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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05화 (105/113)

105화

호접은 기쁜 마음으로 신부의 방에 들렀다. 이미 합방한 지 오래인 백호와 연화지만, 혼례를 올리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둘은 각자 방을 따로 쓰면서 진짜 결합을 위해 몸을 정갈히 하고 있었다. 작은 몸집의 나비의 신령은 흔들흔들 날개를 흔들면서 문간에 쳐진 구슬발을 살며시 걷고 방 안에 들어섰다.

신부의 방은 온통 오색으로 빛났다. 이날을 위해 매일 꽃을 갈아 꽂아와 방 안에는 한가득 향기로운 수선화의 향이 가득 찼다. 잡내를 없애기 위한 향내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령계의 깊은 굴에서 채굴하는 가장 좋은 수정과 옥으로 촘촘히 꿴 구슬발이 천장과 창문에 듬뿍 매달려 아침 햇살을 온통 반사했다. 백호가 전 신령계에 명을 내려 일주일 전부터 급히 모아 온 보석과 금속이 온통 탁자 위에 널려 있었다.

시녀들이 연화에게 달라붙어 적삼과 치마를 입혀주다가 호접이 온 것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냐, 그러면 안 된다. 이제 이 신령계의 가장 높은 지체가 되실 분 앞에서 내게 따로 예를 표하다니.”

호접은 손을 들어 시녀들을 제지했다. 여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연화의 머리를 빗겨주고 연지를 찍고 분을 발랐다. 가만히 앉아 그 손길을 받던 연화는 살짝 눈을 들어 호접을 보며 인사했다.

“호접 님.”

“예, 연화 님. 좋은 아침이지요.”

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했는지 연화의 눈은 조금 발그레했다. 여전히 맑고 고운 얼굴이었다. 호접이 그녀로서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혼례를 치러야 해서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어 백호 님이 아주 안달이 나셨답니다. 하지만 서로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네.”

백호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며칠 전에도 들었다. 혼례 전에는 서로 몸을 정갈히 하는 것이 오래된 관례이기 때문에 체통을 지키라는 호접의 꾸중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기실 그녀도 백호가 더없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을 키우기 위해 일주일간 서로 독방 생활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화는 부끄러움에 볼을 붉혔다.

이따위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연화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정말 생각도 못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호 님의 반려.’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 부위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진짜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백호의 정식 반려, 사방신의 아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위치였으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백호와 부부가 된다. 그 아름답고 강한 사내가, 연화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여 영생의 아내로 받아주는 것이다.

“곧 귀한 손님들이 오실 겁니다. 사방신의 혼례라니, 이번 대의 신들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지요. 상제께서도 걸음하신다 하셨으니 정말 큰 잔치가 될 것입니다.”

호접은 기쁘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연화 님이 머무셨던 마을과 양어머니께는 백호 님께서 마땅한 재화를 베푸셨습니다. 왕조가 바뀌었고 청룡 님께서 다스리겠다 하셨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에서 돌아와 몸을 조금 회복한 뒤에 그녀는 이미 마을에 다녀왔다. 백호의 품에 안겨 날아간 마을은 새로 지은 집과 깨끗해진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청룡이 보낸 자들이 마을의 재건을 도와주었다 했다.

죽은 자는 되돌릴 수 없었으나 산 자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양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연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양모는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집에서 걸어 나올 수도 없어, 연화는 방 안에 앉아 양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가를 붉혔다. 혼례식에 초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행복하라고 하셨어요.”

“그랬군요.”

호접은 연화의 손등을 다독였다.

양어머니는 노쇠해 지친 얼굴로도 연화의 혼인을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놀랄까 염려되어 신과 혼인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고, 다만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말만 전했다.

그것으로 양어머니는 매우 위로를 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곧 떠나겠지만 너는 외롭지 않겠구나, 하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양어머니 말씀대로 살아야죠.”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면서도 연화는 울지 않고 웃었다. 행복하기를 바랐으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양어머니는 가장 소중한 이들 중 한 명이었으니. 호접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물론이죠.”

공기 중에는 온통 따듯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기름에 지진 갖은 종류의 전야와 참기름에 고물고물 묻혀낸 데친 뿌리 식물들, 고소한 깨소금을 뿌려 볶은 오색 면요리. 달콤한 설탕 과자와 경단들이 예쁜 그릇에 담겨 올라왔다.

연회에는 인간계와 신령계의 모든 음식들이 올라왔다. 이날을 위해 일주일간 백호궁의 시녀들은 넓디넓은 주방에서 떠나지 않았다.

연화는 가만히 치마폭 위로 손을 모았다. 그녀는 붉고 푸른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 위에 가채를 올리고 향기로운 동백기름을 발라 손질한 뒤 옥과 상아로 장식된 머리꽂이를 꽂는다. 귀에는 자색수정의 귀걸이를 달고 목에는 오색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건다. 붉은 비단으로 지은 치마에는 금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다. 상제의 선물로 선녀들이 짠 혼례복을 보낸 것이라 어느 한 곳도 맺힌 곳이 없었다. 진실로 천의무봉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에는 한 쌍의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백호가 연화의 안녕을 바라며 끼워준 것이었다.

