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수직 동굴의 까마득한 높이도 백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숨에 바람을 타고 날아 올라간 백호는 전력을 다해 인간계로 질주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갈비뼈께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통증은 전적으로 마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대체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백호는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저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숨에서 단내가 났다.
‘연화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끝없이 여인의 이름만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평생토록 이렇게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다급함 속에서, 빠르게 스치는 지난 시간들을 생각했다.
당연히 수국의 왕이 연화의 정인이라고 생각했다. 천리안 속의 연화는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다운 거처에서 지냈다. 그러나 다시 돌이키면 연화는 정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간다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녀를 자신이 정인이 있는 게 아니냐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다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이토록 멍청할 수가 있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호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으나 웃음 한 조각도 밖으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큰 대가를 지불했고, 그리고 지금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생각은 계속해서 지난날의 일들을 조각내어 맞추기 시작했다. 연화의 마을이 갑자기 공격받은 것, 정원에 앉아 있으며 다소 쓸쓸해 보였던 연화의 얼굴, 그저 말없이 고요히 떠나가던 그녀의 뒷모습.
‘내가 그리도 못미더웠던 것인가.’
탄식이 터졌다. 남자의 가슴을 저미는 것은 그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뒤늦은 말이고,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줬다면 어땠을까, 이렇듯 억지로 끌려가게 된 일이 있는데 내가 가야 하노라. 그렇게만 말했더라면 백호가 여태까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여태껏 가만히 앉아 있었던 이유는, 마을로의 귀환이 전적으로 연화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래서 놓아주었는데,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찾아왔던 연심을 조금이라도 더 욕심내어 움켜잡고 있을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을지 모른다. 도망가던 그녀를 끌고 잡아 거래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안았을 때부터. 그렇듯 그녀를 겁박해 끌고 온 주제에 연화에게 그를 믿어달라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짓이다.
백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심장 밑바닥은 타들어 가는 듯 안타까웠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을 수 있던 시간과 다른 사내의 손에 보내지 않을 수 있던 시간.
【다시는 내 손에서 내려놓지 않겠다.】
날아가며 백호는 중얼거렸다. 애써 누르고 숨기고 있던 분노와 욕망이 스멀거리며 전신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길고 흰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리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새처럼 가느다란 여인을 생각했다. 엇갈린 선택 때문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 인간계에 머무르게 된 그녀를.
【처음이 잘못되어서,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가 속으로 웃었다. 시작이 잘못되었다면 나중에 고치면 된다. 백호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내였다. 연화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줄 수 있었다.
이제 와서는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신령계의 풍경이 그의 곁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인간계로 통하는 통로를 지나 그는 빠르게 수국으로 나아갔다. 더 빠르게,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의 발이 바람을 밟고 앞을 향해 날아갔다. 어느새 수도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스며들었다. 인간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언제나 사건이 있었고 서로를 해쳤다. 그래서 항상 수도 근처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지금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허공에는 피냄새가 군데군데 고여 있다. 특히 왕궁 주변의 저택들에서 여럿의 죽음이 감지되었다. 인간이 여럿 죽어나간 것이 틀림없는 냄새에 백호는 기이한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분명 청룡이 최대한 늦춘다고 했는데 이미 시작된 것인가.’
나라의 멸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촉발된다. 그러나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가능성 높은 것은 역시 반란군의 득세였다. 이곳은 가장 치안이 좋아야 할 수도의 번화가였다. 그런 왕궁 근방에서 지독하게 나는 피 냄새는 하나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빨리도 시작되었군.】
백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시대의 묵직한 흐름이 피할 수 없이 피부로 느껴졌다.
수국 따위의 멸망은 백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는 정인이든 아니든, 현재 연화가 왕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치유력으로 그의 두통을 달래주고 있다면 왕의 측근이나 다름없을 터. 만약 반란군이 들이닥친다면 가장 먼저 위험할 거라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었다. 백호는 불안이 심장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습을 투명하게 만든 채 궁 위로 날아갔다.
‘저자들인가.’
외궁에서 내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반란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외궁 쪽의 병사나 시녀들은 반란군에게 사로잡히거나 목을 베인 후였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백호의 코 안을 찔러 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반란군을 전부 도륙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의 시대가 흘러가는 흐름에 금수의 신인 그가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때, 다른 인간이라면 손을 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만큼 가장 민감하게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사방신인 그는 촉감으로 시대가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호령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는 장수 한 명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백호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세계의 규칙이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한 공기의 움직임이다. 젊다 못해 어리다시피 한 그 장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내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침착을 유지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
아무리 그래도 청룡의 결계를 뚫지는 못할 것이나, 만약 안에 있는 자들이 밖으로 나온다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포위한 채 기다리면 안에 갇힌 자들은 어차피 먹을 것이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니.
