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너한테 꼬리 열 개 달린 여우가 하나 있지?”
“……묘우 말이냐?”
“그래. 그 묘우라는 놈. 그걸 나한테 다오.”
“묘우를? 왜?”
백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아무리 연화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지만 묘우쯤 되면 신령계의 장로격이다. 백호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산 신령 중 하나라 함부로 다른 사방신의 영토에 보낼 수는 없었다.
“저승으로 심부름 보낼 일이 있을 때 그놈을 쓰려고. 아무래도 인간들은 한 번 가면 못 빠져나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시종 수가 지나치게 줄고 있어.”
“그럼 네놈이 직접 가라. 저승에 무슨 볼일이 그리 많다고 시종을 보내서…….”
“남이사? 금수나 다스리는 네놈과 달리 인간은 골치 아픈 일이 많다고.”
주작이 투덜거렸다.
“꼬리 열 개의 여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오긴 하겠지. 내 심부름꾼으로 달라는 게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신령계의 장로격인 놈을 달라니 심하구만.”
백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도 내심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묘우는 연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은 후라면 모르되 아직 불안정한 위치의 연화와 묘우를 함께 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예 주작의 영토로 보내버린다면 잠시 떼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보낼 수는 없고 기간을 정할 생각이었다.
“주는 건 안 된다. 기간을 정하지, 빌려주는 거다.”
“뭐? 째째한 자식.”
“네놈의 새끼 새를 내가 달라면 줄 거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새끼 새라니, 엄연히 어린 봉황이다.”
주작이 데리고 있는 어린 나이의 봉황을 새끼 새라고 부르는 것은 사방신 사이에 유행이었다. 평소 여유만만한 주작이 새끼 새 소리만 들으면 발끈하는 게 흥밋거리였기 때문이다. 백호가 히죽거렸다.
“네가 주작의 지위에 있을 동안 데리고 있어라. 너 어차피 얼마 안 할 거잖아.”
주작은 나머지 세 사방신과 달리 자신의 후계자를 길러냈다. 사방신의 역할이 몹시 재미없어 천계를 놀러다니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자 하는 거대한 새였으니 한 군데서 인간을 다스려야 하는 사방신의 직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백호도 마찬가지였지만 의외로 백호는 신령계 안쪽을 쏘다니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인심깨나 쓰는 척하는군. 얼마 안 남은 걸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묘우같이 오래된 신령을 그 새끼 새가 감당할 수 있을 거 같냐? 게다가 여우라고.”
주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사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간의 경우로 빗대자면, 묘우는 한 나라의 재상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인간계와 그 다스리는 체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주작이 그를 달라고 한 것은 신령계의 큰 버팀목을 하나 달라는 것이나 진배없는 소리였다. 그나마 백호가 그를 떼어낼 생각을 하고 있어 거래가 성사된 것이었으니.
그녀의 후계인 어린 봉황은 아직 여우의 신령을 상대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리를 이을 때쯤이 되면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지만.
뭐 어쨌든 꼬리 열 개 달린 여우란 제법 귀여운 족속이다. 한 번쯤 데리고 있고 싶을 만큼.
‘고 녀석 갈색 머리도 포슬포슬하니 예쁜데 말이지.’
사실 탐내온 것은 꽤 오래되었다. 주작은 흘긋 묘우가 있을 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영토의 중요한 인재로 쓸 생각은 없고 그저 심부름꾼으로 가끔 쓰며 귀여워해 줄 생각이었으니 백호의 말도 나쁘지 않았다.
“좋아. 거래 성사다.”
“그래. 나중에 다른 소리 하면 안 된다. 이걸로 빚은 갚은 거야.”
백호는 싱글거렸다. 이로써 골치 아픈 일 하나가 해결되었으니 나쁠 일이 없었다.
“곧 오시(11시)다.”
백호는 몸을 일으켰다. 해는 중천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곧 오시의 쭉 뻗은 햇빛을 타고 이 결혼을 주관할 귀한 분, 옥황상제가 내려올 것이다.
남자의 긴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하늘은 쨍하게 맑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모든 공간에 빼곡히 채운 꽃더미 덕분에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솟아올라 하늘을 수놓았다.
연화와 마찬가지로 백호 역시 혼례식을 맞아 적색과 백색이 섞인 장포를 입고 있었다. 붉은 비단 위로 호랑이를 수놓은 장포의 긴 자락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오실 때가 되었어.”
사방신들이 전부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단 아래의 광장에 도열한 신령들 역시 몸가짐을 정갈히 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정확히 오시를 가리키는 순간 광장의 중앙에 바람이 불었다. 수없이 많은 명주실들이 바람에 날려 찰랑이는 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오랜만이로구나, 나의 아이들아.”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도열한 신령들이 전부 가운데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방신들 역시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상제님.”
