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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97화 (97/113)

97화

만희의 뇌 속이 순식간에 탈색되듯 깨끗하게 비워졌다. 뱃속을 자글자글 끓게 하던 피에 대한 욕구가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는 머릿속을 습격하는 갑작스러운 공허에 얼이 빠져 눈을 껌벅였다.

귓속을 가득 채우던 여인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녀는 마치 바람이 빠진 것처럼 희미하게 속삭였다.

【신. 사방신. 어째서?】

하늘로 솟은 백발은 악귀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신성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빛났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그의 주변만 검은 어둠처럼 보였다.

주변이 고요했다. 병사들도 시녀들도 모두 도망갔는지 인적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만희는 침을 삼켰다.

그는 전장에서 십수 년을 직접 몸으로 구른 전사이기도 했다. 눈앞의 존재가 지극히 위험한 상대라는 것이 전신의 피부가 아프도록 느껴졌다. 초점이 돌아온 수국의 왕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쪼그라들었다.

순간 혼령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없이 원혼들과 씨름하며 그들의 목소리와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보통의 원혼들과 달랐다. 애초에 같은 수준의 존재라고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자였다. 다시 한번, 귓가의 여인이 속삭였다.

【신.】

만희가 흠칫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이 없었다. 수국을 가호한다는 청룡의 존재도 우습게 알았다.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벌받지 않는 이 세상에 신의 존재라니 우습기 짝이 없다.

내심 비웃으며 평생을 살았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릎이 녹아나는 것 같았다. 저 남자는 분명히 신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네놈이.”

백호에게서 발산되는 살기에 정원의 풀들이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새파란 눈동자 안을 검은 동공이 부풀어서 꽉 채우고 있었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백발은 허공으로 치솟은 채, 백호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인간 주제에…….”

백호의 머릿속은 분노로 꽉 차서 터질 지경이었다.

저자가 연화를 끌고 갔던 인간 사내다. 그녀의 정인이 아니면서, 그런 척 굴면서 연화의 치유능력만을 이용했던 사내. 그 무엇보다 연화를 백호 자신의 손에서 빼내 가 숨이 닳도록 그립게 만들었으며…….

“감히 손을 대었느냐, 사방신의 반려에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대로 모든 힘을 발산해 이 땅을 태워버리고 싶은 분노를,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사방신으로서의 본능이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의 자제력은 그대로 무너질 둑과 같았다.

사방신의 반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만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공포와 위압감에 압도되어 그는 난생 처음 입 안이 바짝 말라붙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기능을 멈춘 듯한 머릿속으로 아주 느리게,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짓이 흘러들었다.

내관들을 겁박했다. 무엇 때문에 검까지 들고 설치며 그들을 위협했지? 기억이 흐릿했다. 만희는 덜덜 떨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하려 했더라. 오래 일한 염 내관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누군가를 쫓아오면서, 반드시 저승에 누군가를 데려가야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이승에 미련 없이 저승으로 떠나기를 바랐어.】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꼭 같이 있고 싶은 그 계집. 저승까지도 함께 가고자 했던 계집…….】

그 속삭임과 함께, 그 자신이 방금 전 행했던 짓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믿을 수가 없어서 만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연화를 죽이려 검을 들고 그녀를 쫓아왔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그녀는 이 깊은 희례연에 빠져 버려 떠오르지 않았다. 익사였다.

“그, 그럴…… 그럴 리가.”

자신의 행동이 마치 다른 이의 행동처럼 눈앞에 보여서 왕은 아래턱을 떨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원혼들에게 져서 연화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 그녀를 알 수 없는 곳에 가두라 명했던 것이지만 설마 진짜로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작게 경련이 일어나는 손을 누르면서 연못을 돌아보았다. 검고 깊은 수면 위로는 방울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습구나.”

분노한 신은 느릿하게 걸어서 만희의 앞에 섰다. 왕은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하고서도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깡 하면서 백호의 피부에도 닿지 못한 왕의 보검이 유리조각처럼 깨져 달아났다.

가까이에 선 백호의 눈빛은 시퍼런 색으로 빛났다.

“넌, 넌 대체 뭐야!”

손잡이만 남은 검자루를 휘두르면서 만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로 점점 더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폭군이었다 하나, 신의 존재는 일개 인간이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백호는 분노만이 타오르는 눈으로 만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뼈 속이 푸른 불꽃으로 자글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했다.

신으로서의 감각이 이미 저 연못에 살아 있는 인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가 땅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그랬다. 인간의 생명력은 저 깊은 연못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뜻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연화는 이미 죽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백호가 탄식했다. 그의 눈 주위가 뜨끈하고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풀뿐 아니라 그가 딛고 선 땅마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방신의 극한에 달한 분노와 슬픔에 반응해 자연이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다. 초목과 땅의 소리 없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

거의 곤죽이 된 듯한 머리로 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지나친 두려움으로 뇌가 마비된 것 같았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넓은 어깨를 웅크리고 백호의 발치에 엎드렸다. 마치 용서를 바라는 것 같은 모양새로 만희는 부들부들 떨었다. 식은땀이 몸 전체를 적셨다. 저 깊은 본능이 지금 앞에 있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가 죽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피부를 아플 정도로 찌르는 살기와 다르게 백호의 말은 단정하고 낮았다.