연화는 그 손을 품 안에 넣어 손가락 끝으로 어머니의 작은 손수건을 살며시 만졌다. 그 무엇보다 고마웠던, 친어머니의 유품. 귀한 몸으로 밤새 숲속을 돌아다녔을 백호가 생각나서 그녀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 * *

신령계의 가장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봉우리에 백호의 궁이 있다.

본래 닫혀 있던 궁 뒤의 광장이 열리고 그 위에는 높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세 신이 앉아 있었다.

“여, 잔치는 성대하게도 준비했군.”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눈앞에 앉은 세 신을 바라보았다.

“드러누워 있더니 잔치에는 재빨리도 왔군.”

청룡에게 한 말이다. 푸른 머리의 남자는 코웃음을 치고 오만방자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내 안배해 준 진을 다 깨부숴 버린 멍청이가 결혼한다는데 와봐야지.”

“내가 살점까지 베어내며 부탁했는데 그따위로 일처리를 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선에서는 최선이었어. 그대로 뒀다면 왕이건 네 반려건 반란군한테 목이 잘려나갔을 게다.”

“말 함부로 하는군. 제 나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바다 밑에 드러누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만 한 주제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마주치자마자 짖듯이 싸워댔다. 주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천 년을 살아도 일곱 살짜리 어린애들 같은 저자들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화한 주작과 여전히 검은 어둠을 두르고 있는 현무. 현무는 이 밝은 날 밝은 곳에 나와 앉은 것이 조금 불편한 얼굴이었고 주작은 현무가 불편한 안색이었다.

약간 질색한 표정으로 주작이 현무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상성상 둘은 근거리에 앉아 편안할 수가 없었다. 현무 역시 아닌 척했지만 쏟아지는 햇살만큼 주작의 붉은 기운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부채로 햇살을 가리면서 말했다. 눈이 부신지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염라대왕께서 직접 행차하지 못하시어 아쉽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다. 사방신의 첫 번째 혼례인데 일이 워낙 바쁘셔서 나만 오게 되었어.”

“됐어. 그 영감은 안 나오는 게 세상을 돕는 길이니.”

백호는 혀를 끌끌 찼다. 상제도 아니고 염라대왕이 신령계로 행차라니 큰일 날 소리다. 그의 옷자락에 눈먼 죽음이 매달려 올 수도 있었다.

염라대왕의 성미라면 일이 조금 한가하면 이승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올 텐데, 저승이 언제나 일로 바쁜 세계라는 건 대단히 다행이었다.

“현무 네놈은 말이야, 멋대로 명부를 채워주고 말이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청룡이 투덜거렸다. 그는 백호 쪽을 흘겨보았다.

“백호 저놈을 저승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현무가 킬킬댔다. 그는 턱을 괴고 앉아 흘긋 청룡을 훑어보았다.

“제놈도 똑같이 했을 거면서 허세는.”

“무슨 헛소리야? 나 같으면 없는 명부를 만들어서라도 보내버릴 것이다.”

“네가 저승 관할이 아니라 천만다행이구나.”

악우들의 대화에 주작은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저 유치한 대화에 낄 생각은 없으되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날렸다.

“금수의 왕이 우리들 중 처음으로 반려를 맞는군. 어때, 기분은?”

“당연한 걸 묻는데.”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연화가 대기하고 있을 저 너머의 신부방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의 눈길은 전에 없이 부드럽고 사랑이 흘렀다. 원래의 그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감정들이 넘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걸 보고 동료 사방신들은 놀리고 싶어 입술을 실룩대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어쨌든 오늘은 경사스러운 사방신의 혼례일, 신랑을 약 올려서 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 생각은 셋 모두에게 없었다.

물론 청룡은 조금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만은 참자고 아주 다행스러운 결심을 했다.

주작은 자신의 긴 적발을 쓸어넘겼다. 그녀는 머리와 똑같은 색의 눈을 돌려 백호를 바라보았다.

“이봐, 지금 아니면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신세 진 건 기억하지?”

“물론이지.”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작에게 입었던 신세를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나? 기꺼이 답례하지.”

주작은 씩 웃었다. 붉고 푸른 혼례복을 입는 신랑 신부를 위해 오늘은 붉은 옷을 입지 않고 어두운 남색 계열의 옷을 입었지만 그녀는 본래 본체와 닮은 새빨간 색의 장신구와 비단을 사랑했다. 남방의 신은 턱을 괴고 흘긋 신부의 방이 있는 누각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아마 그 여우가 있으리라. 붉은 털을 지닌 예쁜 여우.

주작은 예쁜 것을 참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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