높은 하늘 아래, 신령들이 가득 찬 광장의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소녀가 서서 별빛 같은 눈을 반짝였다.
소녀의 몸은 밤하늘처럼 검은 비단과 흰 광목이 휘감고 있었다. 그녀가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금속팔찌가 찰랑거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사방신과 만물의 법칙을 주관하는 옥황상제였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상제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렸다. 은색과 금색이 온통 뒤섞인 머리카락은 반쯤 투명하면서도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그녀는 거침없는 태도로 광장을 걸어갔다. 작은 발이었지만 걸음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빨라, 거의 다섯 걸음 만에 상제는 작은 발로 단 위에 올라섰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백호, 주작, 현무, 아아, 그리고 말썽꾸러기 청룡. 오랜만이로구나!”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반가운 듯 말하면서 상제는 청룡에게 눈을 흘겼다.
하늘 위에 홀로 떨어져 있지만 상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천리안을 지닌 상제는 이 세상의 법칙을 관장하는 자다.
청룡은 입가를 씰룩였으나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여기서 말을 붙였다간 한마디 더 꾸중을 들을 뿐이었다. 게다가 불만을 말하기에는 평소 그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제법 많았으므로.
상제는 몸을 돌려 백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백호의 손을 잡았다.
“너의 반려를 보았다. 잘 골랐더구나.”
백호는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옥황상제는 사방신을 직접적으로 빚어낸 창조자였다. 자식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반려에게 신경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성정이 올곧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네가 신령과 인간의 구별에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구나. 사방신의 반려로, 나의 새로운 아이로 부끄러움이 없다.”
“감사합니다, 상제 폐하.”
“내 아이가 자라 벌써 혼인할 때가 되었구나!”
소녀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녀가 머리를 한 번 흔들 때마다 멀리에서 빛이 번쩍였다. 기쁘기 그지없는지 상제의 기분에 반응하는 하늘이 화려했다.
사실 그녀가 이전에 빚어낸 선대 사방신들은 모두 천계에 머물며 지내거나 자연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사방신들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어린 막내 아이들이나 다름없었다. 상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머지 셋도 빨리 반려를 찾으면 좋을 것인데, 워낙 고집들이 세야 말이지.”
“폐하, 본래 현무의 자리를 채웠던 자들은 대대로 혼인을 하지 않아…….”
“그래. 내가 참 잘못 빚어냈던 게 아닌가 싶구나. 이 거북이 녀석들은 도통 반려를 들이는 데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상제가 혀를 찼다. 현무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멋대로 이성을 즐기는 편인 주작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말을 보탰다가는 제발 그만 정착하라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상제가 한 바퀴를 돌았다. 검은 비단과 흰 광목이 퍼지고 짤랑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녀는 유쾌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원래 인간계에 신경은 쓰지 않는 이지만…….”
“손님이시라면…….”
백호가 의아하게 물었다. 대답 없이 상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맑았다. 그녀의 팔찌는 끊임없이 짤랑이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었는데, 이 세계 어딘가에 끝없이 비를 뿌리고 천둥과 번개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신령계에서는 모든 구름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상제는 최고로 아름답고 맑은 하늘을 원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던, 이번 대 사방신 중 첫 번째 혼례였기 때문이었다.
상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이제 네 신부……. 인간인 연화를 나오라고 하지 않으련. 가약을 맺자꾸나.”
누각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화의 행렬이 상제의 도착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 많은 수의 시녀들이 함께 따라붙고, 연화의 곁에는 두 명의 시녀가 붙어 움직임을 도왔다. 붉은 비단 위에 푸른색으로 수를 놓은 혼례복은 소매와 치맛자락이 길었다.
광장 위 장엄한 높은 단 위에 올라 있는 상제와 사방신의 앞으로, 연화는 긴장을 견디며 걸어 나갔다. 키가 큰 사방신들이 오만하게 연화를 내려다보았고 광장을 가득 채운 신령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쨍하게 맑은 하늘 아래 심장이 떨리도록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 가장 높은 곳에서 백호의 시선을 마주하고 연화는 조금 웃었다.
오만한 신들의 눈 사이에서 백호의 눈만은 걱정과 애정을 가득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기 새를 보는 어미 새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 연화의 발걸음에는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비단과 꽃으로 장식된 긴 길을 걸어가 머리 위에 옥과 상아로 된 잠화를 장식하고 연화는 상제의 앞에 나붓이 절을 했다.
“상제님을 뵙습니다.”
인간 여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곁에서 부축해 주는 시녀들이 없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들 중 몇이나 옥황상제를 대면하는 영광을 얻을까. 상제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도 몇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