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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 하는 남자, 강지석은 아무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한 대로 어리석은 여자였다.
소문이 빛보다도 빨리 퍼지는 이런 자리에서 광고주를 적으로 돌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아니, 어쩌면 몸값을 올리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 이였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로 그녀는 자신이 절대로 싼 매춘부가 아니라는 걸, 정재계 유력인사들에게 확실히 심어준 셈이다.
소문에는 아직 스폰서가 없다고 하지만, 연예가라는 곳은 소문보다 훨씬 더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니까.
그의 시선 끝에 떠들썩한 인사를 받으며 퇴장하는 로운의 모습이 잡혔다. 작년 연말, 연기 대상 수상자다운 우아한 모습이었다.
카랑 카랑한 웃음소리, 생기 넘치는 표정, 어디에 있어도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은 확실히 이로운만의 독특한 컬러였다.
“드디어 여주인공이 퇴장하시는군.”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양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였던 고성식 회장이 옆에 와 있었다.
“이로운도 대단해. 깡다구야. 20대 중반에 톱의 자리에 올라서 쭉 그 자리 유지하지 쉽지 않은데 말야.”
지석은 로운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시잖습니까? 혼자서 그러긴 힘든 바닥이죠.”
그의 냉소적인 말투에 고 회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까 유일 건설 망나니 봤지? 확실해. 이로운, 쟤 아직 손 안 탔어.”
지석은 코웃음을 쳤다.
“많이 안 탄 거지, 아예 안 탄 건 아니겠죠.”
“이 고성식이 모르게? 어림도 없지. 소문에는 남자 혐오증이라던데?”
“남자 혐오증이요? 연기자가요?”
지석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간 아몬드형의 눈동자를 빛내며, 남자 주인공 앞에서 섹시한 춤을 추던 영화 속, 로운의 모습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지나던 개가 다 웃겠군요.”
반사적으로 묵직한 기운이 아래를 조여오자, 그는 찬물을 끼얹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별로 반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지석은 고 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티장을 빠져 나왔다.
고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경제인 협회 회원들이 떠나는 지석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강 회장이 양자 하나는 잘 거뒀어. 고 회장 요즘 살맛나지?”
“강박이 손대는 것마다 대박 터진다며? 저 놈은 의사보다는 사업을 했어야 돼.”
“고 회장 딸 있잖아? 이참에 아예 강박 도망 못 가게 발목 잡지 그래?”
고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나라고 왜 탐이 안 나겠어. 이건 사위 삼을래도 저 눔이 여자한테 정을 줘야 말이지.”
“그 왜... 남색질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쩝, 저 눔은 가만히 있는데 남자고 여자고 쫓아 다니던 눔이 엔간히 있었나봐. 거 왜 막장인 놈들 있잖아. 그런 놈 중 하나가 몇 년 전에 목 맨 꼴 보고는 질린 거 같드라고, 지 눈에 안 차는 걸 어쩌겠어. 저러고 살다 강 회장처럼 양자나 들이지 싶어.”
별거 아니라는 투의 고 회장 말에 다들 이구동성으로 혀를 찼다.
“아깝다. 저 인물에, 재력에, 학벌에 뭐 하나 빠질 거 없는 놈인데... 참 재미없게도 산다. 쯧쯧...”
자신을 두고 노인네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넓은 아파트는 먼지 한 톨도 없어 마치 모델 하우스처럼 보였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타올만 두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노트북을 펼쳤다.
평상시처럼 가상현실게임인 <피안토피아_라이프>에 접속했다.
-보스, 입주 신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의 랜드 매니저인 '쥬엘'에게 온 IM(instant message)가 음성화 되어 흘러 나왔다.
“유저 정보는?”
-유저 네임은 '캔디' 가입한 지는 좀 된 거 같은데, 라이프 기록은 깨끗하네요. 휴면 유저였던 거 같아요.-
“빈 랜드가 없으니 일단 대기!”
-알겠습니다.-
그는 노트북을 침대 정면에 있는 대형 스마트 TV에 연결했다.
푸른 바다에 펼쳐진 자신의 섬이 보였다. 지석이 소유한 수십 개의 랜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안토피아 내에서 가장 큰 부동산을 소유한 랜드 오너중, 한 사람이었다.
