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붉은 달이 두둥실 떴다. 밤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른 달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했고, 홍옥처럼 붉은 빛을 지상으로 뿌렸다. 그 빛에 검은 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색의 달님이었다. 연화는 창가에 기대서서 서늘한 바람을 만끽했다. 아름다운 붉은 달빛이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딘가 그리운 기분이 되어 그녀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백호와 혼인한 것도 벌써 한 해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랑신부가 되어 지엄한 상제 앞에서 평생을 약조한 바를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잠을 깨면 먼저 상대의 얼굴을 보았고 기분을 살폈으며 서로를 보듬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언성을 높이거나 함부로 굴지 않았다.
특히 백호는 연화를 지극하게 보살폈다.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연화가 땅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품에 안고 다녔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령계를 둘러봐야 하는 일이 생길 때를 제외하고는 연화가 백호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반려에게 떡을 손수 잘라 먹이고 발을 씻겨주었으며 침대에 눕혀 재웠다. 꽃향기가 맡고 싶다고 하면 직접 그녀를 안고 먼 꽃밭까지 날아가 그곳을 정원처럼 거닐었다.
지독하게 다정한 사내였고, 그래서 조금 문제였다. 연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백호는 간혹 욕망에 물든 눈을 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보듬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짐승 그 자체인 저 밑바닥의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그럴 때 그의 청안은 깊게 가라앉아 마치 검은색처럼 보였다. 연화를 그대로 씹어먹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백호는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연화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추며 뜨거워진 숨을 달래고, 괜찮다고 그를 끌어들이는 반려의 손길도 마다한 채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를 소중히 대하고 싶다고, 백호 자신이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봤던 경험 때문인 듯했다.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연화는 중얼거렸다. 비록 한 번 저승에 발을 들였던 적이 있지만 이제 건강한 몸이었다.
그녀는 처음 백호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오기 전 열정적으로 안던 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지금의 안정되고 부드러운 관계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첫 번째로 가졌던 백호와의 정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산 속에서 엉망으로 안길 때 등에 느껴지던 거친 흙과 풀의 느낌까지도 생생했다.
왜 그토록 정신 차리기 힘들 만큼 거칠었던 관계가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는 것일까. 스스로가 음탕한 것인지 고민도 되었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욕망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알고 있었다.
하늘은 보름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달은 너무나 커서 자리가 비좁다는 듯 그 위용을 뽐냈다. 기이할 정도로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가만, 이렇게까지 달이 붉다면…… 백호 님의 그 시기가 혹시.”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잊고 있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붉은 달이 뜨면 백호에게는 발정기가 찾아온다. 일정한 주기를 갖고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으나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그 어느 때보다 그의 욕망이 높게 치솟는 시기였다. 연화는 멍하니 붉은 달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어떤 시간들이, 지독하게 뜨겁고 거칠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녀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면서 고개를 저었다. 밤바람은 적당히 서늘했고 뺨을 감싸고 살랑거리며 불었지만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생각이 예전의 그 밤들로 되돌아갔다.
“……백호 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백호는 신령계를 돌보기 위해 나가 이틀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보면 필시 백호가 눈치채고 무엇이냐 물었을 것이다.
연화는 발개진 얼굴을 감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둥실 떠오른 것은 그때와 똑같은 달이다. 필시 백호의 몸 상태 역시 비슷할 터.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가만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끼워준 옥가락지가 손끝에 걸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몸이나 씻자.’
차가운 물로 목욕을 하면 쓸모없는 생각 따위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옷을 벗어 내렸다. 굳이 이 밤에 시녀들을 깨울 필요는 없다.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와 냇물에 연결된 욕탕이 두 사람의 궁 안에 있었다. 연화를 위해 백호가 특별히 따로 마련한 장소였다.
사락거리면서 비단옷이 한 겹씩 벗겨져 내려갔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연화의 살갗 위로 서늘한 밤바람이 스쳤다. 곤두선 신경은 찬 공기 속에서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욕실의 창문은 사방팔방 열리게 되어 있었지만 연화는 하나만 열어두었다. 백호는 신선한 공기 속이 좋지 않냐며 문을 모두 위로 올려 묶고 목욕을 즐겼지만, 아직도 그녀는 노출된 공간에서 맨 살을 내보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발끝을 담그자 미온수가 느껴졌다. 한쪽으로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올랐고 한쪽으로 시원한 폭포가 쏟아져 중간에서 합쳐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물 안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 머리까지 적신 뒤 시원한 물 쪽으로 갔다. 몸이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어디쯤 계실까.’
