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장마가 길다.
본래 신령계는 거의 항시 맑은 날을 유지했고, 지배자인 백호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편차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해에는 마치 때 아닌 우기라도 만난 듯 비가 길어졌다.
신령계에 비 오는 날씨가 적어 처음에는 신기해했던 연화도 곧 무료한 기분에 휩싸였다. 인간계에 살 때는 장마가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있었으니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금 지루한 기분으로 궁의 정원을 내다보았다. 솨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 정원의 낮은 풀잎을 두드렸다.
“도저히 더 못 견디겠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흰 호랑이, 백호와 그녀의 아들인 백랑은 지금쯤 위층 침대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린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데다가 날씨가 궂어 좋아하는 산책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연화는 곧 시녀에게 우산을 받아 들었다. 화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름칠한 종이우산이었다.
“연화 님,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앞에서만 산책하세요.”
“알겠어요, 호접.”
등 뒤로 따라붙으며 호접이 잔소리를 했고 연화가 웃었다. 나비의 신령인 호접은 혹시라도 날개가 젖을까 따라 나오기를 꺼렸다. 본능적으로 비를 피하는 나비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연화는 우산을 펴고 발걸음을 정원으로 옮겼다.
연화와 백호가 혼인한 이후 궁을 이루는 봉우리는 더 굵고 높고 넓어졌다. 동시에 산맥과 같은 형상을 갖추어, 더 이상 홀로 높이 솟기만 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아니었다. 온갖 짐승과 초목이 가득 들어차 빼곡히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 공간이 되었다.
발밑에서 자박거리며 물기가 소리를 냈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 치마 밑은 금세 젖어버렸다. 그래도 며칠 만에 밖에 나와 풀과 흙을 밟으니 살 것 같아, 연화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들 백랑도 뛰어나와 놀고 싶을 테지만, 어린아이를 이 빗속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백호는 자연스러운 정원을 좋아하여 풀을 웃자라게 둔 곳도 있었다. 길 사이로 걸으며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이 너머로 넘어가면 온갖 기화요초가 자라나는 화려한 꽃밭이 존재한다. 하지만 길이 미끄러워 그곳까지 갈 마음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을 가로지르는 시내 앞에 서서 물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으로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그와 합쳐져 흘러가는 물줄기가 평소보다 거셌다.
“물냄새도 좋네.”
사방이 온통 빗줄기로 가득 차 있지만 물의 향기는 그와 또 다르다. 콧속을 가득 채우는 풀과 물의 향기에 연화는 심신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종이우산 위를 빗방울이 두드리며 고막마저 가득 채워냈다. 거기에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가만, 개구리 소리?”
비가 올 때 개구리가 나와 있는 일은 흔했지만 시냇물이 거셌다. 자칫하면 작은 개구리 정도는 휩쓸려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냇물 한가운데의 작은 돌 위에 올라가 앉은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 저런.”
연화가 중얼거렸다. 개구리는 힘겹게 돌 위를 올랐지만 자리 자체가 위태로웠다. 하필 물줄기가 꽤 거센 가운데라 물방울이 위태롭게 튀었다. 평소라면 연화의 무릎 정도까지밖에 차지 않는 시내였으나 지금은 물이 불어 허벅지까지 올 듯했다.
“얘, 너, 너 그러다 쓸려가.”
연화가 안타깝게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덜 자란 듯 유난히 작은 개구리는 애써 돌멩이에 매달려 있었다. 간신히 자리 잡은 자세가 다행히도 안정적이어서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돌멩이 자체가 물줄기에 휩쓸리며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물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불어난 물길을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숨에 손을 내밀어 간신히 작은 개구리를 구해냈으나, 대신 자신의 몸이 휩쓸렸다. 얕다고 우습게 건너다니며 놀았던 시냇물은 잔뜩 불어나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잃어 넘어지고 그대로 죽죽 밀려났다. 한 손에 든 개구리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한껏 든 채 연화가 애써 바닥의 바위와 풀들을 휘어잡았으나 온통 물기로 미끄러워 계속 밀려나기만 했다.
물속에 얼굴이 몇 번이나 잠기고서 연화는 위험을 체감했다. 그녀는 허우적대면서 힘껏 늘어진 버드나무의 나뭇가지를 잡았다. 유연한 나뭇가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간신히 물에 휩쓸리던 몸이 멈췄다.
“헉, 허억…….”
일어서려 해도 물살이 너무 세고 젖은 긴 치마가 감겨 다리를 들 수가 없다. 그녀는 개구리라도 뭍으로 던지려 했지만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팽팽하던 나뭇가지가 기어코 부러졌다.
“앗……!”
손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베이면서 그대로 몸이 떠내려갔다. 얼굴이 잠기면서 비명도 물살에 먹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허우적거리면서 그녀가 발버둥을 쳤다. 이렇게 어이 없게 생이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연화야!”
