제는 그냥 당신이 너무 안 좋게 말하니까... 저 이로운 안 좋아해요.”
“그런가요? 당신과 잘 어울릴 거 같았는데... 그럼 다른 걸 골라 봅시다.”
스톤은 앞의 말을 중얼 거린 후에, 다시 천천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 말투에서 이로운을 연상시킬만한 게 있었나?
그녀는 스톤의 뒤를 따라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괜스레 심장이 쿵쾅 쿵쾅 멋대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