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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88화 (88/113)

88화

“객의 예를 다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샘의 정령이여.”

물에 젖은 흰 피부가 창백했다. 청수희는 오랜만의 쉬는 시간을 방해한 호접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인사했다.

【호접, 신의 측근이신 나비의 신령이시여. 어쩐 일이신가요?】

원로급이자 백호의 최측근인 신령이니만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호접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휴식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미안합니다만, 부디 지금 백호 님의 궁으로 좀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궁으로요? 어째서요?】

청수희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백호는 수하들을 궁으로 불러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래 번잡한 것을 싫어해 연례행사로 있는 연회 때에도 간혹 얼굴을 구겼다.

“예, 사정이 복잡한데…….”

호접은 간략하게 사정을 줄여 설명했다.

말을 전부 들은 청수희는 자신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 나름대로 인간계와 저승의 일까지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휴식한 시간 동안 꽤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청룡이 경고한 뒤로 조심스럽게 다니다 보니 피곤해져서 쉬고 있었는데.

【그럼 묘우 님이 제게 뭔가 소식을 전달해 줄 역할을 시키신다는 거군요.】

“예, 백호 님은 곧장 인간계로 가실 테니 저보다 더 빠르게 소식을 전해줄 이가 필요합니다. 저는 백호 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희의 거처 역시 신령계에 존재했고, 백호의 신변에 사달이 난다면 그녀가 아끼는 이 샘물 역시 천재지변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연화를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청수희는 알았다며 곧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

호접은 곧장 산봉우리 밑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가벼운 나비의 몸으로 날아 내려가는 것보다 이쪽이 빠르다. 쏜살같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뒤로 지나갔다.

거의 낭떠러지의 중반 이후까지 충분히 내려왔을 때 그녀의 몸이 나비로 둔갑했다. 팔랑거리는 가벼운 나비의 몸은 속도가 늦어졌지만 최선을 다해 날아 아래로 향했다.

깊고 깊은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무저갱과 같이 검은 입구다. 호접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날아들어 갔다. 그녀의 화려한 날개의 빛이 동굴 안으로 점점이 이어져 갔다.

【백호 님.】

나비인 채로 최대한의 전음(傳音)을 보냈다. 수직으로 뚫려 있는 동굴이라 인간의 몸으로 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주군에게 닿기를 바라며 수직 동굴 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날아 내려갔다.

* * *

연화는 벽에 기대 기진한 채 늘어져 있었다.

만희가 그녀를 가둔 지 사흘째였다. 이곳에 옮겨 온 이후 은연이 드나들며 꼼꼼히 먹을 것을 챙겨주었으나 떨어진 입맛으로는 세 입을 채 먹지 못했다.

화를 내면서도 두터운 옷가지와 음식을 가져다주는 은연의 얼굴을 봐서라도 힘을 내고 싶었으나 몸은 천근만근 늘어질 뿐이었다. 약사여래의 가피가 깃들었으나 그 힘은 연화 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은연은 아름다운 얼굴 가득히 화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부드러운 이불을 감옥의 창살 너머로 넘겨주면서 연화가 갇힌 옥의 상태에 대해 치를 떨었다.

완전한 돌벽으로 이루어져 차디차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안에는 침대도 없어 돌바닥에서 자야 했다. 현 왕의 모친이 갇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

“그동안은 그토록 귀애하셨으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리 끌어다 가두시다니.”

염내관이 입단속을 하라 일렀지만 연화가 있던 전각의 시녀들은 연화가 어디에 갇혔는지 대부분 알았다. 그까짓 내관이 뭐라고, 하면서 은연이 이리저리 다 퍼뜨렸던 까닭이었다.

시녀들은 대부분 연화를 좋게 보았기 때문에 갑자기 끌려가 감옥에 갇힌 그녀의 처지를 동정했다. 은연이 가져오는 음식과 옷가지도 모두 시녀들이 모아서 보내는 것들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셔서 아무것도 못 알아보신다고 합니다. 정신이 있으실 때 마지막으로 내리신 명령이…… 이것이었다고 하고요.”

지독한 인간이다. 귀애하던 치유사를 가두라는 것이 마지막 명령이었다니. 은연은 침울한 얼굴이 되었지만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 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모두 떠나버린 내게도 여전히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위로가 되어 연화는 가늘게 웃었다.

더욱 힘이 빠져 완전히 늘어진 사지였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 살아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이곳에서 나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저 같잖은 경비병들이 또 유세로군요.”

왕궁의 경비병들은 기강이 해이해 은연이 연화를 만나고자 옥에 오는데도 은근히 재물을 요구했다. 동전도 아닌 은전을 원했다. 그러고도 조금 오랜 시간 머무르려 하면 밖에서 헛기침을 하고 소리를 치며 빨리 나오라고 유세를 떨어댔다.

은연은 연화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얼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주 잡았던 희고 가는 손끝이 차가워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연화는 은연이 가져다준 두터운 이불을 한구석에 깔고 마치 번데기처럼 그 이불을 온 몸에 감았다. 여러 가지 옷가지를 가져다준 덕분에 더 이상 돌바닥이 그대로 옷 아래에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곱아 오는 손을 얼른 안으로 숨겼다.

