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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87화 (87/113)

87화

“잠, 잠깐, 잠깐…… 잠깐!”

재상은 낯빛이 곧 죽을 사람처럼 납빛이 되었다. 그는 양손을 싹싹 빌었다.

“제, 제발, 이건 나나 제사장만 알던 것이라, 이건……. 제발. 잘못하면 내가 말을 발설했다고 누구나 알게 되는 것이야!”

“그래요. 두 분만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 말씀해 보시라는 겁니다. 여부에 따라 살려드릴 수도 있고 손발을 하나씩 잘라가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보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오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손목을 덧그리는 것을 느끼고 재상은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슬슬 눈치를 보았다.

“대답, 하면…… 정말 살려줄 건가?”

“물론입니다, 재상. 사내란 자고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요.”

대답하는 오유의 얼굴은 엄숙하면서도 어렸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고사(古事)에 집착해 정의로운 영웅의 흉내를 내고 싶은지도 몰랐다.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재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귀족끼리 연합해 사병을 모아 반격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 궁으로 진입해 왕을 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이 기회에 왕과 오유를 한꺼번에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리라. 급박한 순간에도 재상의 노회한 머릿속은 재빨리 계산했다.

“암, 암호는…… ‘별을 보기 위해 왔노라’이고 성벽의 왼쪽 아래를 세 번 두드리면 경비병이 열어주니까……. 제발.”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길 바라며 재상이 대답했다. 오유는 가만히 뚫어져라 재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재상. 과연 제사장께서 해주셨던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미 제사장 성현을 고문해 암호는 알아낸 상태였다. 틀림없이 하기 위해 재상에게도 답을 들은 것뿐이다. 멱살을 놓아주고서 그가 발걸음을 물렸다. 다시 복면을 고쳐 쓰면서 곁에 다가온 부관의 보고를 들었다.

“이제 성문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알겠다. 그리고 저자는…….”

오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복면 사내 둘이 그곳에 남아 있었고 재상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검은 눈알이 쥐새끼처럼 빛나는 것을 흘긋 보고 오유가 미소를 지었다. 교활하고 어리석은 작자. 늙어서도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아무것도 내려놓으려 들지 않는다. 제사장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 난세의 영웅이 되길 바랐으나 고서에 나오는 영웅들이 모두 정직하고 올곧지는 않았다. 오유는 올곧은 방법보다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자였다. 그는 부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부관이 물러나 재상에게로 향했다.

입을 막아 나오는 막힌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서는 오유의 코에도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재상이 마지막으로 지었을 표정이 눈에 훤했다.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내게.

단칼에 죽여주었으니 최소한 괴롭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곧이어 뒤를 따라온 부하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말에 오르며 오유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 정도면 훌륭하게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굳이 약속이 말 그대로일 필요야 없지. 저치들이 여태까지 해온 짓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뿐이니 말이다.

* * *

호접은 급히 날갯짓을 했다. 중간지대에서 신령계로 넘어가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 가장 깊은 동굴.’

칩거하겠다며 백호가 말하고 사라진 장소였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제자리에서 뱅글거리며 돌았다. 한시 바삐 알려야 하는 소식인데, 들어야 할 주군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답답할 노릇이라 그녀는 자꾸 조바심이 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혹시, 묘우라면 알지도.’

묘우는 여우의 신령으로 신령계에 존재하는 많은 동굴들을 잘 알았다. 걸핏하면 굴을 파고 숨는 여우의 습성 때문이었다. 어둡고 좁은 곳에 몸을 숨기기를 좋아해 그는 잠시 쉬러갈 때면 어김없이 동굴을 찾았다.

호접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방향을 틀어 백호의 궁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묘우는 궁에서 백호를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바로 묘책을 내줄지도 몰랐다.

“묘우!”

전속력으로 비행한 끝에 궁에 도착해 그녀는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갔다. 바로 사람 형태로 둔갑하며 내려선 그녀는 소리쳐 묘우를 불러댔다. 놀란 시녀들이 달려왔다.

“묘우는 어디 있느냐?”

“아, 묘우 님께선 아래층에…….”

“무슨 일이야, 호접. 왜 이리 부산스러워.”

그 때 시녀들의 뒤에서 묘우가 나타났다. 가느다란 눈의 미남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묘우를 잡고 호접은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일이 안 좋게 됐어.”

“뭐가?”

“백호 님과 연화 님에 대한 일이야. 저승 명부에……. 아, 일이 복잡해.”

호접은 가능한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해 상황을 전달했다. 최대한 상황을 축약한 설명에도 묘우는 재빠르게 알아들었다.

“맙소사.”

묘우가 중얼거렸다. 그는 비록 연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녀를 떨어트릴 간계를 꾸몄지만 백호와 멀어지기를 바랐을 뿐이지 그녀의 파국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승의 명부에 백호의 반려는 물론이고 백호의 이름마저 올라가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호접은 불안해서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갔다.

