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백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군. 내 이목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의 환상 결계라.”
【실제 있는 땅굴을 끌어다 보여준 것이니 그럴 만하지.】
공기가 흔들리며 결계가 빠르게 무너져갔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망가뜨릴 수 없는 청룡의 결계가, 약점을 건드려 치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주작이 한 바퀴를 돌았다.
【이로써 청룡 놈의 결계를 내가 또 한 번 무너뜨렸군. 약점을 알기 쉬웠어, 이번에는.】
주작은 청룡과 더불어 결계를 잘 쌓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고 둘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의 기류가 흐르고는 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붉은 새의 가슴털이 동그랗게 솟아 나왔다.
【자, 가라, 백호. 너무 늦기 전에.】
“그래,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다.”
백호는 사라지는 땅굴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 아래로 아주 미세한 먼지가 풀썩 일었다. 사방신은 어떤 흔적도 없이 산과 물을 건널 수 있지만 금수의 왕인 그가 육신과 육화된 사물을 일부러 피할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라도 백호는 자신의 육신의 존재감을 극한으로 과시하는 신이었다.
눈을 깜박 하자 파랗던 눈동자가 거의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파란빛이 되었다. 원래도 고양이과 맹수의 눈을 하고 있던 백호의 눈은 동공이 가늘어져 완벽한 호랑이의 눈으로 변했다.
점차 빨라지는 발걸음에 따라 자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굵은 모래를 밟으면서 백호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 * *
“사영 아가씨.”
“……청수희 님?”
사영이 난데없는 부름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물이 없었다. 청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올 만한 매개체가 단 하나도 없는 공간에서, 샘물의 정령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어, 어디인 거죠?”
“여기, 화병.”
꽃이 꽂힌 도자기 안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영은 도자기 쪽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청수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좀 일이 있어서 본신도 인간계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야. 다만 먼저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서.”
“예, 뭔데요?”
“지난번 내가 줬던 노리개, 가지고 있지?”
“물론이에요.”
백호의 반려에게 대대로 물려졌던 노리개다. 소중한 물건이니 언제나 품에 넣고 다녔다.
사실 자신이 원했던 반려의 자리에 대한 미련처럼 느껴져서 불편하기도 해 때가 되면 청수희에게 돌려주거나 아니면 연화에게 직접 주려고 했다. 그녀는 품에 손을 넣어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일이 좀 복잡해. 지금…….”
청수희는 한숨을 쉬고 현재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줄여 전해주었다. 사영은 놀라서 손을 떨었다. 백호와 연화가 함께 저승의 명부에 올라 있다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천지가 한 번쯤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그냥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방신 중 한 명이 사망하여 저승으로 떠난다는 건 한 세계를 책임지는 자가 완전히 자리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령계 하나뿐이 아니다. 각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져 어떤 식으로 망가질지 모르니 분명 상제가 개입하여 그 균형을 다시 잡아놓을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잔혹한 수단이 동원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옥황상제는 자비로운 동시에 가장 잔인한 신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저승의 명부를 속여야 해. 일단 그 노리개가 있다면 연화 님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는 있을 것이고……. 하나를 더 찾아내서 백호 님을 대신해야 하는데.”
골치가 아프다. 청수희의 시름이 깊었다.
“묘우 님이 그런 물건을 찾아본다고 했는데 쉽지는 않을 거야. 백호 님은 물욕이 그리 없으신 데다 과시도 안 하는 분이고.”
“어떤 물건이 필요한 건가요?”
“백호 님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만큼 영기(靈氣)가 쌓인 것. 누가 보아도 백호 님을 닮아 세계의 규칙을 속일 수 있는 것. 쉽지 않은 조건이지.”
사영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그녀는 치마 속에 숨겨 가지고 나왔던 수틀을 생각했다. 연화가 공들여 수놓으며 계속해서 어루만졌던 동그란 수틀. 첫눈에 보아도 짙은 영기가 느껴졌던, 흰 호랑이의 그림이 수놓인.
“아무튼 그 노리개 꼭 잘 간수하고 있어. 내가 가볼 테니까.”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저승으로 가야 하겠지. 그것도 사실 문제야, 일단 저승으로 가서 강을 건넌다는 건 실질적으로 목숨 하나가 필요한 일이니까…….”
“…….”
“곤란하지. 뭐, 아무튼 방법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사영 아가씨. 곧 도착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 후 청수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기운도 사라져 완전히 방 안에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영이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쩐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왕이 연화를 갑작스럽게 가두고, 은연을 끌고 가고…….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 사실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전각 안에 있는 자들도 모두 은연처럼 끌려가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지금 만희는 광증이 이전보다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사영 자신 역시 둔갑하여 힘이 약해진 만큼 인간들과 똑같이 수모를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노리개와 수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사영은 직감적으로 이 수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느꼈다. 거의 틀림없이, 백호를 대신할 수 있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수틀을 쓰다듬었다.
