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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04화 (104/113)

104화

신이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한낱 인간인 연화에게서 평생의 자유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백호는 그래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더 이상은, 그녀가 자신의 손안에서 벗어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남자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호가 눈을 크게 뜨고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양손을 자신의 두 손에 쥐고 연화가 남자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연화야.”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백호 님의 진심이라고 믿을 수 있게.”

애처로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의 심지는 강했다. 연화는 자신의 마음을 간직하고 백호의 맞은편에서 똑바로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고 둥근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고였고, 바라보는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백호는 잡힌 두 손에 힘을 주어 마주 잡았다. 새처럼 가늘고 예쁜 손. 떠나 있던 동안 밤마다 손 안에 느꼈던 여인의 손이었다.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바람처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너를 연모한다.”

아, 하고 여인은 백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귓가로 심장 소리가 쿵쿵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새빨갛게 물든 여인의 뺨과 귀를 보면서 백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연화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백호의 맨 어깨에 닿아 스몄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저라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단호한 대답에 연화는 고개를 들어 다시 백호를 바라보았다. 진실된 푸른 눈에 차 있는 부드러운 온기와 애정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며 체온 역시 섞여들었다.

“제가 먼저 연모하였습니다, 백호 님…….”

여인이 속삭였다. 남자는 떨리는 심장을 붙들었다.

“그래.”

연모는 함께 하였으되 먼저 심지 굳게 그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은 연화였다.

누가 감히 신이 인간보다 현명하다 하겠는가, 멍청하게도 그녀에게 다른 정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토록 먼 길을 돌아오게 되었다.

후회는 파도처럼 백호의 마음을 덮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째서 더 빨리 알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도, 저도 놓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연화가 백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오래 느끼지 못했던 백호의 체향과 온기가 전신으로 스몄다. 이미 눈가가 젖어 있었고 더 울고 싶지 않아 연화는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리 말해 주어 정말로 기쁘구나.”

백호는 연화의 허리를 잡아채 꽉 끌어안았다. 가냘픈 여자의 몸이 그의 긴 팔 안에 감겨들었다. 그는 입술을 연화의 뺨과 귀에 부비며 속삭였다.

“그래, 이제 나는 네 곁에 있다. 영원의 시간 동안.”

백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말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영생을 사는 사방신이다. 나의 반려가 될 자는 그만큼의 의무와 많은 책임감을 지게 되지. 나는 꽤 다혈질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평온해 보여도 신령계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나는 때로 싸우며 지킨다. 언제나 반려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위치인 게다.”

백호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뱉었다.

“그런데도, 나의 반려가 되어주겠느냐?”

연화는 환하게 웃었다. 햇살처럼 밝은 웃음이었다.

“기꺼이, 나의 백호 님.”

* * *

신령계의 밝은 아침 해가 떠올랐다.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떠들썩하게 일하던 부엌의 신령들은 궁 안을 거닐어 오는 호접을 보고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다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느냐?”

“그럼요. 경사스러운 날 아닙니까.”

토끼 신령이 기쁜 얼굴로 외쳤다.

“백호 님께서 드디어 혼례식을 올리는 날이지요. 어여쁜 아가씨와 함께요.”

신령들의 면면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연화가 인간의 여인이라 신령들이 부정적으로 볼까 잠시 걱정했던 호접은 근심을 접고 마주 웃어 보였다. 짐승의 신령들이란 대부분 밝고 명랑한 자들이다. 고정관념 같은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호접은 여봐란 듯이 턱짓을 하며 곁에 선 묘우의 허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갈색 머리 미남자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지만 곧 그는 무표정을 가장했다.

제법 마음에 들었던 뱀 일족의 사영이 직접 저승으로 걸음한 것은 가장 예상 밖의 일이었다. 처음 청수희에게 말을 전하면서도 그는 생명 자체에 대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 인간이라도 잡아다 밀어 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다간 백호 님께 꽤나 경을 치긴 했겠지만.’

하마터면 백호가 저승부터 시작해 정말로 세상을 날려버릴 뻔했다는 이야기에 여우의 신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청수희가 전해준 이야기는 아찔할 만큼 위험했는데 샘의 정령은 아주 신나는 무용담이라도 건진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여겼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아, 화려하네 화려해.”

묘우와 호접의 뒤에 선 청수희가 분주한 궁 내부를 돌아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아름다운 청색 머리카락을 예스럽게 틀어 올리고 식에 걸맞을 만큼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박하던 궁이 이리도 달라질 수가 있네, 저건 진짜 금사야? 세상에.”

“능라비단에 금사죠. 선녀들이 짜낸 것이라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어요.”

