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94화 (94/113)

94화

만희가 자애롭게 웃었다.

“말만 하면 모두 살려줄 뿐 아니라 큰 상을 내리지. 이미 앞서 금 덩어리를 받은 자들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은연과 병사들의 존재를 고해 바쳤던 내관과 시녀들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중년 병사는 그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연화 님은 이곳 전각 뒤, 지하감옥에 갇혀 계십니다……. 몇십 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곳에요.”

“……하.”

만희가 히죽 웃었다. 염 내관, 깜찍한 짓을 했군. 절대 그의 발로는 찾아가지 않을 곳을 골라 연화를 숨겨두었다. 과연 명만은 제대로 지켰어. 그리고 머릿속 한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계집이었군, 그 계집이었어. 그래, 그 노란 생기와 불빛.】

만희는 그 자리에서 은연을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그의 붉은 눈에서 빛이 사라진 듯했다.

바닥에 구르는 은연을 중년의 병사가 황급히 끌어당겨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목이 상해 콜록거리면서 은연은 눈을 감았다. 절대 병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은연을 위해 입을 열어 연화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었으니.

“가서 이자들을 하옥시켜라.”

만희의 말에 경비병들이 달려와 세 사람을 끌고 나갔다. 만희는 이제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후원의 감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난 그곳이 싫어. 지독하게 차가운 공간, 끔찍한 곳.】

머릿속의 여인이 속삭였다. 후원의 감옥에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끔찍한 기억만이 남아 있는 공간.

【그래도 가야 해, 내 아이가 그 계집을 원하니까.】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이 사라진 그의 붉은 눈은 그저 본능을 따라, 머릿속에 울리는 원혼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 * *

내궁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또 길이 몹시 길었다.

청룡의 결계는 아주 고약하다. 밖에는 밤하늘과 빛나는 달이 보였으나 그건 눈속임이었다. 백호는 예민한 후각으로 축축한 땅굴의 냄새를 맡았다. 궁의 길은 지상의 누각에서 지하의 땅굴로 연결되어 그를 미로로 인도한 것이다.

청룡은 아주 교활한 작자였고 결계는 그에 비례해 견고하고 복잡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게도 진을 쌓아두었군.’

몸을 누르는 압력이 거세질수록 백호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본신을 소환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가 청룡을 끌어내고 결계를 걷어내라고 한바탕 난동을 부릴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눈이 어두워졌지만, 그러다간 본신을 찾아 진입하기도 전에 연화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의 본능은 분명히 지금 가능한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고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백호는 금수의 왕, 그의 본능이 가리키는 곳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세상에, 세상이 창조된 이래 사방신이 이리도 애달프게 뛰어야 한다니.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본신으로 올 것을.’

물론 그랬다면 인간계에 지나친 영향을 미쳐 일이 커졌을 것이다.

사방신들은 각자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것에 지독하게 민감하고 영토 자체 역시 다른 세계의 힘에 매우 취약했다. 하지만 지금 백호의 뇌리에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연화가 바로 지척에 있는데 청룡의 결계 때문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백호는 이를 으득 갈았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살기를 갈무리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여기서 그가 힘을 전부 터뜨리면 결계야 터져 나가겠지만 어디 있을지 모르는 연화가 다칠지도 모른다.

끝없이 뱅글뱅글 이어지는 통로. 청룡의 특기도 아니고 현무의 특기인 땅굴에 가까웠다.

수국은 분쟁이 많았던 땅이라 저승에서 청룡에게로 넘어갔던 영토였다. 현무가 아주 오래 전에 뚫어놨던 굴일 터다. 백호가 다루기에는 더 고약했다.

청룡의 반대편이 주작이라면 현무의 반대편은 백호다. 현무의 힘이 스치고 간 자리는 정면충돌로 부수기 전에는 백호가 다른 방법을 쓰기 힘들었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세상이 뒤집히든 말든, 정말 정면승부를 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밤하늘에 뜬 달이 빛을 뿌렸고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색이 엷어졌다. 백호는 점점 마비되어 가는 이성을 느꼈다.

【정신 차려.】

그 때 그의 앞으로 가느다란 불꽃이 날았다. 길게 이어지는 붉은 불꽃.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신력.

“……주작?”

【아아, 그래. 오랜만이야.】

남방의 신, 주작이었다. 자그마한 새로 화한 주작이 검은 허공 속을 날았다. 백호의 펼친 손만 한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새.

하지만 그녀는 남방의 인간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이었다. 불꽃처럼 화려한 머리카락의 색을 그대로 옮겨온 깃털이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주작은 백호의 시선 앞으로 날아올랐다. 새의 검은 눈이 뚫어져라 백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정해라, 백호. 언제나처럼 단순무식하군.】

작은 새가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주작답게 전음마저도 황홀하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새빨간 깃털을 가진 새를 보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난 너와 놀 시간이 없어.”

【나도 너와 놀려고 온 건 아니야. 아, 물론 놀리려고 온 건 맞지만.】

주작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허공을 한 바퀴 돌아서 백호의 눈앞에 두둥실 떴다. 새의 검고 콩알 같은 눈동자 속으로 번뜩이며 선연한 동공이 보였다. 그녀는 날카롭게 웃었다.

