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겁이 없다기보다 명령을 받아 어쩔 수가 없었던 게지. 신령계 뱀 일족의 수하였거든.”
“아.”
뱀 일족이라면 견암 역시 알았다. 뱀 일족의 수장인 사혈은 아주 탐욕스럽고 고약한 자였다.
“그런데 그 새에게 왜 왔느냐 물었더니 내게 편지 하나를 주더군. 아, 내게 올 편지는 아니었지만 저승의 사정을 모르는 게 없어야 하니 일단 펴보았네.”
현무는 명부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백호와 백호의 반려가 적혀 있는 장이었다. 그것을 두드리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둑한 방 안 하나만 켜놓은 촛불이 흔들리며 현무의 얼굴에 명암을 만들어냈다.
“뱀 일족의 수장이 파란 새의 목숨을 대가로 백호의 반려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 달라는 내용이었지.”
“……하지만, 이미 명부에 올라가 있는데…….”
“그자는 그걸 몰랐던 게지.”
현무는 명부를 덮었다. 온통 검은 옷을 두른 사방신은 마치 어둠 그 자체처럼 보였다. 깊고 검은 눈을 들어서 사방신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한테 가기로 되어 있던 편지였다네.”
“…….”
견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속으로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좀 더 많은 영혼을 끌어모으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사혈과도 한 번쯤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을 하필 현무에게 발각당하다니. 그는 잠시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영혼을 끌어모으는 거야 좋지만 편법은 적당히 쓰게.”
저승사자가 저승으로 많은 영혼을 끌고 오려 하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평범한 혼령이었다가 기억을 지우고 저승사자로 승격된 견암은 역할에 아주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현무는 평소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이렇듯 발견했을 때 지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건 소용없다. 견암은 눈치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윤회의 굴레바퀴를 돌리려면 저승에 많은 영혼이 들어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영혼을 데리고 오면 안 되는 일이야.”
“예.”
굳은 얼굴의 저승사자를 잠시 보다가 현무는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림자처럼 견암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현무는 생각에 잠겼다.
백호와 백호의 반려가 한꺼번에 명부에 올라간 건 꽤 큰일이다. 본래 그것 역시 발설하면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는 일부러 수조에게 그를 알려주었다. 걸린다면 약간의 벌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건 현무가 큰 귀찮음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저승에서 알려준 것이니 다른 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현무는 나름대로 백호와 그의 반려였다는 인간 여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벌써 죽기에는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가 하였으나 저승의 명부란 운명과 윤회와 세상의 규칙이 멋대로 합산되어 나오는 것이었으니 함부로 손을 대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그놈들이 꾀를 낸다면, 최선을 다해 협조는 해주지.’
신령계의 사방신이다. 결국 백호와 그의 측근들이 꾀를 낼 테니 현무는 거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셈이었다.
마음에 든 자에게 죽음의 신은 생각보다 자비로운 편이었다.
* * *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이 아주 간만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웬일이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만희의 머리는 땀에 젖어 귀신처럼 솟아 있었고 피부 역시 거칠었다. 며칠 동안이나 두통에 몸서리치며 괴성을 질러대 목소리 역시 잠겨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은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 찢어발겨 넝마가 되었다. 침상의 침구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방 안은 전쟁통처럼 난장판이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만희가 신신당부한 대로 그의 방 근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그사이 살이 쑥 내려버려 손과 팔과 얼굴의 뼈가 툭 불거진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거칠기 그지없는 손바닥의 피부에 얼굴을 묻고 만희가 잠시 신음했다.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맑아진 머릿속이라 오히려 멍했다.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없는 상태.
“갑자기 귀신들이 전부 쫓겨나기라도 했는가.”
다행스럽다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멍청한 머릿속으로도 만희는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다. 수상쩍은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귓가에 며칠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속삭이던 그 악의에 찬 목소리들이 전부 사라졌다니, 이유가 없다면 믿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것들이 이제야 겁을 먹고 물러났나?!”
그는 괜히 큰소리를 쳤다. 허세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잠시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만희는 조금도 아프지 않은 머리를 털어댔다.
문 밖에는 아마도 시녀와 내관이 가져다놓은 물과 음식이 있으리라. 갑자기 꼬르륵 하며 나는 배의 울림에 만희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었으면서 배가 고프단 말인가.
“미치겠군…….”