‘지금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에서는 알기나 할 것인가.’
시간은 얼마나 있을까. 백호는 궁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청룡이 쳐 놓은 결계에 지금은 보호받고 있지만…….’
인간들이 조금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것을 보니 청룡의 진이 분명했다. 과연, 내궁에 청룡씩이나 되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벽을 설치했다면 보통의 인간은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청룡, 청룡!】
그는 허공을 향해 청룡을 불렀다. 그가 만든 진이라면 그에게 묻는 것이 빠르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바다의 주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인간계로 넘어오며 본신이 아닌 채 세계를 통과하였으니 자신의 힘이 약해져 있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룡이 아예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허공 중에 작은 틈이 생기고 그 안에서 자그마한 요정이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여인의 모습을 한 물의 요정, 수령이었다.
“금수와 초목의 신이신 백호시여, 부르심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청룡을 불렀다만, 어째서 나오지 않는 게냐.】
“지금은 청룡께서 잠시 본신으로 돌아가시어 땅 밑을 살피시는 기간입니다.”
아, 하고 백호가 잠시 날짜를 세어보았다. 과연 청룡이 바다 밑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본신으로 돌아가 몸을 뒤트는 시기였다. 이 때에는 어떤 일로도 청룡을 불러낼 수 없었다. 그는 못마땅하게 눈썹을 좁혔다.
【그렇다면 혹시 너는 저 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진……. 왕궁에 쳐 놓은 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저 청룡 님께서 백호 님과의 거래 때문에 안배하여 쳐 놓으신 거라고 밖에는. 수국의 왕을 보호하여 시대의 흐름을 잠시 머물게 하신다 들었습니다.”
【젠장.】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필, 택한 방법이 이런 것이었다니. 거래의 요구는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가능한 멈춰달라는 것뿐이었으니 청룡의 입장에서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었지만. 과연 청룡과 자신은 잘 맞지 않는 친구 사이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래를 굽어보았다.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청룡의 진이 푸르게 수국의 내궁을 덮고 있었다. 과연 전심전력을 다해 성실히 쌓아올린 진이었다.
그 녀석답지 않게 아주 착실히 약속을 이행했군, 하면서 백호는 혀를 찼다. 쓸데없이 이럴 때만 성실함을 발휘하다니.
저 안에 연화가 기다리고 있다. 청룡의 진만 아니었다면 바로 내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데려오면 될 것인데, 거대한 장애물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었다.
“하오나 저 진은 청룡 님께서 공을 들여 쌓으신 결계이며, 어지간해서는 깰 수 없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씀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리셨다가 청룡 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풀어달라 하시는 쪽이……. 백호 님?”
【시끄럽다. 그렇게 여유가 있다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겠지.】
백호는 거칠게 말하며 호랑이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해 허공에 나타났다. 희디흰 머리카락이 어두운 새벽하늘에 날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손을 쥐었다 펴며 자신의 힘을 가늠했다. 청룡에게 살을 내준 데다가 인간계로 넘어오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신의 힘을 수십 분의 일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진을 무효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효화는커녕 자신과 연화를 빼내서 나오는 것만도 힘에 겨울 수도 있었다.
별수 있나. 백호는 수령을 뒤에 남겨둔 채 그대로 쏜살같이 아래로 향했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형상인 그가 오유와 반란군들의 사이를 스쳐 내궁으로 진입했다.
곁을 스치는 난데없는 센 바람에 인간들이 어리둥절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미 진입할 때부터 전신에 느껴지는 압력이 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관에 힘이 들어가 턱근육에 바짝 날이 섰다.
청룡의 결계는 고약하다. 쭉 뻗어 내궁의 전각이 바로 보이는 길이지만 진입하는 자는 결코 그곳으로 갈 수 없다. 길의 초입에서는 그저 빙빙 돌기만 한다. 그러나 한 발 더 들어서면 그곳은 다양하게 천변만화하며 진입자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초입을 뚫지 못할 것이고, 뚫는다 하여도 이 자리에서 끝없는 미로를 뱅글거리며 돌다가 결국은 말라죽어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방신인 그가 이 정도 진을 못 뚫는다면 그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이 진 너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연화가 있었다.
이제껏 손에서 떠나보내 그리워만 하던 여인이, 바로 이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