“오, 이 정도면 주작궁이나 용궁에 그대로 가져다 놔도 손색이 없겠는 걸.”

궁 안을 거의 덮다시피 장식한 걸개와 깔개들을 보며 청수희가 감탄했다. 과연 호접이 자랑할 만한 호사스러움이었다. 어지간한 연회에도 꺼내지 않던 사치품들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아아, 여기 사영 아가씨도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사영 아가씨요…….”

호접이 조금 침울해졌고 묘우가 흘긋 청수희를 돌아보았다.

“그분은 이제 어찌 되신 겁니까?”

“어찌 되다니?”

“저승으로 가셨으나 유례가 없던 일이지요. 산 목숨이 신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제물이라 할 법하고. 아무래도 염라대왕께서도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실 듯한데요.”

청수희는 입가를 비틀었다. 하여간 이 오래된 여우의 신령은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래도 소식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도 된 기분이라며 잠시 툴툴댄 뒤 말을 이었다.

“나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영 아가씨가 바로 저승으로 넘어가 윤회의 수레바퀴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죠?”

“나중에 삼도천의 물을 타고 가 훔쳐보았을 때 현무 님이 꽤 즐거워했거든.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고.”

사방신 중 가장 오래 산 현무는 가끔씩 등장하는 평소와 다른 상황을 즐겨 받아들였다.

아마 사영의 존재는 나타나는 순간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리라. 죽을 자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넘겨주려는 자는 간혹 나타났으나 삼도천의 물을 건너와 신의 상징물을 내놓을 정도의 존재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럼…….”

“현무 님 정도면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영 아가씨 한 명 정도는 뒤로 빼돌릴 수 있을 거고. 내가 훔쳐보았을 때 벌써 사흘이 지나 있었지만 현무 님은 여전히 사영 아가씨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던 걸요.”

“허어.”

예상외의 말에 호접과 묘우 둘 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빨리 윤회의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무가 즐거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묘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모시는 입장이지만 사방신이라는 분들은 역시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그렇죠, 뭐.”

청수희가 씩 웃었다. 그녀는 사실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영의 결심을 몇 번쯤은 더 만류했으리라. 청수희는 현무와도 제법 친분이 있었고, 최근 그가 무료함에 지쳐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사영은 그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수국의 왕조 교체 역시 제법 부드럽게 되어서 청룡 님 쪽도 분위기 나쁘지 않다고 하고요.”

“그렇군요.”

아마 죽은 자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수국의 왕가는 이미 만희 한 명을 제외하면 방계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선대부터 만희까지 2대에 걸쳐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핏줄들을 전부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란군이 왕궁을 점령한 뒤 큰 저항이 없었다. 물론 대귀족이나 대신들을 치밀하게 먼저 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에 수국의 왕이 된 사내도 제법 재미있는 것 같단 말이야.’

청수희는 속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오유라 하였던가, 그는 아마도 새로운 국가를 개국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가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인간계에 다시 한번 파란이 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깜짝 놀랄 정도의 일도 잘 일으키니 어쩌면 주작의 영토에까지도 영향이 미칠지 몰랐다.

시녀들이 좋은 향기가 나는 꽃들을 화병에 담아 바닥에 놓았다. 물망초를 꺾어 엮은 꽃다발이 벽에 걸려 장식되고, 수선화는 탁자 위에 놓였다. 궁 바깥에도 붉은 비단과 희고 푸른 꽃으로 화려한 길이 마련되었다. 혼인하는 백호와 연화가 밟고 걸어갈 길이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했습니다. 이 신령계의 모두가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음식이지요!”

부엌의 신령들이 기쁨에 차서 준비한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갖은 채소를 볶아 당면과 섞은 잡채와 채소 절임, 고기를 잘게 다져 볶은 뒤 설탕과 간장으로 간을 맞춘 요리, 생선을 구워 기름을 부은 접시 위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곁들일 술과 차 역시 항아리로 준비되었다. 한껏 솜씨를 부린 음식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다.

곧 혼례식의 연회장소에 귀한 손님들도 올 것이다. 신령계에 이토록 커다란 축제는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모두가 들뜬 얼굴이었다.

묘우는 조금 얼굴을 구기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는 별다른 소용도 없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실은, 연화가 그리 싫지도 않았다.

‘엉뚱한 욕심쟁이가 반려로 들어오는 것보다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제야 간신히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호접이 그 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웃으니 얼마나 좋냐.”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아이고, 그러셔.”

고집스러운 동료의 말이 더 웃겼다. 묘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가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궁 안의 신령들을 지휘하며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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