빼어난 솜씨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자수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했다. 연화는 언제나 그 수틀을 끌어안고 앉아 한 땀씩 바느질을 하며 그리운 얼굴을 했다. 그녀의 마음이 온전히 모이고 결합하여 이 안에 담긴 것이다.
눈앞에 온화하고 부드럽던 연화의 모습이 스쳤다. 괜히 그녀를 미워하여 큰일을 당하게 하려던 과거 자신의 모습 역시.
“미안합니다, 연화 님.”
사영은 마음속이 혼란해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와 백호가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손 안의 물건들로 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쓸모없이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충분히 쓸모없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시점일 것이다.
사영은 그렇게 믿었다.
“저승…… 저승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
사영 역시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알았다. 인간계와 신령계 사이의 중간지대를 지나 좀 더 깊이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끝없이 나아가다보면 저승과 맞닿은 경계를 지날 수 있다.
그곳까지 가며 혼령들에게 위험한 상황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저승까지 가지도 못하고 스러진다면 그건 개죽음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노리개와 수틀을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겼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쓸모없는 인생을 기다려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세상에 태어난 쓸모를 하고 죽을 것인가. 저승으로 간다는 사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사영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곧 물건 두 개를 손 안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왕 결심한 이상 더 시간을 끌 일은 아니었다.
그 때 방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으로 긴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들어섰다.
“빨리 오셨군요, 청수희.”
【일이 급하니 무리를 좀 했지.】
힘을 과하게 썼는지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청수희는 손을 내밀었다.
【노리개 줘. 일단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럴 필요 없어요.”
【뭐가?】
“이거.”
사영이 결심한 얼굴로 노리개와 수틀을 틀어쥐었다.
“내가 가지고 저승으로 내려가겠습니다.”
* * *
“아.”
오유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앞에서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던 부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풀려난 사지에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럽군.”
내궁까지의 길이 갑자기 훤히 뚫렸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보고 부하 장수가 달려와 그에게 고했다.
“장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조금씩 나아가라. 혹시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
그 명을 받들어 조심히 앞으로 전진하는 부하들의 뒤에서 오유는 검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만 막혔던 것이 아니라 소리도 지워져 있었는지, 밖에서 났던 소란을 안의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자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온 시녀나 하인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반란군의 칼에 목이 떨어졌다.
‘미안한 일이지만, 궁 안의 인원은 깨끗이 죽여야 후환이 없겠지.’
오유 역시 스스로 검에 피를 묻히며 사람을 베었다. 그는 그리 큰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더 큰 자신의 의무가, 새 시대를 열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이 저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왕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생포해서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그리 간단히 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전 시대의 왕이 죽는 모습은 반드시 백성에게 보이고 전시해야 하는 법이다. 참수하여 목을 성문 밖에 걸어 누구나 이 나라의 왕조가 뒤바뀌었음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오유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누구도, 이제 막을 수 없었다.
병사와 시녀와 하인들을 모두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다. 내궁 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눈치챈 경비병들이 전각 내외부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반란군들이 맞서 싸워 없앴다. 나무 수풀 틈에 숨어 화살을 날리는 자들 덕분에 경비병들이 더 손쉽게 죽어나갔다.
오유는 왕의 전각 근방까지 다가가 곁에 있는 전각에 불을 지르도록 명했다. 이제 들킨대도 상관없는 노릇이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전진했다. 이제 전면전이었다.
전각에서 불 붙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내관들의 숙소였는지 제대로 차림새를 갖추지 못한 내관들이 도망 나왔고 나오는 족족 칼에 맞아 죽었다. 이리저리 도망가는 그들을 쫓아 정교한 솜씨로 화살이 날아갔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갔다.
“쓸데없이 넓기도 하군.”
계속해서 전진하는데도 내궁은 끝이 없다. 왕의 여인들과 함께 거처하는 곳이라 그로서도 이 안까지는 구조를 알지 못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군사의 발길에 짓밟혔다.
“이 난리가 나는데도 나와보지 않는 왕이라.”
어디까지 썩어빠졌는지 알 수가 없다. 경비병들은 저 사느라 도망가기 바빴다. 내관이나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벌써 도망이라도 친 건 아니겠지.”
오유는 타당한 의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뒷문까지도 포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느 쪽에 개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전 왕이 도망치면 으레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에 붙어 다시 왕조를 복권시키겠다 난리를 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자, 빨리 앞으로 가라, 가서 왕을 가장 먼저 찾는 자에게 기와집과 재물을 내리겠다!”
마음이 급해져서 오유가 호령했다.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이 욕심에 눈을 번뜩이며 휘두르는 검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