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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02화 (102/113)

102화

실제로 잡을 수가 없는데도 연화가 조심스럽게 사영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 막을 수는 없지만요.”

백호가 다가왔다. 그는 사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그대에게 빚을 갚겠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 잘못을 반성하는 것뿐.”

사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백호가 조심스럽게 연화의 혼령을 잡으려 했지만 하늘거리는 혼령은 잡히지 않았다. 애타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고 여래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계로 돌아가 잠시 기다려요. 내 연화를 육신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의 육신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현무와 염라대왕을 돌아보았다.

“폐 많았습니다.”

오만하면서 간결한 사과의 말에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다시 한번 붓을 던질까 고민하는 얼굴이었으나 이내 포기하고 열심히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을 가득 채운 저승사자와 혼령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빨리 꺼져라. 네놈 때문에 말썽이 생기고 일이 밀리고 난리도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백호는 피식 웃었다. 세상을 전부 뒤엎을 듯 기세를 올리던 것은 어디로 가고 마치 평소처럼 가볍게 웃는 얼굴에 현무가 약간 울컥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사랑에 빠진대도 너처럼 빠지면 안 되는 거다, 백호.”

“나 말인가, 현무?”

백호가 킬킬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래와 함께 사라지는 연화의 뒤를 좇고 있었다. 연화의 눈 역시 백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네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생긴다면 말이다.”

“헛소리.”

현무가 투덜거렸다. 이 고요하고 안정적인 저승을 한바탕 뒤집어 엎어놓고서 하는 소리 좀 보라지. 백호는 가벼운 웃음만을 남기고 훌쩍 인간계로 나가버렸다. 빨리 달려가서 연못 곁에 앉아 약사여래가 연화를 돌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뒤에 남은 것은 사영과 청수희뿐이었다. 샘물의 정령은 얄밉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잠시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너는 소문 내러 여기저기 다니는 거지?!”

염라대왕이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청수희가 배시시 웃었다.

“아이, 인생은 재미가 최고죠.”

“아, 시끄럽다. 빨리 사라져.”

골치가 아파서 소년이 투덜거렸다. 청수희는 얼른 사영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

“조심하고. 어차피 이제 기억을 잊게 되겠지만……. 뭐, 저승만큼 만인에게 공평한 곳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동안 정이 들어서 청수희는 어쩐지 아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영 역시 청수희의 손을 잡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잊게 되면 새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대하고 있어요.”

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 * *

한참을 어둠 속에 있었다. 눈이 유달리 뻑뻑했으나 뜨는 데 지장은 없었다. 느슨해진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몄다. 연화는 흐린 초점을 맞추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백호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고,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고 끝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돌아와, 빨리 돌아오거라.”

‘백호 님…….’

“너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단다, 내 영원한 짝으로……. 나의 부인으로.”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어째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얼굴만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녹고 애간장이 닳게 그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백호는 천천히 연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희고 창백한 뺨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커다란 손 안에 폭 감기는 작은 얼굴은 곱다.

만약 여래가 그녀를 돌려보내 주겠다 약속하지 않고 사라졌다면, 아마 지금쯤 백호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연화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혼잣말을 했다. 그는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연화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연화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남자는 조용히 혼자 끊임없이 말했다. 약사여래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돌아와 주렴, 연화야. 내 반려야.”

여인의 피부 위로 아주 약하게 노란 빛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따스함이 손 안으로 올라왔다. 아주 미세했으나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있는 촉각에는 거대한 변화였다.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하던 백호는 흠칫 놀라서 눈을 떴다. 그의 시선 아래, 눈을 뜬 연화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창백했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왔고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한 번도 죽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자가 맑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흑발이 온통 흩어져 백호의 장포 위로 흐트러졌다.

잠시 멈추었던 목을 억지로 움직여서 연화가 느릿하게 남자를 불렀다.

“백호 님.”

