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만희는 숨을 헐떡이며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곧 몸을 일으킨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검을 찾아냈다. 혹시라도 남을 해칠까 두려워 숨겨두었던 검이다. 잠긴 옆 방까지 가서 숨긴 무기를 찾아내 온 그는 검을 뽑아 들고 검집을 바닥에 버렸다. 정신이 나가버린 듯 꼬이는 걸음걸이라 한참이나 헤맸다. 그는 몸을 휘청이며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가 복도 벽에 부딪히며 돌아 나왔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러 장식용의 도자기와 걸개들이 전부 부서지고 찢어져 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도 근처에 오지 말라는 엄명 때문에 시녀나 내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계속해서 전각 안을 부수어나갔다.
【그 여자를 찾아.】
【이제 영원히 네 곁에 잡아둘 수 있어.】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 갈 수 있어.】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만희의 어둡고 더러운 속마음을 그대로 햇빛 아래 끌어내 보여주는 것처럼 선명한 속삭임이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의 이성이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억지로 끌고 온 여자, 정인에게 가지 못하도록 붙들어놓고 가둬버린 여자. 연화를 향한 더러운 집착.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계속해서 눈앞을 검게 물들이던 그 독점욕이 머리를 망가뜨렸다. 그는 머릿속에 들리는 말소리에 기쁘게 수긍하며 움직였다. 원혼의 목소리 역시 기쁨에 가득 차 명징하게 만희의 귓전을 울렸다.
【너도 나와 함께 간단다, 내 아이야. 네 소원을 들어줄게, 함께 가자꾸나.】
걸음걸이에 망설임은 없었다. 새벽이어서 시녀와 내관들은 거의 잠들어 있었다. 만희는 비틀거리며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경비병이 그를 막으려다가 흠칫해서 얼른 창을 거두었다. 왕은 느릿하게 두 명의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전하.”
경비병들이 깊이 엎드렸다. 만희의 손에 있는 검을 보고 그들은 긴장한 상태였지만 왕은 그들에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마치 매우 제정신인 사람처럼 명료하게 말했다.
“염 내관은 어디 갔지?”
“염 내관님께선…… 지금 숙소에 계실 것으로 압니다.”
새벽이었고 염 내관은 지체가 높은 내관이었기 때문에 새벽에 나와서 일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관들의 거처에서 아직 깨지 않았을 텐데 왕이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완전히 미쳐 버린 머리는 마치 제정신일 때처럼 정확하게 모든 일을 기억해 냈다. 그는 염 내관에게 연화를 숨기라 지시했고, 어디에 숨겼는지 자신에게 알리지 말 것 역시 명했다. 나중에 자신의 말이 달라지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엄히 단속했다. 혼령들의 속삭임에 져서 그녀를 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들으면 되는 거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고문이라도 해서 하게 만들면 된다. 비록 절대 알리지 말라는 엄명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염 내관은 충심이 뛰어난 자였으므로 아마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재빨리 경비병 한 명이 뛰어나가 내관을 부르러 갔다. 시간이 어쨌든 왕이 부른다면 당연히 와야 했다. 머지않아 염 내관이 제대로 매무새도 갖추지 못하고 황급히 뛰어왔다.
광증에 매몰되었던 왕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염 내관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그의 앞에 엎드리다가 왕의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그는 순간 멈칫거렸다.
“어찌 일어나 밖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전하.”
“그래, 염 내관. 내 물을 것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왕의 적안은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무해하게 보이려 만희는 검을 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주면 되는 거야. 알겠지?”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래.”
만희의 완전히 미쳐 버린 붉은 눈동자가 휘어졌다.
“연화를 어디에 숨겨두었지?”
* * *
은밀하게 사내들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때는 새벽이었다. 수도 궁 근방의 저택들이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수도를 손에 넣은 채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능한 해치지 말라는 장군의 명에 의해 군사들은 절도 있게 빈민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 궁으로 향했다. 해자 근처에 모여 선 군사의 숫자는 일만에 가까웠다. 수도 방벽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군의 숫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아마 왕이 동원할 수 있는 왕궁 내의 병사보다 몇 배는 많으리라. 수도를 방어하는 장군 황영과 도시를 둘러싼 방어진의 장군들이 모두 합심한 결과였다.
‘오랜 시간 장군들을 설득한 보람이 있었지.’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지속되어 온 수국 내에서 장군들은 이미 조정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선대 왕이 정복 전쟁을 즐기며 무관의 위치가 다소 격상되는가 하였으나 만희가 집권하며 다시 원래의 풍조대로 돌아가 버렸다. 오유가 그리 어렵지 않게 장군들을 설득할 수 있던 이유였다.
그는 궁의 성벽 앞에 도착해 말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귀족이자 왕에게 빌붙어 폭정을 돕고 축재에 눈이 벌겋던 대신들은 짧은 시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살해당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없앴으므로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칼은 뽑힌 것이다.