신령계 전체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아무리 빨라도 칠 일이 걸리니 겨우 사흘째인 지금이야 저 멀리를 날고 있을 것이다. 영토는 넓고도 넓어 아무리 신이라 한들 한순간에 다 볼 수가 없었다.
찬물 속에 앉아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던 연화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휘영청 밝았지만 그 빛 외에 욕탕에는 어둠뿐이었다. 어슴푸레하게 흩어지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허벅지를 꽉 다물었다. 깊은 안쪽이 자꾸만 움찔대며 무엇인가를 원했다.
“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이는 멀리 떠나 돌아올 날은 멀었고 육신은 그를 원한다. 천 리 밖에서 아마도 그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했다.
이 욕실에서도 수없이 그와 몸을 나눴다.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의 밑에서 물을 맞으며 백호의 품에 안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연화의 머리카락과 목을 쓸어내리고, 등과 허리와 엉덩이까지 쥐며 내려갔다. 희고 연한 연화의 피부 위로 붉게 자국이 남는 건 예사였다. 엉덩이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와 그 깊은 은밀한 부분에 그의 굵고 긴 손가락이 닿으면…….
연화는 입술을 물었다. 기억이 흘러넘쳐 감각을 지배했다. 마치 백호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질 때처럼 뱃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미 동그란 가슴 위 유두가 작고 빳빳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붉은 달은 설마 반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걸까…….’
백호와 떨어진 시간이 이렇게 긴 건 혼인한 이후 처음이었다. 함께 있을 때는 살이 거의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가 연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끌어안고 있어 결국 연화가 힘들다고 한숨을 쉴 정도가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그럴 때면 백호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귀가 솟아 있어 그 귀가 축 늘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이렇게 몸이 달아오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뜻이다.
연화는 더 참지 못하고 손을 자신의 목덜미와 가슴 위로 쓸어내렸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살갗은 찬물 속에서도 여전히 열기가 흘렀다. 붉은 볼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유두를 쥐었다. 손톱 끝으로 살짝 긁자 등허리로 찌릿하게 전기가 흘렀다.
“…….”
누군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웠지만 사방은 고요했고 요요히 떠 바라보는 것은 붉은 달뿐이다.
조금 용기를 얻어서 연화는 매끄러운 피부 위로 손을 내려 조금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차마 갈라진 틈 사이로 깊이 넣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녀는 느릿하게 달라붙은 살점 사이를 손가락 끝으로 갈랐다.
뾰족하게 서 돌출된 음핵이 손톱 끝에 걸려 긁히자 엉덩이가 움찔 떨렸다. 연화는 자칫 새어 나올 뻔한 신음을 애써 삼키고 조심히 그 부근을 문질렀다. 차마 가장 예민한 부분은 다시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끈한 액체가 흘러 질구와 그 주변을 적셨다. 물 안에서도 확연히 감촉이 다른 액체가 손가락을 감쌌다. 한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유두를 자극하고, 연화는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딱 달라붙어 있던 살점이 갈라지고 붉은 꽃잎이 드러났다. 찬물 속에서도 뜨거웠다.
“백……호 님.”
한숨처럼 그의 이름이 샜다. 저녁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피부에 입술을 대던 백호의 체온이 그립다. 겨우 사흘째인데, 그에게 얼마나 길이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못 견디게 그리울까.
몸을 웅크리고 피부를 더듬던 연화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입술을 떨었다. 백호의 그 넓은 품과 뜨거운 체온이 필요했다. 얼마나 그가 그리운지 코끝에 백호의 체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비가 온 깊은 숲과 닮은, 아주 신선하고 어두운 향기.
“안아주세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연화가 속삭였다. 누가 듣는다면 꿈에도 하지 못할 소리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다리를 벌리고 백호를 그렸다. 너른 어깨, 연화가 아무리 매달려도 거대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강대한 육체. 파고들면 순간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묵직한 압박감을 선사하는 남자.