그 때 비명처럼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물에 잠겨 먹먹한 귀를 엄습했다. 고통에 차 한껏 뻗어 올린 손목이 크고 따뜻한 손에 휘어 잡히고, 어깨에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몸이 힘차게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연화야, 연화야!”
허공을 날아온 백호가 축 늘어진 연화를 끌어안고 뺨을 두드렸다. 정신이 흐린 채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허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풀밭에 뉘이고 공기를 움직여 더 이상 비가 연화에게 닿지 않도록 만들고서, 백호는 차가워진 연화의 손을 주물렀다. 잠깐 산책한다며 정원에 나갔다기에 무얼 하나 뒤따라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연화야, 숨을 제대로 쉬어라. 그래, 옳지.”
호흡이 거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인도하던 백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연화의 다른 쪽 손에서 폴짝 하고 뛰어나온 한 작은 물체였다.
“……개구리?”
채 다 자라지도 않은 작은 개구리였다. 저런 녀석을 왜 연화가 손에 쥐고 물에 빠진 것인가. 백호는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화 역시 손에서 개구리가 빠져나간 것을 깨닫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풀 숲 사이로 사라지는 개구리를 보며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백호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연화는 점차 맑아지는 정신 속에서 그가 상당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함에 그녀 역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궁으로 돌아와 말다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이냐, 대체!”
“……죄송해요.”
사과해야 했다. 백호가 얼마나 놀랐을지 연화 역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백호가 위험했다 해도 그녀 역시 가슴이 내려앉게 놀랐을 테니까.
침상 위 이불 속으로 상처 난 손과 다리를 꼬물거리며 숨기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백호가 약을 가져와서 상처 위에 처덕처덕 바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거칠고 잔뜩 화가 난 손길이었다.
연화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금방 나을 겁니다. 너무 염려 마셔요. 큰 상처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백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놀란 연화에게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게야. 개구리를 구하려고 불어난 물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거냐?”
“그게 아니라…….”
기껏해야 죽어도 그만인 개구리를 구하겠다고 물속에 뛰어들다니, 백호는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화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개구리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신령계에서는 특히나 더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 해도 신령으로 발전할 만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함께 살고 있는 호접도, 시녀들도, 경비병들도 모두 그러한 미물에서 발전한 자들이었다. 공덕을 쌓아 갈고 닦으면 어떤 자든 영혼을 가지고 신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저 개구리도 그럴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는 보살의 가피를 받고 있는 자였다. 미래의 가능성을, 아직 살아 있는 자의 가능성을 세계의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순리라 하여 자비의 손길을 거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더구나 미래에 어떤 신령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무리 덜 자란 개구리라 하여도요.”
“보통 금수 천 마리 중의 하나가 신령의 자격을 얻지. 특히 저런 개구리 같은 것들은 신령이 된 자가 손에 꼽을 정도다.”
백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연화의 다리와 팔목에 생채기가 난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평소 사랑하는, 온순하지만 단단한 연화의 표정도 동시에 못마땅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이 다칠 정도라면 한 발 정도는 물러서야하는 게 아닌가. 백호는 그녀가 다치는 것에 몹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저는 가능성을 예단하여 함부로 손길을 물릴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연화는 변함이 없었다. 단호한 그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백호는 불쾌했다. 자칫하면 물에 쓸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알겠다.”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방을 나가버렸다. 연화는 차마 그를 부르지 못하고 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서운한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분노를 이해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규칙 그 자체인 자. 보살의 가피를 입은 연화와 사방신인 백호는 영원히 평행선일지도 모른다. 속상함에 연화는 팔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래서, 지금 부부싸움하고 나한테 하소연하러 왔다는 이야기냐?”
“그래. 그러니까 좀 닥쳐라.”
저 멀리 높은 정자에 앉은 청룡이 혀를 찼다. 그는 죽상이 된 백호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는 듯 저 멀리 꽃밭으로 시선을 던졌다.
빗속에서도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난 꽃밭은 선명하게 보였다. 거대할 정도로 드넓은 꽃밭이었으나, 청룡이 원하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었다. 그걸 가져가려면 백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청룡은 일단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뭐가 문제인데?”
백호는 술잔의 청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싸하게 만들며 타고 흘러들었다.
“……보살의 가피라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어서.”
“그럼 뭐, 좋은 건 줄 알고 혼인했냐?”
청룡이 버릇처럼 비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일단 백호에게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청룡은 못마땅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보살과, 세상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없지. 뭐 다 알고 있었잖아.”
청룡의 최선을 다한 위로 비슷한 말에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연화가 안전하기를 바랐고, 백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에게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다. 치졸한 독점욕이라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 그는 몹시 불쾌했으나 본능적인 욕구를 감출 수는 없었다.
보살이란 홍진의 중생 모두를 구하려 하는 자. 그런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는 연화 역시 그런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뭐. 좀 화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래그래. 알긴 하겠는데, 어차피 혼인한 사이에서는 그런 걸로 싸워도 빨리 화해해야지. 아니면 너만 골치 아플 거다.”
