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제 와서는 그때 다소 좋지 않은 말을 했던 것조차 후회가 되었다. 함께 있던 시간을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그 몸에 자신을 새겨주어야 했다.
“정말 곤란해.”
백호는 토끼를 놓아서 보내주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토끼가 곧 뛰어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백호는 한숨을 쉬고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든 절경이었으나 마음은 어둡고 답답했다.
이렇게나 그립고 힘들 시간을 알았다면 멍청한 짓을 하지 말고 그녀가 떠난다고 했을 때 잡아둘 것을. 나중에 그녀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잡을 것을 그랬지. 그러나 연화가 행복한 곳은 지금의 정인 곁일 것인가.
【백호 님!】
그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아주 멀리서 희미한 전음이 들려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동굴은 수직으로 깊어 보통의 동물이나 신령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날쌘 새가 간혹 들어와도 나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죽기도 할 만큼 깊은 곳인데 대체 누가 들어왔다는 것인가. 백호는 다시 들려온 전음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백호 님, 어디 계십니까!】
호접의 전음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백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바람이 뭉쳐 발밑을 지지하고, 그는 빠른 속도로 전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날아갔다.
“호접, 무슨 일이냐?!”
날아가면서 그는 큰 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고요한 동굴 아래쪽의 들판 위에 백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칩거라고 했는데도 들어왔다는 건 호접의 성격상 대단히 큰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
【오, 맙소사, 백호 님.】
겨우 그를 찾아낸 호접이 날아와 그의 손끝에 앉았다. 어지간히 지쳤는지 그녀의 날개가 바르르 떨렸다. 기가 꽤 소진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백호가 손바닥에 기운을 돌려 호접을 북돋아주었다.
“왜, 무슨 일이냐. 큰일이라도 생긴 게야?”
【예, 백호 님. 빨리 손을 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호접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실은 그 왕이 연화의 정인이 아닐 거라는 추측, 다름 아닌 그 왕이 연화를 끌고 갔다는 말, 저승의 명부에 관한 이야기까지. 가능한 정리하고 축약해 전달하려 했지만 말은 뒤죽박죽이었다.
【백호 님, 연화 님의 정인이 아닙니다. 그 왕은요. 연화 님을 강제로 끌고 가서 정인인 척을 하는 것뿐이에요.】
“…….”
그간 백호의 마음고생이 가슴 아파서 호접은 토해 내듯 말했다.
듣는 동안 백호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소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푸르고 맑은 눈이 눈꺼풀 아래로 숨겨졌다가 다시 나왔다. 그 눈동자가 다시 또렷이 초점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두, 진실이겠지.”
백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예, 백호 님.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칩거하시는 공간까지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온 것이며…….】
호접은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백호를 만나고 나니 잔뜩 지친 몸이 이제야 인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빨리 저승의 명부를 어찌 해야……. 백호 님과 연화 님이 모두 올라가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과연 그렇구나.”
백호는 조심스럽게 바람 위에 호접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백호가 부리는 바람은 그녀를 실어 나무 위로 옮겨 놓아주었다. 호접은 지친 채 주군을 바라보았다.
【현무님을 뵈러 가실 겁니까?】
“……아니.”
【그, 그럼요?】
“인간계에 다녀오겠다.”
【……잠시만, 백호 님. 인간계, 수국에요?】
호접의 물음에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백호가 그대로 몸을 날려 수직 동굴을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에 제대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백호 님!】
아니, 그래도 뭔가 눈가림이라도 하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말이 치솟아 올랐으나 이미 백호는 시야에 없었다. 최소한의 위장이라도 해야 상제나 세상의 규칙에 들키지 않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텐데. 하지만 백호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갔다.
‘빨리 무슨 수를 내라, 묘우.’
호접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라면 백호가 인간계로 내려가 큰 소란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 * *
“말이 없구나, 염 내관. 내가 사람을 잘 보았어.”
만희가 크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염 내관이 피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이 먹은 내관은 충심이 깊은 자였고, 왕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자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목덜미에서 흐르는 피를 느꼈다.
지금 왕은 제정신처럼 보이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일전에 자신에게 당부했던 건, 이런 상태를 대비해서였으리라. 염 내관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왕의 진짜 뜻은 전에 자신에게 내렸던 명령이다. 그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왕이 명령하는데도 전에 받았던 명을 받들기 위해 말을 할 수가 없다니 말이야. 재미있지 않은가.”
“……전하께서,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재미있구나. 네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뜻을 읽었느냐? 아니면 내가 왕처럼 보이지를 않는 게냐.”
