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연화는 까무룩하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너무 오랜만에 그리워하던 이의 체향과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잠시나마 영혼이 떠나 있었던 육신은, 비록 약사여래의 손길로 목숨을 유지했지만 체온이 떨어지고 잠시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차가워진 손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자신을 달래듯 등을 쓰다듬고,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와 입술에 천천히 문질러지는 것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느낀 것이었다.
‘따뜻해.’
떨어져 내린 어둠 속은 안온했다. 마치 그녀를 받아 안은 누군가의 품 안과 같았다. 육신의 감각은 모두 사라졌음에도 꿈속에서마저 연화는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현실의 불안감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의 품이기에 이토록 평화로울까.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 이렇지 않았을까. 어둡고 따스하고 평안한 공간.
【행복하니?】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부드러운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옅은 온기를 두른 이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쁜 존재는 아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히려 아주 호의적인 목소리였다.
연화는 잠이 든 중에도 환하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 자신의 몸에서도 온기가 넘쳐흐른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약사여래를 닮은, 자비로운 옅은 노란빛의 온기였다.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답했다.
“행복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몰라도, 그저 백호와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소중한 사람.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저승까지 달려가 주었던, 나의 신.
【그래, 잘되었구나.】
그렇습니다, 하면서 연화는 웃음기를 띤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 위로 가느다란 손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어딘지 매우 그립고 그리운 손길이었다. 상냥하게 머리와 이마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은 곧 뒤로 물러났다.
그 손을 잡고 싶었으나 가지 말라는 말은 이상하게 나오지 않아 눈가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존재가 사는 곳과 연화가 사는 세계가 유별함을, 그녀 자신이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조차 합칠 수 없는 먼 거리.
【참 잘되었어.】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굳이 눈을 떠보지 않아도 말은 맑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연화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잘되었지요, 어머니.”
연화가 다시 정신을 찾은 것은 맑은 햇살이 눈꺼풀을 통과하는 아침이었다. 청량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코끝으로 익숙한 치자향이 몰려 들어왔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이 뻑뻑하고 목도 말랐으나 잠을 잘 잔 듯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웠다. 바스락거리며 연보라색의 가벼운 모시이불이 움직였다.
“돌아왔구나…….”
눈앞에 보인 것은 익숙해졌던 백호의 침실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공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시선 너머로 백호의 푸른 눈이 부드러운 온기를 담고 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부드러운 향내가 감돌았다.
“잘 잤느냐.”
“예.”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은 그의 팔이다. 연화는 마주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짧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인은 조금 더 그에게 몸을 깊게 기대어 안겼다. 너른 품이 안온하고 따스했다.
세상은 온통 고요했다. 신령계의 아침이 늘 그렇듯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풀과 치차꽃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그랬듯.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연화의 몸을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달리 성애의 뜻을 담은 손길은 아니었다. 단지 보듬고 다독여주려는 손길.
그 손 아래 있으려니 지독했던 지난 얼마간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중간의 시간이 잘려나간 듯, 백호와 함께 지내다가 그저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듯한 기분이었다.
연화의 둥근 눈이 깜박였다. 반듯한 이마에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넘겨 주며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지 피부 아래로 모시이불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 아무런 옷도 입지 않은 백호의 피부도 함께였다. 그의 높은 체온이 그대로 연화의 몸을 덥혔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적당히 서늘하고 안긴 품은 적당히 뜨거워 더할 나위 없었다.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기분으로 연화는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떠났었는지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대충 알고 있다.”
백호는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작고 가녀린 호흡이었다. 지난밤 손수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몸에 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저승으로부터도 다시 뺏어온 반려였다. 만약 육체적으로 무슨 일을 당했더라면, 백호는 아마 제정신으로 남은 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새삼스레 연화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이토록 가녀리고 소중한 여인을 멍청이처럼 앉은 채 잃을 뻔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답해 주겠느냐.”
“예, 백호 님.”
“혹시 인간계에 나가 있으면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니지?”
걱정스러운 백호의 말투에 연화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험한 꼴을 많이 보았으나 그녀가 직접 그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그저 백호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서 고통스러웠을 뿐.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연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마른 얼굴은 전보다도 더 작아졌다. 가느다란 새처럼 애처로운 연화의 팔이 백호의 목덜미를 살그머니 끌어안았다. 전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에 백호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를 조심히 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한 난초의 향과 같은 연화의 체향이 신경을 가라앉혔다.
잠시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새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그러나 침묵은 무겁거나 어둡지 않고, 그저 편안하고 부드러울 뿐이었다.
“보고 싶었다.”
백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는 천천히 연화의 작은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으나 입밖에 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사람이 연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도요, 백호 님.”
연화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계까지 내려오시고, 저승까지…….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내가 왜 그것에 네게 감사 인사를 받겠느냐?”
연화의 말에 백호는 오히려 서운할 지경이었다.
“인사란 서로 먼 사이에 하는 것. 내가 살고자 너를 살린 것이니 그런 말은 말아라.”
“…….”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미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하기에는 새삼스러운 소리였으나 그동안 멍하게 앉아 그녀를 손에서 놓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 굳이 입 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살이 확연히 더 빠져 버린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와 허벅지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반려의 연약한 몸이 더욱 가늘어진 것을 보고 백호의 뱃속에는 안타까움과 애정이 한데 뭉쳐 갈 곳을 잃었다.
다시는 한시도 손에서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는 연화를 품에 안은 채 결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세상에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더 짙어진 욕심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남자가 연화를 끌어안았다.
“호접과 묘우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 감사 인사라면 그 둘에게 하렴. 나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한 멍청이였으니까.”
“모두 제 잘못이지요.”
“네가 안심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 내 잘못이지.”
뭔가 더 말하려는 연화의 입술에 백호는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이상 아무것도 더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약 하나라도 더 들었다간 저승까지 쫓아 내려가 만희의 영혼을 다 찢어발겨 소멸시켜 버릴 것 같았다.
“내가 네게 말한 적이 없었지.”
둘의 입술이 가까웠다. 숨결이 서로 섞이며 흘러든다. 연화는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그녀의 눈 바로 앞에 백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사방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동시에 가장 고귀한 자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저 연정에 가득 찬 남자의 눈동자일 뿐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이리 떨릴 줄은 몰랐다.”
그는 이마를 연화의 이마에 마주 대었다.
따뜻한 체온이 안심되었다. 물속에서 떠올라 돌아왔을 때 차가웠던 손을 잡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정말 돌아온 것인지 확신을 할 수 없어서.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백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의 기억 속에 후회라는 감정을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연모한다, 연화야.”
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호의 얼굴은 살짝 붉었지만 평온했다.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흔들림 없었지만 동시에 말은 진실했다.
“미리 말할 걸 그랬다고 많이 후회했다. 네가 단지 잠시간의 놀잇감이 아니라, 정말 내 영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은 여인이라고.”
“백호 님.”
연화의 동그란 눈은 깜박이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녀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조금씩 일부러 호흡을 해야 했다.
“내 마음을 모르고, 네가 원한다면 놓아주려고 했었다.”
백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일전의 일을 일컫는 말이다. 연화 역시 따라 일어났다. 그는 찻잔에 치자꽃차를 따라 여인에게 한 잔을 건네주고 자신 역시 한 모금을 머금었다. 날이 맑고 향이 풍성했으나 마음은 떨렸다.
“네가 마을에 마음을 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게 해주고 싶었다. 너는 제물이 아니고, 네 자유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이니 말이다.”
“백호 님.”
연화는 백호를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또한 나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구나.”
더는 놓아줄 수가 없다. 네가 원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