【네놈이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와봤더니 멍청한 짓을 하고 있도다. 평소의 패기는 어디로 간 게야? 아니, 평소와 같은 건가. 생각 없이 앞으로만 달리는 꼴이라니.】

불의 사방신 주작은 긴 꼬리를 흩날리며 백호의 앞을 이리저리 날았다.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이놈 저놈 다 구경이군.”

【이곳저곳에 전부 유명해졌거든, 네 반려. 천하의 짐승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이야.】

“시끄러워, 난 지금 길이 바쁘다. 말싸움하고 있을 틈이 없어.”

【바쁘다고 해도 어쩔 건데? 이곳에 펼쳐진 청룡의 결계는 현무의 땅굴과 합쳐져 네놈과는 궁합이 최악이다. 어쩔 테야?】

“너만 없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한 발이라도 앞으로 갔다!”

백호가 화를 벌컥 냈다. 청룡은 교활했고 현무는 음습했으며 백호는 다혈질이었다. 주작은 속을 알 수 없었다. 변신의 귀재인 그녀는 변화무쌍한 불처럼 언제나 모습을 바꾸었고 청룡이나 현무의 속내까지도 꿰뚫어보았다.

주작은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낮게 웃었다.

【앞으로만 가서 어쩌려고? 네 반려를 찾으러 온 거라며.】

“찾아야지.”

【결계는 어쩌구?】

“…….”

백호는 분노에 눈을 번들거렸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자신의 단전에 쌓이는 기운을 느꼈다. 금수의 왕의 분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생명력을 전부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운을 이대로 폭발시켜 버릴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멍청한 짓.】

백호의 극한에 달한 분노를 눈치챈 주작이 날개를 팔랑거렸다. 이대로 백호가 본신의 힘까지 동원해 결계를 터뜨린다면 그 영향은 본인에게만 미치지 않는다. 수도 전체가, 혹은 수국 전체가 폐허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것은 필시 주작이 수호하는 초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모든 것을 너 혼자 하려고는 생각하지 마라, 이 독불장군아.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청하는 것이 현명하다.】

“무슨 헛소리야, 청룡의 결계를 감히 누가 뚫을 수 있다고. 지금 신령들을 불러봤자 이 궁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으이구, 멍청한 것.】

주작은 답답하다는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는 백호의 얼굴 가까이로 날아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너, 내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 것 같으냐.】

“그야, 너는 현무와 대척점이 아니니 힘을 비틀 수 있었을 것이고 천변만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청룡의 힘에도 그리 영향을…”

【그래. 그 다음은?】

백호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주작을 바라보았다. 작고 붉은 새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난 이곳의 길을 알 수 있어. 그 다음에 나한테 할 말은 없어?】

그녀는 백호의 다음 말을 빨리 하라는 듯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백호는 재빨리 답했다.

“……날, 도와줄 수 있겠나, 주작? 이 빚은 꼭 갚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백호가 부탁했다. 그 말의 어조는 마치 애원과도 같아서 주작은 조금 놀랐지만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호는 지극히 직선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사내다. 설마 그에게서 이런 부탁의 말을 듣게 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만불손한 다혈질의 금수조차 사랑 앞에서는 제법 기특하게 변하는군. 주작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을 뻔했다.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주작의 꼬리깃에서 붉은 빛이 새의 움직임을 따라 둥근 빛의 원을 그렸다. 어둠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붉은 빛. 그녀는 짐짓 탓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 빨리도 말하는군. 성질만 급한 놈.】

“도와줄 건가?”

【네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으니, 동료 된 의리로 도와줘야지 뭐 어쩌겠어.】

“여태 내가 곤란을 겪는 걸 구경한 건 아니고?”

백호는 긴장된 목소리로도 툴툴거렸고 주작이 한 바퀴 다시 돌았다.

【설마, 그걸 구경하고 싶었다면 이리 빨리 나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날 모르는군, 백호.】

웃음소리와 함께 주작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땅굴 안에 청명한 소리가 가득 찼다.

【그냥은 아냐. 내 이 빚은 꼭 받아낼 것이다. 기다려라.】

주작이 빙글 돌아섰다. 그녀가 날기 시작했다.

【날 따라와라. 길을 알려주지.】

“고맙다.”

새의 빠른 날갯짓에 맞춰 백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둘의 움직임은 빛처럼 빨랐다. 작은 새가 그리는 궤적은 한 줄기 붉은 선처럼 보였고 백호의 걸음은 바람과 같았다.

한동안 달리다가 검은 통로 가운데, 한 번도 보지 못한 길이 나타났다. 주변이 온통 일그러진 것이 청룡의 환술과 현무의 땅굴 때문에 현실과 결계 사이의 경계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저 경계를 부숴라. 최대한 다른 공간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해서. 자칫하면 결계 안의 공간과 밖의 공간이 충돌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해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백호의 손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는 바람을 일으켜 오른손에 감고 오른발을 내밀어 디디며 부드럽게 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서부터 퍼져나간 장력(掌力)이 둥근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을 일으켰다. 아주 고요하고 세밀한 힘의 발산이었다.

정확히 경계만을 두드린 고요한 힘에 의해 진을 형성하고 있는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땅굴의 모습이 점차 흐려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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