구입한 주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규모가 커졌다.
<피안토피아_라이프>는 신생 게임회사가 만든 온라인 가상현실 게임이다.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를 통해 온라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게 개발사의 홍보 문구였다.
이곳에서는 실제에서 벌어지는 모든 걸 경험 할 수 있다.
부동산을 사고 파는 것에서, 창업, 취업, 결혼, 연애 등등, 현실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이곳에서 쓰이는 전자 화폐는 실제 화폐로도 환전 가능했다.
그러다보니 아예 이곳에서 창업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돈을 버는 유저도 생겨났다.
철저한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 또한, 피안토피아의 장점이었다.
오년 전, 처음 게임을 접한 지석은 '스톤'이란 ID로 플레이 중이었다.
“쥬엘. 지금 이쪽으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랜드에 있던 쥬엘이 텔레포트 이동해 그의 눈앞에 도착했다.
불에 타는 듯한 화려한 붉은 머리의 육감적인 미녀였다.
-오랜만이에요 보스.-
피안토피아가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3D 아바타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체 각 부위의 수치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옵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외모를 꾸밀 수 있을 뿐 아니라, 게임 내에서 움직는 애니메이션 동작 또한 매끄럽게 실행되었다.
지석은 쥬엘이 손에 찬 섬세한 세공의 팔찌가 섹스 전용 애니메이션이 장착된 제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선물한 것이었으니까.
피안토피아는 19세 이상의 성인용 게임이었고, 섹스 역시 현실세계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구현 되었다.
지석은 '쥬엘'의 팔찌를 터치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섹스 의사가 있음을 나타냈다.
쥬엘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메쉬(mesh) 프로그램으로 제작된 오브제로, 실제와 흡사한 효과를 줄수 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원피스의 단추가 풀어지는 효과와 함께, 풍만한 갈색 가슴이 출렁거리며 드러났다.
지석은 화면을 양쪽으로 분할해서 왼쪽을 1인칭 시점으로, 오른쪽은 전체 플레이를 감상하는 버전으로 바꿨다.
스톤의 손이 섬세하게 쥬엘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게 보였다.
부드럽게, 또 강하게,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잘 태닝된 가슴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의 양손이 쥬엘의 가슴을 터뜨릴 것처럼 쥐고, 진홍빛 젖꼭지를 비틀었다.
-하아... 보스...-
쥬엘의 끈적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지석은 그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어디에 사는지 뭐하는 여자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섹스를 즐기는 여자라는 건 확실했다. 한 달 전, 그의 랜드 매니저로 고용된 후, 쥬엘은 바로 그의 침대로 직행했다.
이곳의 섹스는 얼마나 고가의 애니메이션을 사느냐에 따라 현실감이 달라졌다.
쥬엘이 차고 있는 팔찌는 수 백 가지가 넘는 애니메이션이 담겨 있었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비쌌고, 그만큼 섬세하고 탁월한 모션을 자랑했다.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는 관능적인 입술이 벌어지고, 풍만한 가슴의 돌기가 그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쥬엘의 등이 크게 튕겨 올라갔다.
-흐읏, 보스... 못 참겠어요. 하아... 스톤...-
애니메이션이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현실의 목소리다. 쥬엘은 온라인에서 섹스 할 때마다 실제처럼 자위를 한다고 했다.
“좋은가?”
-하악... 스톤...-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애끓는 듯한 교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화면 가득 농염한 섹스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벌써, 오년 째.
그는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발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안고 싶지 않았다.
-아아, 나 갈 거 같아요. 못 참겠어요. 으응, 스톤. 더 세게! 더! 더!-
화면은 점점 자극적인 영상으로 바뀌고, 쥬엘의 신음소리도 높아졌다.
그 순간, 지석의 눈에 랜드 네비게이션에 빨간 점이 찍힌 게 보였다. 누군가 접근했다는 뜻이다.
그는 네비게이션을 띄웠고, 곧 인상을 찡그렸다. 여성형 기본 아바타였다. 프로필을 검색하자 <캔디>라는 이름이 떴다.
쥬엘이 말했던 '입주 신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