청룡의 어른스러운 조언에 백호가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꼭 혼인을 먼저 해본 것처럼 말을 하는군.”
“그건…… 아니고.”
청룡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백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초조하게 피했다.
“흠.”
백호가 턱을 쓸면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냈다. 푸른 눈이 가늘게 좁혀지는 것을 보고 청룡이 노기를 띠었다.
“뭐,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냐, 왜?”
“아니, 뭐. 나도 들은 바가 있어서.”
“뭘? 아니, 누구에게?”
“네 최근 연애 사정에 대해서, 주작에게.”
백호가 싱글거리며 웃었고 청룡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술잔을 쥐었다.
“주…… 주작이 알아?”
“알다마다. 그것도 아주 상세히 알던 걸.”
백호가 시원하게 웃었다. 청룡은 끄응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일 사이가 안 좋은 주작이 그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다니, 정말 좋지 않은 일이다. 차마 성질대로 백호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의 협조를 구해야 하니.
“그 콧대 높던 청룡께서, 나 백호의 혼인을 그리 비웃던 분께서 말이야. 세상에 그 누가 인간의 여인을 만나…….”
“시끄러워, 닥쳐!”
몸을 부르르 떨고 기어코 청룡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는 발을 굴렀다.
“빨리, 비를 그치게 협조하란 말이다. 그래야 내가 꽃을 가지고 돌아가지!”
“아아, 그래. 네 인간 연인에게 말이지.”
“시끄럽다고 했다!”
콰르릉 하며 천둥이 울렸다. 지금 이 비도 물을 다스리는 청룡이 행차해서 신령계를 헤집고 돌아다닌 때문이었으니, 천둥 역시 그럴 것이다. 백호가 힘을 써서 날씨를 조정하지 않으면 비가 멈추지 않을 게 뻔했다.
“단장초(斷腸草) 따위를 왜 가져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악취미라며 백호가 투덜거렸다. 먹으면 내장이 온통 끊어진다 하여 단장초라는 이름이 붙은 극독을 품은 꽃이다. 그걸 굳이 가져가겠다며 청룡이 이 먼 신령계까지 발걸음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예쁘잖아.”
“그건 그렇다만.”
그의 말대로 단장초는 독에 어울리는 만큼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얼음조각과 같은 투명한 꽃잎에는 연한 보라색이 퍼져 있었고,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 아름다움에 홀려 손을 대면 독이 퍼져 피부가 중독되어 문드러진다.
백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가져가려는지 모르겠군. 네놈은 중독되지 않겠지만 꽃이 꺾이는 순간 거기서 새어 나온 극독이 공기 중으로 퍼지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 비나 멈춰라.”
“시간이 걸려. 이미 비를 멈추기 위해 다스리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두어 시진 이내에 맑은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하기야 자연의 섭리란 갑자기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하여 멈추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치면 단장초는 제일 먼저 그 매끄러운 표면에서 물을 날려 보내고 매끈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혼인한 반려에게 잘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악우의 목소리가 어딘지 우울하게 들려서 백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게, 희고 창백한 청룡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후회 따위는 안 해.”
백호는 즉답했다. 그는 술잔을 완전히 털어내고 남은 술이 찰랑거리는 술병을 정자 난간 밖으로 뿌렸다. 투명한 술방울이 흩어지며 풀밭에 내려앉았고, 삽시간에 그 주위의 흙에서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신들의 술이니 당연했다.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지. 어쩌겠어, 연화를 내 그래서 사랑하는 걸.”
“진짜 팔불출 다되었구만.”
“뭐 문제 있어?”
태양처럼 웃고 있는 백호를 멀거니 보다가 청룡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만큼의 확신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그랬다면 후회할 일이 없었을지도.
“아니, 아무것도.”
“싱거운 놈.”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구름이 두터웠으나 그의 눈에는 점차 옅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두어 시진이 지나면 완전히 맑게 갠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자, 그럼.”
그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룡의 눈이 금세 샐쭉해졌다.
“가려고?”
“술을 다 마셨으니 가봐야지.”
“술 핑계 대지 마라. 네 반려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 거잖아.”
“잘 아는군. 나는 네놈의 악취미적인 단장초와 달리 천화(天華)를 꺾어 가지고 가야겠다.”
백호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정자의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허공으로 몸을 띄우기 전, 그는 슬쩍 악우를 돌아보았다. 청룡의 얼굴은 여전히 말갛게 우울했다. 그 우울의 원인을 알 듯해서 백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건투를 빈다. 네게도 나만큼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지.”
“……시끄러워. 필요 없으니 빨리 꺼져라.”
청룡은 고개를 외로 꼬고 투덜거렸고 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 몸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수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이 그의 몸에는 닿지 못하고 산산이 허공중에 비산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백호의 신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청룡은 우두커니 정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리면 단장초를 가지고 그의 여인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꽃을 닮아 아름답고, 청룡의 마음에 극독만큼 해가 되는 여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