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86화 (86/113)

86화

연화는 갑자기 방에 들이닥친 내관과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시녀들이 전부 나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은연이 내관을 붙들었다.

“아니, 염 내관.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연화 님을 끌고 가다니요.”

“전하의 명이네. 도망갈 수 없는 곳에 눈에 띄지 않게 가둬두라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은연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간 그토록 연화를 아꼈던 만희가 내린 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관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설명을 좀 해보세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은연과 사이가 좋던 염 내관은 다소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는 수염이 없는 맨들한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전하께서 조금 전 방에서 나와 내리신 명이었네. 앞뒤 사정은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연화 님을 도망갈 수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가두라는 것뿐.”

“……맙소사.”

그동안 그리도 예뻐하더니 총애는 과연 길게 가지 못했다. 은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연화를 미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런 감정은 그녀의 마음속에 없었다. 다만 궁으로 강제로 끌려온 저 여인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할 수 없지요. 전하의 명이시라면.”

이 궁 안에서 왕의 명에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바깥의 누군가는 그래도 왕의 명을 한 번이라도 거역해 주지 않을까, 은연은 요즘 간혹 생각했다. 멋대로 구는 만희의 성정이 유달리 숨 막히게 느껴졌다.

“어디에 가두려 하십니까.”

“그게.”

“음식이라도 넣어드리고 싶어 그럽니다. 잠시지만 제가 모셨던 분 아닙니까.”

강경한 은연의 말에 염 내관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전각 후원에 있는 지하옥일세. 이미 쓰임이 있은 지 이십 년이 지난 공간이니, 누구도 거기에 사람이 갇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후원의 지하옥이라면 닫힌 지 이십 년 가량 지난 곳이었다. 그곳에서 왕의 어미가 미쳐서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수군거리는 주제라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끌려가면서도 연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은연이 항의하는 모습을 보고 연화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힘없이 가느다란 꽃가지가 꺾인 듯했다. 그녀는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죄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삶에 대한 의욕 역시 사라졌으니 그리 억울할 일도 없었다. 그녀는 늘어진 어깨를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랑이의 그림을 수놓은 자수틀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언제나 즐겨 앉던 창가 자리에 더 이상 앉을 수 없다는 게 슬플 뿐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맴도는 바람을 느끼면 마치 백호가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듯한 상상을 할 수 있었는데.

* * *

연화가 끌려갔다는 이야기는 전각 안에 곧 퍼져나갔다. 빨래를 하던 사영 역시 놀라서 뛰어나왔다. 전각에 머무는 다른 이들 역시 있었기에 당장 이곳이 폐쇄되지야 않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을 가지고 있던 연화가 끌려 나갔다는 소식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사영은 초조하게 손에 든 빨랫감을 꾹 쥐었다. 분명히 왕은 연화를 제법 총애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변의 누가 봐도 명백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를 옥에 가두라는 말을 한 걸까. 불안감이 목구멍을 가득 메우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조심히 연화의 텅 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졸지간에 끌려간 터라 방 안이 몹시 어지러웠다. 침상 위에 놓인 동그란 수틀이 보여 사영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건…….”

흰 호랑이의 얼굴이 수놓아져 있었다. 빼어난 솜씨로 곱고 소중하게 놓은 자수였다. 사영은 그 수틀을 들어 올려 손으로 매만졌다.

‘뭔가 영기(靈氣)가 느껴지네.’

기묘한 느낌이다. 일반적인 자수로는 보이지 않는 묘한 영기였다.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해서 그녀는 일단 수틀을 치마 안에 넣어 숨겼다. 방을 치우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이상 챙겨야 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청수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려나? 아니면 아무래도 인간계 일이라 힘들까.’

이제 신령의 힘도 거의 잃은 사영에게 청수희는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청수희가 오지 않는다면 사영이 연락할 방법 따위는 없었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연화 님에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수도의 왕궁 근처에는 별처럼 많은 대신들의 저택이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매일 궁으로 다녀야 하는 그들을 위해 저택은 궁의 가까이에 몰려서 자리 잡았다. 그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근처를 맴돌다가 담벼락 안으로 사라졌다.

최근 수국의 정세는 흉흉했으나 수도 안, 그중에서도 고관대작의 저택이 몰려 있는 궁 주변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다. 제대로 사병을 키우기에는 돈이 지나치게 들어 문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위층은 하인들로 경비를 세우고는 했다.

하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경비로도 일하며 등골이 빠지게 착취당했다. 당연히 늦은 밤과 이른 새벽, 그들은 경비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잠을 잤다.