희한한 공간이다. 밖은 찌는 듯한 염천(炎天)인데 이 안은 지독하게 추웠다. 연화는 창문 하나 없이 완전히 막힌 네모난 돌벽의 감옥 안에서 가만히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

귓가에 스륵거리며 천자락이 돌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왕의 모친이 죽었다고 했던가, 연화는 애써 그 소리를 귓가에서 밀어내며 생각했다. 눈을 들고 싶지 않았다.

저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아이…….】

음성이 창백하다고 하면 말이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핏기가 전부 빠져나간 듯 생기 없는 목소리로 여자가 흔들거리며 속삭여 왔다. 연화는 아예 눈을 감고 무릎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뺨 근처로 스치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절대로 시선을 마주하면 안 돼.’

뭘 알아서라기보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었다. 연화는 자꾸만 늘어지는 사지에도 힘을 주면서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곧 여인의 발자국 소리가 옥 안을 오갔다. 맨발이 돌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울렸다.

【내 아이.】

연화는 눈을 떠서 팔뚝 밑으로 바닥을 훔쳐보았다. 확실한 형태의 혼령의 발이 감옥을 걷는 것이 보였다. 비쩍 마른 발과 발목이었다.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거친 피부 위로 빈 틈 없이 상처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혼령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연화가 애써 보고자 한다면 볼 수 있었으나, 보지 않으려 해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확실한 형태의 혼령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만희의 두통을 치유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혼령들과 접촉했나. 저승의 기운을 많이 쐴수록 한 발짝씩 더 저승에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었다. 연화는 자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기력이 쇠진해 가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 마. 그만해. 오라버니.】

여인이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기이하게도 확실하게 연화의 고막을 울렸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큰일이야.’

이곳에 들어온 지 사흘. 연화의 생기를 먹고 여인의 영혼은 서서히 힘을 얻고 있었다. 처음에 약사여래의 온기를 내보내 여인을 위로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온기를 전부 빨아먹고 연화에게 달라붙어 생기를 흡수하려 들어 기겁했다.

비록 생기를 먹는다고 해도 검게 뚫린 두 안구의 자리가 채워질 일은 없었으나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처음 벽 한쪽에 열십자로 매달려 있던 원혼은 이제 내려와 바닥을 걷고 연화의 뺨을 만지기도 했다. 옥 안만을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언제 바깥으로 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나가줬으면, 시야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연화의 심정이었다.

다른 이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불행한 과거를 지녔던 왕의 모친이 원혼의 상태로 여전히 죽은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단칼에 맞아죽을 일이었다.

【내 아이를 내게 보내줘…….】

여인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그녀는 돌아다니다가 연화의 앞에 멈추어 섰다. 팔뚝 밑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연화는 눈앞에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들어오는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한번, 소름 끼치게 차가운 손이 연화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기운이 쭉 빠진다. 만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령은 연화의 근처를 맴돌며 그녀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 육신은 마치 너절한 낡은 옷처럼 늘어졌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힘겨워했다.

잠시 후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여인의 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한결 힘 있게 들려왔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여인의 발걸음이 감옥의 창살 근방까지 간 것이 보였다.

힘을 얻었어도 마치 이곳에 갇힌 듯 한 장소만 맴돌던 여인은, 이번에는 창살까지 가서 한참을 그 앞에서 서 있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은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왔다.

【내 아이.】

여인의 선명한 형체는 마치 물을 헤치듯 창살 감옥을 헤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옥 안에 갇혀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연화는 마지막으로 여인의 속삭임을 들었다.

【만희야……. 빼앗긴 내 아이야.】

* * *

현무는 흥미로운 얼굴로 저승의 명부를 들추어보았다.

저승을 지배하는 그는 언제나 죽음을 마주했다. 비극과 희극, 양극단 사이에서 모든 죽음이 이루어진다. 지독하게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극단적인 죽음들을 마주하며 지내온 그에게는 세상만사가 모두 지루했지만 최근 들어 재미있는 일이 늘어났다.

“사방신의 이름이 죽음의 명부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지, 게다가 그 반려와 함께 말이야.”

“그렇습니다. 상당히 큰 건수가 되겠군요.”

그는 앞에 앉은 저승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흥이 난 듯했다. 키가 작고 마른 저승사자 견암이 현무의 눈길을 깨닫고 잠시 얼굴 표정을 정돈했다. 지금 앞에 앉은 그 역시 사방신이라는 사실을 잠깐 간과했던 탓이다.

“수국의 왕도 올라와 있고. 이번에 죽는 자의 숫자가 제법 많군.”

명부가 꽤 길다. 현무는 천천히 명부를 넘기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일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어떤 이야기이십니까?”

“어느 작은 새가 해준 이야기일세.”

갑작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현무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자였다. 저승사자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파란 새가 저승에 붉은 향낭을 지니고 방문했지. 제사에 쓰이는 그 향긋한 냄새를 풍기면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겁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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