왕이 날카롭게 웃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이 먹은 내관의 머리채를 쥐어 뒤로 젖혔다. 이미 얕게 베인 목덜미에서 피가 튀었다. 경비병들도 차마 고초를 당하는 염 내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는 대단히 인망이 있는 자였고 주변 사람들이 의지하는 자였다.
“그 계집을 어디에 가뒀는지 말하거라, 그런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염 내관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이 거부의 뜻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만희가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큰 손아귀에 잡힌 내관의 목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아귀에 힘이 가해져 숨이 막혀 왔다.
컥컥대는 염 내관을 내려다보며 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집이 세. 자네는 옛날부터 그랬지. 아주 옛날, 젊은 시절부터.”
내관은 흠칫했다. 만희의 말투가 묘했다.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염 내관의 젊은 날을 봤다는 듯한 말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목을 조르고 있는 만희의 얼굴을, 그는 애써 눈을 돌려 올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기묘한 눈이다. 인간으로서 가능한가 싶을 만큼 새빨간 적안. 그의 눈은 이제 푹 깊게 가라앉아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구슬처럼 번들거리다가도 곧 무저갱처럼 침잠한다. 아무리 보아도 살아 있는 인간 같지가 않아서 염 내관은 두려움을 느꼈다. 평상시 만희의 광기 어린 눈과는 또 달랐다.
“계집은 어디 있지?”
확실히 말투가 이상하다. 만희가 연화를 총애하게 된 이후 그는 그녀를 낮춰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왕은 쓸모없는 천한 것을 부르듯 연화를 일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감정한 눈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고?”
“없나이다.”
“마지막 기회인데.”
“뜻대로 하시옵소서.”
염 내관은 목을 길게 늘였다. 목을 치기 좋도록 옷깃과 머리까지 깔끔히 정리해 엎드리는 그를 보고 왕이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나이를 먹고 건방져지기만 했구나, 염 내관.”
“…….”
“하기사 언제나 그러했지. 내게 지켜드리겠다며 울 때부터 말이야.”
염 내관은 흠칫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왜, 죽을 시간이 되니 무서우냐?”
“방금, 제게 내리신 말씀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만희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염 내관은 그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는 희미한 그림자를 목격했다.
“지켜드리겠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지, 늙은이.”
“…….”
“왕이 희례연에 날 밀어 넣고 즐겼을 때 울기만 하던 주제에.”
왕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서 내관은 아주 오래 전, 그가 사모했던 한 여인을 떠올렸다. 젊고 아름답고 가여우며, 끔찍한 불행 끝에 기어코 파국으로 내몰렸던 여인. 믿을 수가 없어 그는 떨면서도 만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광기에 찬 만희의 얼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관의 턱 밑에 칼을 들이댔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전하.”
염 내관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화비(花妃) 전하.”
불러서는 안 되는 금단의 이름을 들은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귀신 같은 형상을 한 채 그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이 늙은 내관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단숨에 목의 절반이 달아났다.
하지만 염 내관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비 전하, 라고 중얼거리는 늙은이의 입모양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만희는 그대로 그의 몸을 도륙 내었다.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듯 내관의 육체를 마구잡이로 찌르고 잘라대는 서슬에 살점과 피가 온통 튀어 만희의 얼굴과 몸을 더럽혔다.
경비병들은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손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왕은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내관들과 시녀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자, 이리들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 중 그 계집, 치유사 계집의 위치를 아는 자가 있겠지? 내게 말해 보거라.”
만희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염 내관, 이 늙은이가 혼자서 계집을 옭아매어 데려갔을 리 만무하다. 분명 저들 중 아는 자가 있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자비로운 듯한 표정을 지어내었다.
“자, 그 계집이 잡혀갈 때 곁에 있던 자를 말해 주지 않겠느냐? 말해 주는 자에게 내 상을 내리겠다. 한 명씩 말해 줄 때마다 내 금 한 덩어리씩을 내리지.”
만희의 명에 따라 내관이 금을 가져왔다. 금 덩어리를 손에 얹고 굴리면서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로 공포보다 재물이 훨씬 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보통 내관이나 시녀의 일 년치 녹에 해당하는 가치의 금덩이를 보고 서서히 그들의 눈빛이 욕심에 물들고 있었다.
죽어 넘어진 염 내관의 시체와, 왕의 손에 구르고 있는 금 덩어리. 두 가지의 조합은 그들이 입을 열게 함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만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