잠이 든 피로한 하인들의 곁으로 작은 소리가 났다. 가벼운 발걸음들 서넛이 스치는 소리였다.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조용히 지나간 발걸음은 대신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원래라면 특별히 고용한 호위무사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역시 잠이 들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세상모르고 잠이 든 호위무사의 얼굴을 보며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스걱 하고 호위무사의 목이 날아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어찌나 잘 드는 칼이었는지 두터운 사내의 목이 한 번에 잘렸다. 무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단칼에 죽임을 당했다.

허공에 피가 날렸고, 한동안 꼿꼿이 버티고 있던 목 없는 몸뚱아리가 서서히 무너져 옆으로 기울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검은 손 한 쌍이 그 육신을 받아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시체의 밑으로 피웅덩이가 고여 들었다.

“엉터리 같은 놈을 큰돈을 주어 고용한 모양이군.”

검은 복면 속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어지러워 사기꾼이 횡행했다. 무관들을 천시해 솜씨가 뛰어난 자들은 대부분 수국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다.

호위무사로 고용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치들은 대다수 저질의 무뢰배들이다. 그런 자들을, 솜씨를 볼 줄 모르는 무관들은 비싼 돈을 들이고 고용해 곁에 두었다. 아마도 지금 목이 잘리지 않았다면 언제 주인의 심장을 찌르고 재물을 챙겨 달아났을지 모르는 놈일 것이다.

사내의 시체를 그대로 둔 채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은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도 없이 쉽게 열려버린 문 안, 붉고 푸른 비단 위 화려하게 금실로 수놓은 걸개들로 장식된 방이 나타났다.

문을 하나 더 열고 가장 깊은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침상에 누워 잠든 사내가 보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자가 자신의 손녀뻘에 가까운 어린 여인을 한 팔에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여인이 먼저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그녀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서넛의 검은 인영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재빨리 틀어막고 그녀를 끌어냈다. 여인에게 재갈을 물리고 손을 묶어 꿇어앉히는 동안 노인이 눈을 떴다.

“누, 누구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노인이 말을 더듬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야 일국의 재상이 한밤중 깊은 침실에서 낯선 이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복면의 남자는 눈에 초점이 잡히고 나서야 경악해 소리를 지르려는 노인의 머리채를 쥐어 침상에 처박았다.

“조용히 하십시오, 재상 나리.”

말투는 정중하지만 동시에 싸늘했다. 그는 눈가를 좁혀 들며 손 밑에서 바둥거리는 노인을 보았다.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남자의 손은 강철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허연 노인과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복면의 남자는 혀를 찼다.

“손녀뻘은 되겠군. 부끄럽지도 않은가.”

간신히 숨을 쉬도록 놓여난 재상은 현명하게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랬다간 단칼에 맞아죽으리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벽으로 붙었다.

“그, 그……. 저 계집이 탐이 나서 온 게냐? 그렇다면 주겠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은.”

“생각하는 꼴 하고는.”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복면의 사내는 재상의 턱 끝으로 긴 검을 뽑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수염이 잘리고 목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겁을 먹은 재상이 덜덜 떨며 비명을 지르려 했고, 사내는 그의 안면을 망설이지 않고 검자루로 가격했다.

뻐걱 소리와 함께 앞니가 부러져 나가고 다시 비명을 지르려는 재상을 침상에 처박았다. 베개에 묻혀 소리가 다 뭉그러졌다.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수치스러우니.”

사내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재상의 아랫도리에서 시금털털한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실금을 해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는 꼴에 그가 눈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여간 쓸모없는 자다.

“선발대도 임무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사내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온 또 다른 복면 사내가 속삭였다.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휘었다. 어차피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단계씩 성취해 갈 때마다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거사의 날이 아닌가.

“병력은 모두 모였겠지.”

“예, 왕궁 해자 근방으로 모였습니다.”

“좋아.”

사내는 재상의 멱살을 틀어쥐어 들어 올렸다.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 입가를 가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사내가 복면을 벗어 던졌다.

“자, 재상. 내가 누군지 보시지요.”

노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복면을 벗은 오유가 해맑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신 차리세요, 재상. 제게 답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 무엇…….”

“비상 시 성문을 여는 암호가 필요합니다. 말씀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재상은 입을 뻐끔거렸다. 수도 근방 진의 장군 오유는 분명 상당히 기세를 빠르게 키워가고 있는 신진 세력이었다. 그래서 대귀족들 사이에 그를 죽여놔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선수를 쳐버렸다. 설마 눈치를 챘던 것일까.

“자, 재상. 다른 생각 하실 여유가 없으실 텐데요.”

오유는 미소를 지었다. 해사한 얼굴은 아직도 많이 어렸지만 동시에 잔인했다. 그는 검을 재상의 손목으로 가져갔다.

“이대로 손을 잃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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