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눈앞의 소녀는 구전되는 상제의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 백호가 미리 언질해 주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상제의 검고 큰 눈은 온통 별빛을 담은 듯 빛났고 알 수 없는 위엄이 전신에 흘렀다. 상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나의 가솔이 된 아이야.”
백호는 그녀가 직접 빚어낸 아이였다. 그의 반려 또한 상제의 가솔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인간계의 자들 그 누구도 꿈도 꾸지 못할 까마득한 위치였다. 한낱 귀족이나 왕은 접근조차 하지 못할.
“넌 이제 내 아이란다.”
기쁨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백호와는 독립적으로 연화 역시 상제의 아이가 된다. 소녀의 몸을 한 신은 무릎 꿇은 연화의 앞에 다가갔다. 그녀의 희고 고운 발이 연화의 바로 앞에 섰다.
“네게 많은 선물을 내려줄 것이나, 그보다 네가 더 기뻐할 손님들을 내가 초대했단다.”
상제는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손님이라니, 연화가 의아한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광장 한가운데로 거대한 노란빛의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은은한 피리 소리가 사방에 펼쳐지며 저 하늘로부터 빛줄기를 타고 한 무리의 구름이 광장으로 내려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상제.】
“오랜만이외다, 여래.”
고막으로 직접 전달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낮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연화는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녀를 저승에서 돌려보내 준 은인이었다. 설마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약사여래 님……?”
상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이 다정했다.
“그래…….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렴. 약사여래의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란다.”
소녀의 다감한 목소리가 연화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광장을 바라보았다.
온통 노란 빛에 휩싸여 은은히 빛나는 약사여래의 일행은 여럿이었다. 여래의 수행자들이 그녀의 뒤에 늘어서 보필하고 있었다. 수행자들이라 하나 그들 하나하나 역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중생을 살피는 보살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연화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엄마?”
그녀는 눈을 믿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노란 빛으로 휘감긴 희고 고운 얼굴. 자신과 아주 많이 닮은 여인. 기억 속 그대로인 젊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합장한 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연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살짝 휘었다. 눈물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상제가 살짝 연화를 앞으로 밀어내었다.
“가보렴, 너의 어머니에게.”
저쪽에서도 여래가 어머니를 밀어 앞으로 보냈다. 연화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일어서서 치맛자락을 들추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길디긴 혼례복의 자락 때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며 달려가자 어머니는 마주 달려 올라와 딸을 끌어안았다.
“연화야, 연화야……. 내 아이야.”
목소리는 따뜻하고 울음이 배어 있었다. 연화는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어머니의 냄새.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향기가 코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머니……. 엄마.”
호접과 시녀들이 공들여 얼굴을 치장해 준 것을 잊고 연화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오래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 왔다. 눈앞에서 죽어갔던 어머니가 지금 자신의 앞에서 팔을 벌려 안아주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가…….”
어머니 역시 울었다. 그녀는 손으로 연화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며 어머니는 자신의 온기를 돋워 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어린 딸을 놓고 숨을 거두어 그리워만 하던 지난 날이었다. 비록 약사여래의 손에 이끌려 깨달음을 얻고 보살이 되었으나 딸에 대한 그리움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여래 역시 그녀의 슬픔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며 그녀를 다독일 뿐이었다.
“내 아가.”
그래,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연화도 어머니도 이제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울다 고개를 든 연화의 얼굴 분이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어머니가 눈물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애써 딸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분을 정리해 주려고 애썼다. 번져가기만 하는 분에 결국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어머니의 품 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조금 진정이 된 두 사람을 보다가 상제는 싱긋 웃으면서 약사여래에게 손짓했다.
“자, 여래. 이쪽으로. 간만에 걸음하시었소.”
모녀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단 위에 마련된 자리로 옮겨갔다. 여래가 탄 구름은 소리 없이 미끄러져 계단을 올랐다.
“역사적인 혼례의 장면에 증인으로 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상제.”
약사여래가 웃었다. 그녀의 수행자는 코끝과 눈이 빨갛게 된 채 딸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화장이 모두 흐트러졌으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제 그대의 신분은 천계에 속하게 되었으니 모친과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래는 손을 까딱여서 부드러운 바람을 불러내 연화의 뺨을 닦아주었다. 흐트러졌던 분 화장도 바람에 제자리를 찾았다.
다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면서 백호가 다가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는 연화의 어머니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모친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주 허리를 굽혔다.
“나의 딸입니다, 백호 님. 앞으로 함께 행복하시기를.”
“……감사합니다.”
