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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98화 (98/113)

98화

“정말…… 해악만이 남은 것이 인간이로다.”

진공 상태에서 숨을 쉬지 못한 만희가 눈을 까뒤집었다. 숨을 쉬려고, 공기를 받으려고 본능적으로 인간은 앞으로 기어갔다. 두 다리와 한 팔이 곤죽이 되어 뭉개진 상태에서도 살려고 앞으로 기는 것을 백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 덧씌워졌던 원혼이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백호는 다시 사내와 함께 묶어버렸다. 신이 만들어 낸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은 원혼마저 소멸시키고 있었다. 원한에 찬 여인의 혼령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냈다.

【내게 죄를 묻기 전에, 그자들의 죄를 물어라! 신이여, 그자들의 죄를!】

만희의 몸에서 고개를 든 여인은 무저갱 같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마구 긁어대었다.

【내 삶을 구렁텅이로 몬 그자들을!】

백호는 물끄러미 원혼을 내려다보았다. 억울한 자가 하나둘일까. 그러나 그들이 한을 해소하지 못해 이승에 머물면 더 많은 피해자를, 나아가서는 또 다른 원혼을 만들어낸다.

연화도 그래서 죽었다.

“그것은 저승의 판관에게 물어라.”

백호가 느릿하게 말하며 눈썹을 올렸다.

오래지 않아 사내의 거대한 육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고개가 푹 떨궈지며 흙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만희의 육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꿈틀거리던 원혼도 단말마를 내뱉었다.

허공중에 검은 틈이 벌어지고 창백한 손이 나왔다. 죽은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쥐자 만희의 영혼이 그 손에 잡혀 육신에서 끌려나왔다. 육체의 고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내의 혼은 귀가 찢어져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갈퀴 같은 흰 손은 그 혼을 그대로 빛 한 점 없는 검은 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인의 원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손 하나가 나와 그녀의 목을 잡아 채 끌고 갔다.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영혼은 생전의 힘 따위는 전혀 쓰지 못했다. 마른 들풀 같았다.

소리도 없이 검은 틈이 사라졌다. 백호는 걸음을 돌려 연못으로 다가갔다.

아주 검고 깊은 연못이다. 연꽃이 피어나면 왕조가 뒤바뀐다는 전설을 지닌 희례연.

저 멀리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함께 흘러들어 왔지만 백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연화야…….”

연못 위로 여자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주위로 옅은 분홍색의 치맛자락이 떠올라 그녀는 마치 연못에 핀 꽃처럼 보였다. 얼굴 주위로 연못의 맑은 물이 고요히 떠돌았다. 화사하고 평온한, 하지만 죽어버린 꽃.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것일까, 어떤 영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백호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목숨이 끊어진 신체는 그저 시신일 뿐. 법칙을 가르는 자인 백호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결도 없는 연못의 수면 위에서 연화의 몸이 저절로 백호에게로 흘러왔다.

“나는 법칙을 지키는 자…….”

사내는 연못가에 무릎을 꿇었다. 사방신으로 태어난 그는 본능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알았고 법칙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백호는 차가운 연화의 손을 잡았다. 물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그 손을 잡고, 남자는 여인의 피부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백호의 안에서 천천히 법칙들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약사여래를 불렀다.

“당신의 가피를 받은 자가 죽었어. 그녀를 내게 돌려주시오…….”

백호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백호의 긴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키워 올렸다. 옥황상제 휘하의 모든 세계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연화가 저승으로 간다면 내가 함께 갈 것입니다.”

이번에는 상제에게 속삭이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듣고 있으리라. 세상 구석구석,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전능한 신이었으니 말이다.

“사방신으로서 저승에 입성하는 첫 번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함께할 수 있다면.”

두 번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백호는 부드럽게 연화의 차가운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여전히 희고 부드러운 뺨이다. 손은 가늘고 고왔다. 그 손을 입술에 대고 백호가 중얼거렸다.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소. 연화를 돌려주시오.”

만약 이대로 연화가 떠난다면 백호는 저승으로 직접 뛰어들어 갈 생각이었다. 염라대왕의 멱살을 잡아 저승의 명부를 불태워서라도 그녀를 이승으로 돌릴 것이다. 불가능하다면 저승 끝까지,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 갈 생각이었다.

“현무, 답해라!”

백호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동료 사방신을 불러내 담판을 지어야 했다.

뺨에 바람이 스쳤다. 피비린내 나는 아침 바람이었다.

* * *

사영이 빠르게 중간지대로 갈 수 있었던 건 청수희 덕분이었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지금 당장 자신을 중간지대로, 가능하면 저승까지 데려다줄 것을 요청했다. 샘물의 정령은 물끄러미 사영을 바라보았다. 진의를 알고자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왜 그러려고 해?”

“…….”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기 전에는 움직이기 곤란해.”

청수희는 단호하게 말했고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라. 청수희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지만 저승으로 내려가면 이 세상에 다시 올라올 수 없어.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의 상징물을 가지고 넘어간다면 아예 죽은 목숨으로 분류가 될 거야. 사실 드물게 있던 일이라 과연 사영 아가씨의 영혼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그조차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알고 있어요.”

