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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96화 (96/113)

96화

만희의 발걸음이 후원에 멈춰 섰다. 도무지 저 차가운 땅 밑의 감옥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의 여인이 속삭였다.

【그 여자를 끌고 나오라고 해. 나는 저곳에 들어가지 않아.】

만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지하감옥으로 들어가 곧 여인을 끌고 나왔다.

연화는 신음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침이 밝아오는 듯 아직 어둠이 남은 하늘이었다. 며칠째 지하감옥에만 갇혀 있었던 그녀는 거의 축 늘어진 옷감처럼 사지에 힘이 빠져 병사들에게 들려 나왔다. 병사들이 그녀를 끌어다 만희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오랜만이구나, 연화야.”

만희가 웃었다.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이 여인의 이름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더럽고 슬프고 힘든 모습이었으니 연화는 여전히 가느다란 새처럼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연화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잘 지냈느냐? 나도 네가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만희의 몸에 거의 겹쳐져 있는 혼령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단숨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바로 감옥에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 여인의 혼령이었다. 눈이 검게 뚫려 있던, 소름 끼치게 차가웠던 여인. 그녀가 만희의 신체에 깃든 채로 무저갱과 같은 입을 벌려 웃었다.

“보고 싶었다.”

만희가 연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눌렀다. 달콤하다기에는 어딘가 오싹한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떨면서 그의 입맞춤을 견디고 있다가 놓여나는 즉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두려움이 심장을 조여 오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군.”

“…….”

차마 보고 싶었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연화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만희는 분명 그녀가 알던 그자가 아니었다. 원혼, 저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싹한 원혼이었다. 그 한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저승에조차 발걸음하기 힘든. 그래서 제물을 데리고 함께 끌고 가려 드는 원혼.

“전하, 제발…… 제발 전하.”

“그래, 말을 해보거라.”

만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듯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답했다. 저것은 아마도 그의 진심이리라. 연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녀를 해할 것이다.

“저는……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 눈을 뜨셔야 합니다.”

연화는 용기를 내서 속삭였다.

지금 만희의 눈은 완전히 가리워져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 자신의 행동이 아니다. 원혼의 한과 뒤섞인 잔인함 때문에 만희는 분명히 후일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눈을 뜨라니, 난 뜨고 있다.”

“마음의 눈 말입니다, 전하. 제발. 저를 보셔요. 전하.”

연화는 필사적으로 말하면서 손 안에 노란 기운을 띄웠다. 대담하게 왕의 손을 잡고 그녀는 기운을 불어넣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잠시라도 원혼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화의 손 안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원혼의 그림자가 잠시 흐릿해졌다. 한순간에 연화의 몸이 축 늘어질 정도로 거대한 생기가 빠져나갔다.

순간 만희의 눈이 조금 또렷해졌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는 연화를 내려다보면서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기억이 전부 섞여서 흐렸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날 듯 하면서 나지 않았다. 만희는 큰 손으로 지쳐서 초췌한 연화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화야?”

“……전, 하…….”

그녀가 만희의 손등을 잡아 왔다. 연화는 숨을 헐떡였다. 지나치게 많은 기운을 한 번에 뺏겨버렸다.

“정신 차리세요, 전하. 기억해 보세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만희가 눈을 깜박였다. 아주 천천히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연화에게 무엇을 할 작정이었는지.

“대체 이게…….”

창백해진 왕의 얼굴을 보며 연화가 그의 바짓자락에 매달렸다. 그녀는 애타게 애원했다.

“잠시나마 원혼이 물러난 상태입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무엇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냐. 내가…….”

순간 만희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일어서서 덜덜 떨며 물러나는 그녀를 막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왕이 이상해진 것을 모두 확실히 느꼈다. 눈 먼 칼에 누가 먼저 맞아 죽을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왕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그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만희는 연화를 노려보았다.

“함께 가자꾸나.”

이빨이 드러나는 웃음과 함께 만희는 검을 빼 휘둘렀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아 여전히 염 내관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피가 묻어 있는 그 검을 보면서 연화의 눈이 커졌다.

“이제 도망갈 수 없어. 같이 가야지.”

그의 말투는 마치 달래는 것 같았다. 원혼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연화는 떨면서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왕은 천천히 다가와 검날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천천히 그었다. 날카롭게 갈린 검날에 얄팍한 치맛자락의 천이 갈라졌다. 그 밑의 연화의 허벅지 피부에서도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신음성을 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만희의 얼굴은, 마치 단 한 번이라도 자극하면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은 폭발 직전의 모습 같았다.

“전, 전하…….”

무릎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연화는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의 검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대로 자신을 조각 내어버릴 살의가 피부가 아프도록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이리 와라, 같이 가자. 저승으로 갈 시간이다.”

킬킬대는 남자가 잠깐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안 돼, 라고 그가 신음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화는 사슴처럼 궁 바깥쪽을 향해 뛰어나갔다.

“잠, 잠깐!”

워낙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왕 옆을 지키던 병사들이 빠져나가는 연화를 잡지 못했다.

왕은 그 뒤를 쫓아 나오며 병사 한 명을 찔러 죽였다. 벌벌 떨던 다른 한 명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며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 달아났다.