“백호 님…….”
허공을 향해 뻗은 팔목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흘렀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연화는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벌어진 입술 위로 다른 이의 입술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읍, 흐……!”
놀라 밀어내려는 여자의 가느다란 손목이 잡혀 눌렸다. 반항하려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도톰한 입술과 혀를 잘근거리면서 사내의 두터운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마구 범했다. 타액이 흘러 내렸다. 손바닥에 차가운 털과 같은 감촉이 느껴지고, 사내의 팽팽한 옷과 상체가 연화의 상체를 눌렀다.
발버둥치는 그녀의 몸을 내리 누르면서 커다란 육체가 물속으로 들어왔다. 철벅이는 물소리와 함께 밖으로 넘쳐 주위 땅이 온통 젖었다.
“……대, 대체…… 누, 누구!”
간신히 입술이 놓여난 연화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순간,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혼자 귀엽게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으르렁대며 낮게 울리는 소리가 욕탕을 울렸다.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얼굴의 절반이 호랑이와 닮아 있었다. 평소에도 강맹한 신체는 마치 겉의 장포가 찢어질 듯 부풀어 올라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손톱은 길고 날카롭게 휘어져 있었고, 흰 털이 얼굴과 목덜미와 손등까지 덮었다. 인간과 호랑이의 중간쯤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화는 손을 떨며 입가를 가렸다.
“……백호 님?”
대답 대신 낮게 웃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흰 얼굴 가운데 형형히 빛나는 새파란 눈이 살풋 접혔다. 그는 길게 혀를 내어 연화의 뺨을 핥았다. 마치 고양잇과 짐승이 하는 행동 같았다.
“놀랐느냐?”
“……세상에.”
연화는 발발 떨면서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 위에 얹어보았다.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 터질 듯 부푼 팔의 근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도 평소보다 훨씬 커진 듯했다. 백호의 눈동자 안 홍채가 확장되어 둥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모습을 너는 본 적이 없구나.”
“이 모습이라 하시면.”
“호랑이와 인간의 중간 모습이다. 금수의 날램이 필요하나 인간의 형태로 의사소통하고 싶을 때 취하는 모습이지.”
아아, 하고 연화는 놀란 상태에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호는 호랑이와 인간 두 가지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번갈아 취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변신 가능한 것이 두 모습뿐일 리가 없었다. 하위의 신령들도 서너 가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지배자인 백호가 변신에 제약을 받을 리가.
웃는 입술 아래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호랑이이기도 했다. 연화는 낯설고 두렵지만 동시에 반가워서 조심스레 백호의 목덜미에 드러난 털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민감한 피부 위로 거친 털이 비벼졌다.
“일정이 길어 잠시라도 널 보려고 이 모습으로 달려왔건만……. 귀엽게도.”
“백, 백호 님.”
“내가 그리 보고 싶었더냐?”
연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차마 백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설마 전부 보신 건가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백호의 생각에 몸이 달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스스로의 피부를 더듬는 장면을 그가 전부 봐버렸다니, 수치심에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백호가 웃으면서 이마를 연화의 뺨에 비볐다. 마치 커다란 고양이가 애정을 표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덩치는 산만 했지만 그는 백호다. 연화는 안심하고 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평소보다 양팔 안에 가득 차는 목덜미가 훨씬 굵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연화를 안아 들고 물 안에서 돌아앉았다. 옷을 입은 채 들어와 장포는 형편없이 다 젖어 있었다. 백호는 손톱을 세워 옷을 갈라냈다. 한순간에 넝마가 된 옷이 물 안으로 가라앉고, 나체가 된 채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끌어안아 허벅지 위로 당겼다.
연화는 잠시 그의 털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속삭였다.
“붉은 달이라서 그랬습니다…….”
변명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옹알거렸다.
“붉은 달이라 백호 님도 몸이 불안정하실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다보니 저도. 그러니까, 그게, 아무래도 반려라서인지 백호 님의 발정기에 저 역시 영향을 받는 게 아닐……지요.”
“……아하, 그래.”
길어지는 변명에 백호는 어쩐지 웃음을 참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