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93화 (93/113)

93화

“내게 볼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찻잔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도 묘우는 놀라지 않았다. 샘물의 정령이란 항상 예상외의 장소에서 나타나는 존재였다.

“왜 본신이 안 오시구요, 청수희.”

“오는 중입니다.”

“어차피 인간계로 가셔야 하는 일이니 본신이 오셔야 합니다.”

여우의 신령은 서책 위의 먼지에 눈을 찌푸렸다. 눈이 뻑뻑할 정도였다. 붓으로 써 내려간 실마리들이 이미 종이 열 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고 전체에 먼지가 가득 쌓여 그는 간혹 기침을 했다.

“묘우, 그래서 내게 말할 것이 뭐죠? 나를 부르다니 희한한 일이군요.”

까탈스러운 묘우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청수희는 별다른 말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우의 신령은 그사이 빠르게 정리를 해놓은 종이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호접보다 샘물의 정령인 당신이 훨씬 빠르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지금 저는 세계의 규칙을 속여넘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저승의 문서를 속일 방법을.”

“……그런 것이 가능한 건가요?”

“가능할 겁니다.”

세계의 규칙은 엄중한 동시에 허점이 있다. 모두가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동시에 그 죽음의 눈을 속여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묘우는 신령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신령 중 하나였고, 그래서 옛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으려 했다. 그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써 내려가던 내용을 정리했다.

【기발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여우의 신령을 따라갈 자가 있을 리 없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서고의 계단참에서 들려왔다. 그사이에 본신이 뒤늦게 이 자리에 당도한 청수희였다. 그녀는 긴 푸른 머리를 쓸어 올려 묶으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지하 서고에 가득한 먼지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샘물의 정령인 그녀에게 건조한 지하 서고의 공기는 몹시 불쾌하게 다가왔다.

【찾아내셨나요?】

“…….”

묘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턱을 두드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징과 영기(靈氣)가 모인 물건이 필요합니다. 백호 님과 연화 님을 대신할 만한.”

【물건이라.】

“그 물건을 지닌 생명이 저승으로 가면, 세계의 규칙을 속여 저승의 명부에서 조건이 충족된 것으로 결론지어지겠지요. 무엇보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듯 눈을 속여야 합니다.”

청수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묘우가 고개를 돌렸다.

“사방신의 반려에게 언제나 내려오는 노리개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든 연화 님을 대신할 수는 있을 거예요. 제가 보물창고로 가서 찾아올 테니 일단 그것을 지니고 인간계로 가셔서 백호 님께 말씀을…….”

【그 노리개는 지금 이곳에 없을 겁니다.】

“예?”

묘우가 잠깐 멍해졌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청수희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찌 당신이 아냐는 듯한 눈길에 청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백호 님께서 어떤 거래에 대한 대가로 제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푸른 비단 끝에 붉은 보석이 달린 노리개, 맞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뇨, 그것은 지금 인간계로 넘어간 사영 아가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한층 더 알 수 없는 소리에 묘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영이라니, 뱀 일족의 아가씨가 아닌가. 유배를 갔던 그녀가 왜 인간계에 있다는 건지, 그 노리개는 왜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제가 먼저 사영 아가씨에게 가서 노리개를 받아오지요. 묘우 님은 이곳에서 백호 님을 대신할 만한 물건을 찾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청수희가 바로 지하 서고에서 나갔고, 묘우 역시 서책을 챙기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과연 백호를 대신하여 세계의 규칙을 속일 만한 물건이 뭐가 있을까. 그를 상징하며 동시에 그만큼의 영기가 모인 것이.

* * *

만희는 눈앞에 엎드린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낯은 익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이다. 그녀의 곁에 염 내관과 함께 연화를 끌어갔던 병사 두 명도 함께 엎드려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쓸데없이 고집들이 세군.”

그는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돈에 눈이 먼 내관 한 명이 고한 바대로, 염 내관이 연화를 데리고 갈 때 함께 있던 이들을 전부 데려온 것이었다. 만희는 시녀의 어깨를 발로 툭 밀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의 눈물범벅된 얼굴이 흔들거리며 위를 향했다. 이미 만희의 손에 한 차례 얻어맞고 난 뒤라 뺨이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눈물로 젖은 얼굴은 단지 신체적인 고통에 의한 것이었을 뿐, 표정은 연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와 흐트러진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만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기껏해야 침방시녀인 주제에 고집하고는.”