만희의 눈은 이미 악귀와 같이 무분별한 살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눈앞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도망가는 병사를 쫓아가 그의 모자를 잡고 경동맥에 칼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젊은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원 저 멀리로 달아나는 여자의 발소리가 들려 그는 맹수처럼 그 소리를 쫓아 뛰었다.

연화는 이를 악물고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더 백호를 보고 싶었다. 이제 와서 무슨 염치없는 생각인가 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차가운 감옥 안에 갇혀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백호에 대한 생각 하나뿐이었다. 갇힌 내내 그녀는 벽을 보면서 그를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던 신과의 만남. 그가 보여주었던 따스한 애정.

‘한 번만 더 뵐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개죽음당하고 다시 한번 백호를 보지 못한 채 스러질 수는 없었다.

오로지 그 의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망가야 했다.

“어디, 도망가 봐라. 계집년. 내가 잡아줄 테니까!”

만희는 미친 자처럼 웃었다.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연화를 보면서 갈데없는 분노가 그녀를 향했다. 그는 악귀 같은 몰골로 그녀를 쫓아갔다.

연화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달렸다. 마치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슴처럼 그녀는 뛰었다. 호접이 오기 전에, 백호에게 사죄의 말을 하기 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여자는 후원의 뒤를 돌아, 왕의 전각의 정원으로 달려들어 갔다. 길도 모르고 마구 달린 끝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하늘 밑으로 연화가 달려갔다. 신발이 벗겨져 달아나고 맨발인 채였다. 돌길을 발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뒤에서 들리는 만희의 목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정원 저 멀리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까지 깨달을 여유는 없었다. 만희 역시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살려, 살려주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기원의 말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고꾸라질 위기를 몇 번이나 벗어나면서 정원 끝으로 달음질쳐 도망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왕은 갑자기 미친 것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를 죽일 때처럼 확실한 목적이 있는 칼질도 아니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생명을 다 죽여야 하는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방을 뛰쳐나온 연화를 잡으려던 경비병 둘도 왕의 칼을 받고 죽었다. 시녀와 내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병사들은 갑자기 미쳐 날뛰는 왕을 보며 차마 어쩌지 못하고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왕은 연화를 쫓아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달려 나와 도망쳤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고, 아침 하늘 아래 왕궁의 정원에는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와 같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숨이 턱 끄트머리에 달려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겪었던 공포. 백호로부터 도망치던 그 첫 순간. 거대한 호랑이가 자신을 물어갈 거라고, 공포와 죄의식에 질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달리던 그 순간. 자신을 잡아 짓누르던, 저 달을 뒤로 한 채 세상 하나밖에 없을 듯 하얗게 빛나던 남자.

가장 위급한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결국 그밖에 없었다.

‘백호 님.’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래도 슬펐다. 백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다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

허둥거리며 달리던 그녀는 아래를 보지 못했다. 정원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생각났고, 발밑이 물컹 했다. 숨이 턱에 달한 연화는 밑을 보지 못했고 헛디딘 발끝에 몸이 기울었다.

현기증인가, 기우뚱 하는 하늘에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대로 한 걸음이라도 더 달려보려고 덧없이 연화의 가느다란 발목이 허공을 찼다. 희례연, 꽃이 피면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바뀐다는 옛 이야기가 있던 연못.

텀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방울이 온통 하늘로 튀어 올랐다. 연화는 몸을 온통 감싸는 싸늘한 물의 감촉을 느꼈다. 인간 여인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수면 위로 흐릿하게 사내의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습니다…….’

왕의 검에 베여 험한 꼴로 죽고 싶지 않소. 연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희가 제정신이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결코 연화를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지독한 한을 지닌 원혼에게 붙들린 것뿐. 지금 만희는 그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연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원을 들은 것처럼, 여인의 몸은 한도 끝도 없이 깊고 깊은 연못의 수면 아래로 꺼져 들어갔다. 마치 쇳덩이라도 매놓은 것처럼 그렇게 무겁게.

“계집!”

연못가에 선 만희는 으르렁대면서 검으로 물 안을 마구 쑤셨다. 이미 깊이 빠져 사라져 버린 연화의 몸이 칼끝에 걸릴 리는 없었다. 그의 검에서 묻어나온 핏물이 맑은 연못 안으로 퍼져나갔다.

어차피 이 연못에 빠져서 살아나온 자는 없었다. 지독히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물이었다. 절대 꽃 하나 필 수 없는 검은 연못이다. 그래서 그런 옛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내 칼로 죽였어야 했는데.”

만희는 숨을 씩씩대었다. 왜 갑자기 연화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칼에 원하는 피를 묻히지 못했다는 불만족감만이 남아 그의 복부를 팽만하게 만들었다.

다른 누구라도 더 죽여야겠어. 저승에 누구라도 더 끌고 가야겠어. 왜 이렇게 분노가 차오르는지 알지도 못한 채 왕은 육두문자를 지껄이며 눈에 핏발이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다 도망가 버려 인간이 남지 않은 왕궁의 뜰 앞에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전부 솟아올라 밤하늘 아래 넘실거렸다. 눈동자에 동공만이 까맣고 새파래 마치 귀신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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