“백호 님을 정말 사랑했어? 아니잖아. 연화 님과 그렇게나 친해졌어? 그것도 아니고.”

알 수 없다는 듯한 청수희의 말에 사영은 침묵했다. 청수희의 말이 맞다. 목숨을 내놓는 행위를 하면서 그 이유를 모르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아래로 뜨고 깜박였다. 글쎄, 내가 왜 둘의 목숨을 대신하여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것일까.

“모르…… 모르겠어요.”

“뭐? 저기, 사영 아가씨.”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영은 품 안의 노리개와 수틀을 한 번 더 꽉 틀어쥐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일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 한 가지만 확실했다.

“난 여태까지 내 손으로 이뤄본 게 없어요.”

“…….”

“아마 이번에 성공하면 내가 사방신과 그의 반려를 구한 최초의 신령이 되겠죠.”

사영이 긴장된 얼굴로 웃었다.

“뱀 일족의 열일곱째 딸이, 평생 제대로 뭘 해본 적도 없던 뱀이…….”

평생 전각 한 구석에서 숨만 쉬며 살던 자가 사방신과 그의 반려를 구해낸다. 어린애 같은 영웅담에 취한, 한순간의 감상이라고 폄하될 수도 있었다. 청수희가 그렇게 말할까 봐 사영은 잠깐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애써 짜낸 용기가 사그라들 것 같았다.

하지만 청수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영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사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사영은 조금 두려운 눈으로 청수희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에 다음으로 어린 표정은 동정이나 한심함이 아니었다. 작은 미소를 떠올리고 청수희는 사영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맞닿은 피부가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웠다. 청수희가 손가락으로 톡톡 사영의 뺨을 두드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용기 있는 아가씨야.”

“…….”

“과연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청수희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고맙다는 말을 사영은 꿀꺽 삼켰다. 어쩐지 울음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눈가를 붉히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얼굴을 굳힌 그녀는 수틀과 노리개를 품에 넣은 채 청수희를 재촉했다.

“빨리 가요, 빨리.”

“알겠어.”

자, 그렇다면 여기서 저승까지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이왕 정했다면 가능한 지름길로 가야 한다. 몸 자체를 옮기기에 방에는 지나치게 물이 부족했다. 청수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리하더니 사영을 전각의 공동욕실로 끌고 갔다.

복도를 꺾어 한참을 달려 간신히 욕실 앞에 갔을 때 전각 바깥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예민한 뱀의 혀끝에 피비린내가 와 닿아 사영이 흠칫했다. 불온한 공기였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죠, 이거?”

“인간들의 반란군인가.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긴 했지만 꽤 빨라.”

청수희는 흘긋 창밖을 바라보았다. 완전 무장한 군사들이 바깥에서 달아나는 시종과 내관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계에 대해 알 만큼 알았고, 돌아가는 상황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수국과 그곳을 전복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정도는.

곧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무 전각을 태우는 터라 연기가 검고 짙었다.

“불을 질렀어.”

“빨리 가야겠어요!”

사영이 급히 공동욕실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욕탕에 물이 절반가량 차 있었다. 바깥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시녀와 내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량 살육이다. 신령계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사영은 겁에 질렸다. 신령계는 적자생존의 세계였으나 동시에 이런 식의 대규모 공격과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 세계이기도 했다.

욕실 앞까지 달려온 발소리가 멈추고 문이 벌컥 열렸다. 반란군 서너 명이 욕실로 우르르 들어섰다.

“계집들, 여기도 있었구나!”

곧 번져 올 불이 무섭지도 않은가 방화까지 해놓고 전각으로 뛰어들어 오다니, 어지간히 전공에 눈이 먼 자들이다. 어차피 갈 것이니 시간 낭비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청수희는 생긋 웃고 욕탕으로 사영을 끌어안고 발을 들여놓았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완전히 막힌 공간 안에 있는 여인 둘을 보고 군사 서너 명이 검을 번뜩이며 웃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끈적했다. 한 중년 군사가 동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둘 다 제법 예쁘장한데 재미 좀 보고 없앨까?”

“미쳤어? 빨리 가서 왕의 목을 따야지. 다른 놈들보다 먼저!”

“아, 하긴 그렇군. 걸린 게 많으니까 말이야.”

“난 왕의 목까지는 관심 없어. 여기서 저 계집들이나 좀 즐겨야겠다.”

“그래, 어차피 내가 자르지도 못할 텐데 뭘.”

사람을 앞에 두고 마치 물건처럼 취급한다. 더러운 말로 낄낄거리는 소리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대로 사라질까, 하다가 청수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 인간계에 함부로 끼어들어 힘을 쓰면 안 되지만.’

다른 세계의 힘으로 인간의 명운이 달라지면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반란군들이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한 전각 내부에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다.

‘서넛 정도의 목숨이야 속여 넘기기 쉽겠지.’

청수희는 결정하고 생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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