며칠이나 굶은 터라 힘이 빠져 사지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일어나서 바닥에 넘어진 의자와 찢어진 깔개를 피해 넘어지지 않도록 걸어가는 것만도 힘들 지경이었다.
문 앞의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문 앞에 선 여자를 발견했다. 시녀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코 이 근방에 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는데. 만희는 화를 낼 기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저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여자는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시녀라면 당연히 물과 음식을 만희 대신 들고 들어오거나 그의 손짓에 따라 얼른 인사하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만희는 힘들어서 다소 멍한 머릿속으로도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만희에게 고정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는 숨을 삼켰다.
눈두덩이가 움푹 파여 검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은 뼈다귀 위에 가죽만 발라놓은 듯 비쩍 말라 있었다. 얇은 입술이 말려들어가 치아가 보였고, 코는 잘려나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빠져 길게 늘어진 몇 가닥만이 남아 있었고, 다 낡은 옷자락이 흐들거리며 허공으로 날렸다.
수없는 목숨을 스스로 죽였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시체의 모습에 만희는 당황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자의 시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더러운 맨발 밑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가 양옆으로 찢어졌다. 웃는 표정이라고 만희는 알아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누, 누구냐?”
힘이 없어 말은 의도만큼 거세게 나오지 못했다. 이 정도로 기력 없는 소리를 입 밖에 내뱉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꼴불견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상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만희는 주춤주춤 더 물러났다.
만희는 혼령이든 시체든 비정상적인 존재를 무서워할 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기묘한 감각이 끓어올랐다. 이 여자의 눈을 보거나 정체를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며 그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는 잠시 그를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그녀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터운 깔개에 발자국 하나 나지 않는다. 뒤로 그림자조차 없었다. 역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귀신 따위를 무서워할까 보냐 하며 만희가 용기를 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겁을 먹어 몸을 떠는 겁쟁이들을 비웃었으나 지금 그가 그 꼴이었다.
만희는 결국 침상에 풀썩 주저앉았다. 모르는 사이 등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버석거리던 손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그의 코앞으로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주위로 고약한 악취가 풍겨 왔다. 시체의 썩은내였다.
“대, 체…… 누구냐…….”
물음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입을 달싹여 간신히 말을 만들어냈지만 소용은 없었다. 여인은 몸을 굽혀서 만희의 시선과 눈 높이를 맞췄다.
오기가 생겨 그가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까짓 혼령들과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씨름을 해왔다. 평소에도 자신의 목덜미와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우스울 뿐이었다. 만희는 도깨비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똑바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고 표현하기는 이상한 일이었다. 여인에게는 안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눈이 있던 자리에 뻥 뚫린 동굴 두 개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더 큰 공포는 그녀가 신음처럼 낸 소리였다.
【내 아이.】
만희의 적안이 찢어져라 커졌다. 여자의 손이 그의 어깨에 올라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아귀가 넓은 어깨를 틀어쥐었다. 분명 혼령인데 살이 패일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부터 냉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 감, 히 내게…….”
만희는 난생 처음 공포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거대한 덩치로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자는 비쩍 마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안아 들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여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돌아오렴, 나의 아이. 내 아이.】
높은 비명과 닮은 웃음소리였다.
【내 오라비가 지은 죄의 증거. 내 시궁창 같은 삶의 결과물, 내 아이야.】
“닥쳐!”
기어코 그가 비명을 지르며 여자의 몸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주먹은 아무것도 때리지 못하고 허공을 지나쳤다. 분명 실제 사람처럼 선명한 모습이었으나 만져지는 것은 없다. 만희는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주먹을 휘둘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자가 웃는 소리가 높았다.
【내 아이! 내게 오렴. 나와 함께 이제 저 땅 밑으로 가자꾸나.】
성대가 긁히며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새었다. 만희가 침상 뒤로 벌벌 떨면서 물러났지만 여인의 몸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따라왔다. 목이 부러진 것처럼 직각으로 꺾여 눈을 들여다보는 여인의 뻥 뚫린 안와에 만희가 발작적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깔깔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여인의 형상은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목덜미와 어깨, 머리에 남은 차가운 손아귀의 감촉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강해졌다. 만희의 눈이 텅 비어갔다. 생생하게 타오르던 붉은 눈동자는 검게 죽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네가 함께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고르렴. 함께 가자.】
그의 귀에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속살거리는 소리는 유혹적이었다. 네가 고른 여인은 영원히 너와 함께 있게 될 거란다, 내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