오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장군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길은 침착하면서도 열렬했다. 그가 손수 고르고 키워낸 소중한 그의 부하들이었다.
밖에서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불렀으나 오유는 자신의 군대를 혁명군이라 불렀다. 지배층을 완전히 갈아엎고 새 시대를 열 자랑스러운 군대. 이 지리멸렬한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새 나라를 개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그의 군사.
“수도 내부는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황영 장군께서 안심하라 전하셨습니다.”
“그래, 고맙다.”
오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걸려 해자를 건넜다. 성문의 왼쪽 아래를 두드리자 작은 창문을 열고 경비병이 눈을 드러냈다.
“장군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이 시간에는 누구도 궁에 출입이 불가능하십니다만…….”
의아한 듯한 그의 눈빛에 오유가 암호를 말했다.
“‘별을 보기 위해 왔노라’”
경비병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님 말씀 받고 오셨습니까? 제사장님은 지금 행방불명이시니…….”
웅얼거리던 경비병은 곧 작은 창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 후 끼익거리며 느릿하게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가 들어올 만한 간격만이 열린 육중한 성문에 오유는 미소를 짓고 말을 몰아 들어갔다. 곧 그의 뒤로 성문이 닫혔다.
“시녀를 데려가려 오셨습니까? 밤놀이를 위해 시녀를 데려가실 때는 재상께서 항상 직접 오셨는데…….”
“그랬군. 시녀를 데려가 놀이를 즐기셨나?”
“자주 그러셨지요. 어제도 데려가신 시녀가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하하 하면서 오유가 웃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다. 과연 재상과 함께 있던 그 어린 여자가 시녀였던 모양이다. 다소 의아한 얼굴의 경비병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괘념치 말게. 그나저나 아직 궁 안은 어둡고 조용하군, 나도 이 시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그렇지요. 불침번을 제외한 시녀나 내관들이 깨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말입니다. 호위군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 그렇군. 한 시간.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뭐가 말씀이십니까?”
오유는 온화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경비병은 말을 멈췄다. 말뿐 아니라 숨도 멎어갔다.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손 안에 감췄던 단도로 경비병의 성대와 경동맥을 한꺼번에 잘라버린 오유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답했다.
“알 거 없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사내가 버둥거리다가 곧 숨을 거뒀다. 바닥에 피웅덩이가 생겨났다.
오유는 손잡이를 돌려 성문을 완전히 개방했다. 조용하게 검은 야행(夜行)복을 입은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 불침번으로 높은 곳에서 밖을 살피는 궁 안의 경비병도 이미 포섭이 된 상태였다.
빠른 속도로 오유의 군사들이 궁 안으로 퍼져 들어갔다. 오유가 명을 내렸다.
“궁 안의 모든 인간을 죽여라.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괜한 자비심은 화근의 원인이다.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면 모르되, 이미 벌어졌다면 무자비한 칼날을 공평하게 들이대야 하는 법이다.
“내관이든 후궁이든 시녀든 신하든 관계할 것 없다.”
수국의 궁은 바깥을 둘러싸는 외궁과 중앙의 내궁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궁에는 지체 낮은 후궁과 시녀, 내관, 나아가 병사들이 거주했고 내궁에는 왕과 지체 높은 후궁이나 왕비의 거처가 있었다.
“먼저 외궁부터 깨끗하게 죽여 없애라.”
그 이후에 내궁으로 진입한다. 오유의 명은 군사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사천리다. 지금까지는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게 진행되어 왔다. 시간조차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오유는 뭔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불안감을 마냥 무시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파고든 복면의 군사들은 가차 없이 피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이만큼 일이 진행된 이상에는 이제 소란이 일더라도 별수 없다.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그는 군사 몇을 이끌고 내궁으로 곧장 진입했다. 자주 가지는 않았으나 익히 잘 아는 길이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일직선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길.
하지만 몇 발자국 걷다가 그는 자신이 다시 원점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황당해서 오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장, 장군님? 이게 대체…….”
함께 뒤를 따른 군사들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오유는 다시 한번 내궁으로 가는 길로 진입했다. 그리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이가 없어서 오유가 중얼거렸다. 분명 시야에 저 멀리 내궁의 끄트머리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다섯 번째 진입에 실패하고 나서 그는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거 곤란한데.”
* * *
백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수직 동굴의 밑에는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피어난 들판이 존재했다. 온갖 동물들도 함께 뛰어놀았다. 아직 수련을 쌓기 전이라 영(靈)을 가지지 못한 동물들이었다.
그는 발치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안아 올렸다. 백호의 커다란 손 안에서 토끼는 한 줌도 안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구슬 같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백호임을, 사방신임을 아는 눈이었다. 백호는 천천히 토끼의 등을 쓸어주었다.
“무엇을 봐도 연화가 생각나니 정말 곤란한 일이로구나.”
한숨과 비슷한 말이 흘렀다. 토끼의 흰 털은 보드랍고 골격은 가녀렸다. 마치 연화와 같았다. 다친 토끼마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치료를 해주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