그는 앞에 엎드린 남자를 굽어보았다. 평소라면 한낱 미물이라 여겨 제대로 보지도 않았을 자다. 그는 사내의 몸에 겹쳐져 있는 여인의 원혼 역시 알아보았다. 지독한 원한이 켜켜이 쌓여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영혼.

“네놈이 손을 댄 그 여인이 내 반려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느냐.”

백호가 낮게 말했다.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는 연못 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말에 만희가 고개를 들었다. 용서를 구할 것인가, 했지만 왕의 눈은 오히려 분노와 경쟁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 그…… 그 여인은, 내가, 내가 사랑하던.”

“…….”

“내 계집, 이다. 내…….”

과연, 사랑 앞에는 용감해지는 것이 인간인가. 용기를 넘어선 만용에 백호는 감탄했다. 본디 인간은 사방신 앞에서 목소리조차 내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수국의 왕은 바닥을 긁었다. 거친 땅바닥을 박박 긁어대며 그의 손끝이 피범벅이 되고 있었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상처 부위를 문대면서 만희가 헐떡였다.

“내 것이니, 저승으로……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갈 것이다…….”

백호의 위압감에 짓눌려 바닥에 머리가 처박히면서도 만희가 이를 갈며 문장을 맺었다. 눈의 핏줄이 터져 그의 적안은 완전히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흙바닥에 흐트러졌다.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간다라.”

백호가 중얼거렸다. 기실 그것이 만희의 진심이었다. 애써 이성을 찾아 연화에 대한 욕심을 줄이려 하였으나, 여인의 원혼은 저 밑바닥에 깔린 그의 진짜 욕망을 찾아내 드러냈다.

사랑하게 되어버린 여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죽음까지 함께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욕망.

신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이해 반 혐오 반으로 바라보았다. 이전이라면 그저 불가해의 영역이었을 것이나 연화가 그의 손을 떠난 뒤 절반은 이해하게 되었다.

백호는 그런 자신에게 약간의 욕지기를 느꼈다. 소중히 해 감싸주어도 모자랄 여인을, 놓아주지 못해 바닥까지 함께 끌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써 감상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그는 정반대로, 연화가 저승으로 떠났다면 함께 그녀의 뒤를 따라 떠날 것이라고.

“그리하여 치유능력을 아낌없이 써준 연화를, 네놈이 직접 죽인 것이구나.”

백호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승까지 함께 끌고 갈 사랑이라, 비록 절반쯤 이해는 하였으나 그것을 과연 순수히 바라볼 수 있는가.

“원혼이 덧씌워진 인간은 그 욕망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낸다 하였다. 그것이 네 속마음이었구나.”

백호의 말에도 만희는 눈을 번들거리며 물러서지 않았다. 입 안에서 이빨이 부러져 피가 터져 입가로 흘러내렸다. 반항적인 눈의 인간을 내려다보며 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금수보다도 못한 것이 인간이니.”

더 이상 용서의 여지는 없었다. 비록 분노로 이성이 가리워졌으나 사방신이 된 도리로 그는 최소한의 자비심을 끌어올리려 노력했고, 실패했다.

백호는 말없이 엎드린 만희의 손 위에 발을 올렸다.

“네 죄는.”

“크악!”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고통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백호의 걸음은 평온하게 한 발을 가볍게 올려놓은 것 같았지만 태산 같은 무게였다.

신은 만희의 오른발 위로 다시 발을 옮겨 밟았다. 산산조각 나는 발의 뼈에 만희는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몸을 피할 수 없었다. 백호의 기세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엔 발목과 종아리를 차례로 밟았다.

“첫째로 그 여인을 속여 끌고 온 죄요.”

죽지도 못한 채로 만희는 바닥을 기었다. 백호는 잠자코 벌레처럼 기어가는 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를 밟았다. 우드득 하며 뼈가 마치 묵처럼 뭉개졌다. 처참한 비명이 텅 빈 정원을 울렸다.

“두 번째로 연화의 치유력만을 취하고 속인 것이 또한 죄요.”

신은 탄식하면서 만희의 손목과 팔뚝을 자근자근 밟았다. 인간 남자의 강인한 뼈는 백호의 발 아래서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세 번째는 신의 반려를 죽인 것이 죄라.”

고통에 눈이 뒤집혀 비명을 지르는 만희의 꼴을 내려다보다가, 백호는 문득 이 시간 낭비를 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만희의 주위에서 공기를 제거했다. 죽을 때까지 시끄럽게 내는 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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