백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연화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를 안아서 품에 넣고 그녀의 머리와 목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아 움직이는 그녀의 몸에는 분명한 생명력이 돌아와 있었다. 여인의 흰 피부 위로 은은하게 노란색의 빛이 흘러 약사여래의 가피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연화의 손가락이 힘겹게 백호의 손가락 끝을 감았다. 아직 작고 힘없는 손짓이었으나 백호는 기쁨에 넘쳐흘렀다. 계속해서 거의 숨이 졸리다시피 했던 그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 듯한 느낌에 헐떡였다. 축축해진 백호의 눈가를 연화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울지 마세요.”

감정에 휩쓸리는 그가 안쓰럽고 동시에 자신의 가슴도 감당할 수 없을 듯 벅차서 연화가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가도 젖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백호의 큰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눈가를 닦아냈다.

짐승의 왕은 정신없이 반려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연화를 부수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 작은 머리통과 입술에 온통 입맞춤을 내렸다.

예전과 똑같이 작고 보드랍고 도톰한 입술이었다. 체온은 아직 미지근했으나 확실히 살아 움직이며 점막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직 창백하고 기력이 없는 연화도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 그의 애정에 화답했다. 애써 그의 어깨를 잡고 목덜미에 매달리는 무게가 기꺼웠다.

“……돌아왔구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그가 입술을 떼어내며 물었다. 죽어 있던 연화는 여래의 가피 아래 돌아왔다. 백호는 은은한 노란빛이 흘러내리는 연화의 피부를 쓸어내렸다.

저승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도 그는 여태까지 연화가 정말 돌아올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새삼 확인하는 듯 계속해서 그녀의 피부를 만지고 쓰다듬었다.

“약사여래의 도우심이 있었으니까요…….”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연화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또한 사영 아가씨 역시.”

절대 일평생 잊을 수 없을 도움이다. 창백하고 표정 없던 뱀의 아가씨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그들을 구해주었다. 조금 울컥해 눈물이 나서 그녀는 백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남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연화의 평소 성정이라면 결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백호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연인이 이승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견뎌야만 했다. 그러라고 사영이 자신을 바쳐 다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빚을 과연 갚을 수 있는 걸까, 연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을 다시 찾아가라고 모두가 우릴 도와줬어요.”

남자는 말없이 여인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한 몸짓이었다.

“그리웠습니다, 백호 님.”

연화가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백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다시 짧게 입을 맞추고, 연화는 전에 없던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백호 님, 제가 그리워했답니다. 백호 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그녀는 작게 사랑을 속삭였다. 실로, 그들의 관계에 최초로 흘러나온 고백이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면 되돌릴 수 없다. 그녀는 둑이 터진 듯 감정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랑합니다, 백호 님.”

그녀를 끌어안고 백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연화의 정수리에 뺨을 대고 있다가 깊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만족감과 그리움의 한숨이었다.

연화는 답 없는 백호를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수없이 생각했던 바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백호는 고개를 숙여 깊숙이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 연화야.”

연화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백호의 푸른 눈 역시 습기를 머금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술을 내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연화는 백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단지 그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진심은 넘치게 느껴졌다. 전신이 저릴 만큼 백호의 감정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가를 적셨다.

백호는 여인의 머리에 이마를 댔다. 아직 창백했지만 온기는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감사함에 남자의 전신이 떨렸다.

만약 연화가 정말 저승으로 넘어가 버렸다면, 백호는 모든 법칙을 깨부수고 저승과 세상을 전부 뒤집어엎었을 것이다. 세상은 뒤집히고 천지가 개벽했을 테다. 결국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났을 결과가 눈에 선했다.

하지만 백호의 마음속에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진 채였다. 오로지 그의 세계에 다시 연화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남자는 여인의 작은 얼굴을 두 손 안에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달빛 아래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보드라운 두 뺨이 빛났다. 맑고 검은 두 눈은 온순하게 백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제야 마주한 얼굴. 숨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백호 님.”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백호의 큰 손 안에 뺨을 비볐다. 거칠면서도 다정한 손. 그 무엇보다 그리웠던 손.

“되었다. 돌아왔으니까.”

더 이상 묻지 않고 백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커다란 품 속으로 연화는 얼굴을 묻었다. 따스하고 묵직한 남자의 체향에 파묻혀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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