“먼저 백호 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야 해. 혹시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을…….”

그는 흥분한 호접을 진정시켰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가 묘우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청수희의 거처를 알고 있어?”

“알지.”

“그곳 봉우리 밑에 아주 깊은 동굴이 있어.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가장 깊은 동굴이지. 백호 님이 칩거하시는 장소는 아마도 그곳일 것 같다.”

“……그렇군. 그럼 지금 당장 가보겠어.”

“조심해야 해. 수직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다. 잘못 들어가면 뼈도 추리지 못하니 사람 형상으로 둔갑해 들어가면 안 된다.”

“알겠어. 지금 간다.”

호접이 당장 떨치고 일어섰다.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아 묘우가 한마디를 보탰다.

“혹시 그곳에 청수희가 있다면 내게 와달라고 말을 전해줘. 그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

“저승의 명부에 관련된 일.”

묘우는 한숨을 쉬었다. 삶과 죽음은 신이라 해도 거역할 수 없는 엄중한 경계선이다. 그러나 사방신이 생사를 달리하는 일이란 극히 드물 수밖에 없어, 평소 명부에 백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면 당연히 인간의 이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백호의 반려와 함께 올라가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명백하게 그 둘을 함께 가리키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았다.

“‘규칙의 눈’을 속이는 방법이 있을 거야. 어느 책에서인가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찾고 있을 테니, 호접 너는 빨리 청수희의 거처로 가서 백호 님을 찾고 청수희에게 말을 전해줘. 백호 님은 아마 소식을 듣자마자 인간계로 가실 테니 차후에라도 청수희가 그 방법을 전해드려야 해.”

“알겠다. 꼭 방법을 찾아내.”

호접이 바로 나비로 둔갑하여 창문을 빠져나갔다. 시녀들을 헤치고 묘우는 곧 등을 돌려 지하로 내달렸다. 넓은 자색의 소맷자락이 뒤로 날렸다. 목적지는 지하서고였다. 빠르게 달리는 그의 발밑으로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분명히, 세계의 규칙을 속이는 방법이 있었다.’

세계를 다스리는 규칙은 너무 거대해서 가끔 허점이 있다. 만약 무명(無名)이라는 자가 규칙에 인식된다면 그 특징을 베껴내어 다른 이를 무명으로 속일 수도 있었다. 물론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라 조건들이 필요했다.

명부상의 백호가 사방신 백호를 말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군을 가리킬 확률은 상당히 높았고, 묘우는 결코 백호가 저승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백호의 반려는 분명 연화를 말하는 것일 테다. 묘우 자신은 그녀를 반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백호가 그토록 깊이 마음을 주었던 상대는 그녀 하나였으니.

묘우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인간계로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저 백호의 반려가 인간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지하까지 내려가 서고로 달려들어 간 묘우는 먼지 쌓인 서책들을 바삐 꺼냈다. 오래된 서고의 책장들에서 종이 먼지가 날렸다. 책상 위에 쌓아둔 채 그는 기억을 더듬어 실마리가 있을 만한 내용들을 찾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살아온 여우의 신령으로서, 이 신령계에서 규칙에 대한 사례를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자는 없으리라. 가느다란 눈은 크게 떠져 서책의 내용들을 훑었다.

규칙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다른 이를 희생하게 만들어서라도 백호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붓과 종이를 챙길 시간도 없어 관련 있는 내용들을 전부 머릿속에 담으면서 묘우가 집중했다.

* * *

호접은 날개를 힘껏 뻗어 허공을 갈랐다. 청수희의 거처는 제법 먼 곳에 위치했으나 그녀는 신령계의 각 지역을 잘 알았다. 가장 빠른 길을 골라 재빨리 날다 날개 부근이 뻐근해질 무렵에 저 멀리 아주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호접은 먼저 구르듯이 그 봉우리 위에 내려앉았다.

“청수희! 청수희, 샘의 정령, 계십니까?!”

샘물을 향해 외쳤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호접은 애타게 수면을 두드렸다. 묘우가 하는 말은 대개 쓸모가 있었다. 청수희에게 말을 전해야 했다.

한동안 두드려도 지나치게 고요한 수면을 향해 호접은 눈썹을 찌푸렸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힘을 써서라도 그녀를 불러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호접은 화기를 손끝에 머금었다. 나비의 신령인 그녀와도 상성이 맞지 않는 힘이라 손끝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녀는 수면으로 곧장 손을 집어넣었다.

이 열기 때문에 물 밑의 생명들이 몹시 불편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샘의 밑에는 많은 생명들이 모여 살았다. 미안했지만 별수는 없었다.

“나오세요, 청수희.”

잠시 동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곧 물 밑에서 보글거리며 물방울이 끓어올랐다. 마치 끓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파도가 쳤다.

【……누구기에, 쉬고 있는 샘의 정령에게 이토록 시끄럽게 말을 거는 것입니까.】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푸른 머리의 여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뒤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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