백호는 연화의 손을 꽉 잡았다. 가느다란 손이 힘껏 맞잡아 왔다. 연화는 붉어진 눈가로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벅찼다. 환하게 푸른 하늘 아래 백호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긴 백발이 흩날렸고, 둘이 함께 입은 붉고 푸른 장포가 뒤섞여 날렸다. 서로의 손 안에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자, 이제 내 첫 아이가 반려를 맞이하는 좋은 날을 알리겠다. 오늘 하루는 이 삼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행복함에 젖어 살고, 저승의 혼백들은 잠시 지옥의 고통을 잊을 것이다. 매년 오늘의 이 하루에 가장 좋은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도록 하겠다.”
상제의 말이 높게 울려퍼졌다. 그녀의 말은 곧 힘, 물리적으로 들리든 들리지 않든 옥황상제의 언령은 삼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피조물에 스며들었다.
이 시각 이후로 매년 천계와 이승과 저승을 걸쳐 세계의 모든 존재가 축복받은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사방신의 혼례, 그 영광된 날을 기리기 위해서.
소녀는 고개를 돌려 백호와 연화를 바라보았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자, 너희가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연화는 예상치 않은 상제의 말에 잠시 당황하며 백호를 바라보았고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상제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예상하시리라 믿습니다만…….”
“흠.”
상제는 턱을 들었다.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연화의 영생을 요청합니다. 저와 함께 반려가 영원을 살도록.”
“예?”
연화가 깜짝 놀라 백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열렬히 상제를 볼 뿐이었다.
“단순한 줄 알았더니 많이 나아졌구나.”
옥황상제가 웃었다.
연화가 상제의 아이가 되었다지만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몸을 지녔고 그 몸에 따라 노화하고 죽고 다시 윤회의 굴레로 들어간다. 그것이 법칙이었다.
상제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해줄 의무는 없었다. 모든 일은 법칙에 따라, 행한 행동에 따라 결과를 받는 것이니 그도 백호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사방신인 주제를 잊고 반려를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꺼내려 하다니 참으로 발칙하도다.”
상제는 농담처럼 말했다. 백호는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제가 비록 가볍게 말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보통의 요청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었다. 보살이나 여래처럼 스스로 깨달아 굴레를 깨고 나오는 자가 아닌 이상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좋다. 네가 앞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들어주마.”
옥황상제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백호는 가볍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청룡의 영토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문제를 좀 일으켜볼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직접 움직이는 것은 불리할 수 있으니 신령을 앞세우면 소소한 분쟁이나 골칫거리 정도야 가볍게 안겨줄 수 있었다. 신령계와는 달리 인간계는 좀 더 다스리는 데 복잡한 법칙이 있었으니까 청룡이 분쟁을 가라앉히기 위해 직접 나설 수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 일로 악우에게 사소한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굴리는 백호를 보면서 상제가 혀를 끌끌 찼다.
“네 꿍꿍이 정도를 모를 것 같았느냐. 이 정도면 굉장히 싸게 먹히는 거다. 네가 한 번 입 다물고 꾹 참으면 되는 거야.”
백호는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늦은 아침의 햇살에 흰 뺨이 뽀얗고 투명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연화를 보낸 후 혼자 살 자신은 없었다. 윤회의 굴레에서 언제 빠져나올지도 모르는 인간의 영혼을 찾아 헤매는 것은 영겁의 고문일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니 청룡에 대한 사소한 감정 정도는 잠시 접어둬도 괜찮을 것이다. 반려를 곁에 붙들어둘 수만 있다면.
상제가 손뼉을 쳤다.
“좋아. 내 앞에서 금수의 신 백호가 답했고 나 역시 그에 응하지.”
옥황상제는 싱글거리면서 연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두 사람의 코앞에 붙어서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소녀의 몸을 하고 있어 키가 작은 상제는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연화는 얼른 무릎을 꿇어앉았다. 상제가 기특하다는 듯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성사된 언약이니 무를 수는 없단다, 백호.”
“당연합니다.”
“그래.”
“그리고 윤회의 굴레에서 빼는 방법은 내가 선택하는 거야.”
“……네, 그거야 당연히…….”
백호는 조금 불안해져서 눈을 찌푸리고 상제를 흘끔 훔쳐보았다.
“본래 종족별로 정해진 수명은 내가 손댈 수 없어.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지.”
“스스로 빚으신 종족이니 예외를 만드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전전전전대의……. 아무튼, 동일성을 따지자면 그리 높지 않은 상제가 만들었느니라.”
“지금 언약해 놓고 안되신다고 하실 겁니까?”
“그건 아니고.”
상제는 긴 비단 자락을 끌며 연화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