다 드러낸 가슴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움찔 놀라는 시녀의 반응에 웃었다. 만희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쥐고 터뜨릴 듯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몸을 하고는 있는데. 나름 내가 예뻐했던 적 있지 않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신음을 목 안으로 삼키면서 시녀 은연은 입술을 씹었다. 만희는 확연하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연화를 가둘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때가 정상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미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왕은. 그래서 연화를 가두고 그 스스로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그 위치를 발설하지 말라 명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은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만희가 히죽거리더니 그대로 그녀의 옷을 단숨에 찢어 내렸다.

내관과 병사들이 가득한 어전에서 거의 맨몸이 된 은연이 숨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가렸다. 만희는 그녀를 뒤로 넘어뜨리고 다리를 벌려 무릎을 세우게 했다.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왕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말을 안 하겠다는 거냐? 그 계집이 네게 뭐라고 이렇듯 왕의 명을 듣지 않는 게지.”

“…….”

은연의 이가 악물렸다. 만희가 바지춤을 풀고 자신의 반쯤 발기한 양물을 꺼냈다. 그는 몇 번 물건을 문지른 뒤 은연의 몸 안으로 성기를 처박았다. 조금도 풀리지 않은 입구가 찢어져 은연은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신음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희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제법 입맛 돌게 생기기는 했어. 지금 그 치유사 계집의 행방을 말한다면 나름 호강하며 살게 해줄 것인데.”

응? 하면서 만희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하반신을 점령해 은연의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었다. 다리 사이에서 찔걱이는 소리는 애액이 아닌 피가 고여 나는 소리였다. 아파서 다리를 움찔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희는 희미하게 만족감 서린 얼굴로 거세게 추삽질을 했다.

그 광경을 함께 있던 병사들이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들은 염 내관과 가까웠고 그녀와도 친분이 있었다.

“어때, 말할 생각이 들지 않느냐? 원한다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도 시켜주지. 품계도 내려주겠다. 딱 한마디, 치유사의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

“큭, 흐으, 읏…….”

더 이상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강제로 열린 몸인데도 아랫배가 따끔거리는 쾌감이 간헐적으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고통과 쾌락이 섞인 감각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만희가 달콤하게 속삭여 왔다.

“그 계집은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은연은 눈물이 어린 눈으로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미친 것이 확연히 보였다.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연화는 은연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미워했고, 잠시 모셨고, 잠시 호감을 가졌던 여인. 어디에 있는지 말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은연은 목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끝없이 아랫사람들을 능욕하고 짓밟던 사내에게 끝내 고개 숙여 그 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앞에서 다리 벌려 그를 받아내고 있었지만, 이 따위의 능욕에 무릎 꿇고 저 사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오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만희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에 젖어 있었지만 동시에 강단 있게 고집을 드러냈다.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치십시오.”

은연은 기어코 이를 악물고 왕에게 대들었다.

그동안 보아온 왕의 만행들이 그녀 안에 쌓여 분노를 터뜨렸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다. 왕은 결코 주위 사람들이 명을 다해 죽는 꼴을 보지 못했다. 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녀의 신세로는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꼴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하고 싶은 말을 하고나 죽겠다. 만희의 밑에서 흔들리면서도 은연의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불쾌하군.”

감히 천한 것이. 만희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은연은 절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쓸모없고 불쾌한 존재를 가만히 놓아둘 이유도 없었다. 만희는 천천히 손을 내려 은연의 가느다란 목을 감싸 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서서히 은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모자라 허덕이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일부러 느리게 숨통을 조이자 은연의 몸이 퍼덕이며 성기를 조이는 힘이 더 강해졌다. 그 감각을 만끽하면서 만희가 히죽 웃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 쾌감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느리게 은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왕의 손등을 마구 할퀴었지만 만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치는 사지도 사내의 거구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전, 전하, 제발, 전하!”

결국 곁에 엎드려 있던 병사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은연이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오던 늙은 중년의 병사였다.

“전하, 전하……. 제발 용서를. 전하. 제가 말씀을 올릴 터이니.”

“…….”

“그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전하.”

병사가 손을 떨면서 엎드려 울었다. 만희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컥컥거리며 은연이 급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과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붉었다. 왕은 병사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했다.”

“용서를, 전하.”

“그래. 한 번 말해 보거라. 그 치유사 계집은 어디에 있지?”

“연, 연화 님은…… 연화 님은.”

은연은 흐릿한 머릿속으로도 필사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고 버둥대었다. 하지만 왕의 커다랗고 두터운 손이 내려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